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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소 정상회담 막전막후…김일성, '수교시 사절단 철수' 위협

등록 2021.03.29 11:1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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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외교문서 2090권, 33만쪽 국민에 공개

노태우 한·