• 페이스북
  • 트위터
  • 유튜브

30년 전 '한·소 수교' 순간…'91년1월1일' 긋고 '9월30일' 썼다

등록 2021.03.29 09:00:00

  • 이메일 보내기
  • 프린터
  • PDF

1990년 외교문서 2090권, 33만쪽 일반 국민에 공개

공동 발표문 초안과 러시아 정본에 91년1월1일 표기

한국은 공란…유엔 한소·외교장관 회담서 극적 타결

소련 "경협 규모가 협상 기간에 단축에 도움이 될 것"

정부, 5년간 20만 달러 규모 예상…"소련 과도한 요구"

 [서울=뉴시스] 외교부가 생산한 후 30년이 경과한 1990년도 문서를 중심으로 2090권 분량, 33만쪽의 외교문서를 29일 국민에게 공개했다. 사진은 1990년 9월30일 한·소 수교 당시 소련 측이 준비한 공동합의문 정본. (사진/외교부 제공) photo@newsis.com

  [서울=뉴시스] 외교부가 생산한 후 30년이 경과한 1990년도 문서를 중심으로 2090권 분량, 33만쪽의 외교문서를 29일 국민에게 공개했다. 사진은 1990년 9월30일 한·소 수교 당시 소련 측이 준비한 공동합의문 정본. (사진/외교부 제공) [email protected]

[서울=뉴시스] 이국현 기자 = 한·소련 수교 당시 양국 외무장관이 수교 시기를 1991년 1월1일이 아닌 9월30일로 앞당겨 서명한 극적인 순간을 담은 외교 문서가 고스란히 공개됐다. 

외교부는 29일 이 같은 내용이 포함된 30년이 경과한 외교문서 2090권 분량, 33만쪽의 외교문서를 일반에 공개했다. 이번에 공개된 문서는 노태우 전 대통령의 미국 방문, 한국 유엔 가입 추진, 노태우 전 대통령의 방미, 한·소련 수교 등이 담겨 있다.
 
노태우 정부는 집권 초부터 소련 및 중국을 비롯한 공산권 국가와 관계 정상화를 위한 '북방 외교' 정책을 추진해 1989년 헝가리를 시작으로 동구권 국가들과 외교 관계를 수립했고, 1990년에는 소련과 역사적인 국교를 수립했다. 소련 역시 페레스트로이카(개혁) 및 글라스노스트(개방) 정책을 펼치며 수교 여건이 조성된 시점이기도 했다.

이번에 비밀 해제된 문서에는 1990년 유엔에서 열린 셰바르드나제 소련 외무장관과 최호중 외교부 장관 간의 한·소 외교장관 회담에서 최대 쟁점이었던 수교 시기가 앞당겨진 기록들이 담겨 있다.

◇한국 "연내 수교" 소련 "경협 규모가 협상 기간 단축에 도움"

김종인 경제수석비서관과 김종휘 대통령 외교안보보좌관을 단장으로 하는 정부대표단은 고르바초프 대통령의 요청에 따라 8월2일부터 7일까지 소련을 방문해 국교 수립을 위한 협상을 벌였다.

한국 정부는 연내 수교 타결을 희망했다. 반면 소련 측은 수교에 찬성하지만 문제는 시기라는 입장을 밝혔다. 한국 정부는 수교 없이는 국회 동의 등 국내 여론에 비춰 거액의 경협 제공이 어렵고, 우리 기업이 수교 없이 대소 투자를 꺼려한다는 점도 설명했다. 또 수교는 한반도 안정 및 북한의 개방 유도 등 소련의 이익에도 부합한다는 점도 설득했다.

하지만 소련 측은 수교에 앞서 경제 협력을 통한 관계 정상화 의지를 드러내다. 대표단 방소 결과 보고에 따르면 "도브라닌 대통령 고문은 경협 협상이 관건임을 언급하고, 경협 규모가 협상기간 단축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입장을 전했다. 이후 대표단은 방소 평가 및 제언을 통해 "소련 측의 과도한 경협 요구에 대한 대처 입장 수립을 요망한다"고 적기도 했다.

앞서 정부대표단은 방소 시 경협 관계에 대한 내부 입장을 통해 "수교를 전제로 향후 5년간 20억불 정도의 외상 수출 자금을 차관, 연불 수출 자금, 뱅크론, 민간 신용 등 형태로 제공, 소련이 부족한 물자를 한국으로부터 수입토록 지원"하는 방안을 논의했지만 소련의 요구는 한 발 더 나아갔던 것으로 보인다.

결국 최 장관은 수교 직전인 9월26일 노태우 대통령에게 친전을 보내 "수교일자를 변경하려면 다시 대통령의 결재를 얻어야 하며 그 경우 재가를 받을 가능성을 보장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9월30일 회담 전에 결정이 이뤄질 지도 의문이라는 우려를 표시했다"며 소련 측을 설득하되 최종적으로 소련 측의 안을 수락하는 것이 불가피하다고 보고했다.

하지만 대통령 비서실장은 외무장관에게 자필 친전을 보내 "한소 수교는 명년까지 기다릴 것 없이 가급적 금년 내 빠른 시기에 대통령 각하께서 방소해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과 수교를 발효시키고, 제반 경제 관계 협정을 관계 장관 간에 서명하도록 적극 교섭하라"고 지시했다.
 [서울=뉴시스] 외교부가 생산한 후 30년이 경과한 1990년도 문서를 중심으로 2090권 분량, 33만쪽의 외교문서를 29일 국민에게 공개했다. 사진은 1990년 9월30일 한·소 수교 당시 한국 정부가 준비한 공동합의문 정본. (사진/외교부 제공) photo@newsis.com

[서울=뉴시스] 외교부가 생산한 후 30년이 경과한 1990년도 문서를 중심으로 2090권 분량, 33만쪽의 외교문서를 29일 국민에게 공개했다. 사진은 1990년 9월30일 한·소 수교 당시 한국 정부가 준비한 공동합의문 정본. (사진/외교부 제공) [email protected]

최 장관은 9월27일 아태 외상 만찬 전에 쉐바르드나제 소련 외상과 별도로 만나 연내 수교를 합의하고, 11월 말 시기가 적절치 않다면 12월 초에라도 대통령이 모스크바를 방문해 외교관계 수립을 공식화할 것으로 또다시 제의했다.

소련 외상은 국내 절차를 거쳐 확정된 것인만큼 변경 불가능하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그러면서 "노 대통령의 방소는 원칙적으로 환영하지만 11월과 12월 국내외 여러 문제로 바쁜 때로 어려움이 있고, 소련의 전통적인 우방인 북한을 자극하지 않아야 할 필요성이 있는 것이므로 너무 서두르지 않고 추진하는 것이 양국을 위해 유익하다"고 답했다.

◇최호중 장관 "오늘 날짜로 수교하자는데 동의하는 것인가" 되물어

이처럼 수교 발표 직전까지 소련이 주장을 굽히지 않으면서 소련 언론은 1991년 1월1일 수교가 발효될 것이라고 보도했지만 회담 현장에서 반전이 일어난 것이다.

'한·소 외상회담' 기록에 따르면 최 장관은 "실무급에서 우리 두 사람이 서명토록 준비한 공동 코뮤니케의 수교 일자를 1991년1월1일에서 오늘 날짜로 수정해 서명할 것을 다시 한번 강력히 요청한다"고 말했다.

이에 소련 외상은 "보좌관들이 수교 일자를 91년1월1일로 할 것을 건의하고 계속 주장하고 있으나 현실적, 법적으로는 오늘인 9월30일자로 수교한 것으로 할 수 있지 않겠는가 생각한다"고 전향적인 입장을 드러냈다.

놀란 최 장관은 "다시 한번 분명히 확인해 둘 필요가 있다"며 "오늘 날짜로 수교하자는데 동의하는 것인가? 공동 코뮤니케에 그렇게 수교 날짜를 정정하자는 것이냐"고 되물었다.

그러자 소련 외상은 "오늘 날짜로 수교하자는데 동의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즉석에서 뒷쪽에 배석 중인 실무자에게 공동 코뮤니케를 달라고 해 '91.1.1'로 되어 있는 수교 일자를 '90.9.30'로 정정하고, 서명까지 하려고 했다. 그러자 배석자들이 서명은 회담 후 기자들 앞에서 하기로 했다고 만류했다는 상황이 담겨 있다.

당시 소련 측은 공동 발표문 초안에 수교 시기를 1991년 1월1일로 못박고, 러시아어 정본에도 '91년 1월1일 부로 대사급 외교 관계를 수립하기로 결정했다'고 적었다. 반면 우리 정부는 한국어 정본에 '0년 0월 0일'이라며 공란으로 비워둔 채 마지막까지 소련과의 협상 여지를 열어둔 상황이었다.

다만 쉐 외상은 "오늘 한국과 소련이 수교하기로 한 것은 매우 중대한 결정"이라면서도 "한 가지 문제 만은 현실적으로 봐야 한다. 그것은 북한을 설득하는데 어려움이 있다는 것이다"라며 "우리도 한국과 같이 설득해 보려고 노력하겠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남북이 직접 대화를 갖는 것이다. 수교 결정이 남북 관계에 도움을 줄 것으로 기대한다"고 밝혔다.

결국 한소 외무장관이 현장에서 수교 일자를 9월30일로 동의하면서 한국어 정본 공란에는 수기로 9월 30일을 써놓고, 러시아어 정본에는 날짜를 고쳐 적으며 역사적 국교가 수립된 것이다.
 
수교에서 정부는 노태우 대통령의 고르바초프 대통령 방한 초청과 연내 소련 공식 방문 의향을 전달하고, 소련 측은 고르바초프 대통령에게 보고 후 외교경로를 통해 결과 회신하기로 약속했다. 유엔 가입 문제와 관련해 소련 측은 남북한의 우선협의가 바람직하다는 입장을 밝히고 한·소련 수교 결정이 남북대화에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는 내용도 담았다. 

하지만 당시 소련과 맹방 관계였던 북한은 강한 불만을 드러냈다. 북한 민주조선은 1990년 9월19일자 논평을 통해 "최근 평양에서 개최된 소련·북한 외상회담 시 김영남 외상이 한·소련 수교는 한반도 통일에 결정적인 방해가 되기 때문에 허용할 수 없다"며 강력 항의하고, 소련 측에 정식 전달했다. 특히 한소 수교 발표 직후에는 북한대사가 유엔 로비에서 주유엔 대사에게 다가와 발표 시점에 차이가 난 사정을 문의했다는 전문도 담겨 있다.


◎공감언론 뉴시스 [email protected]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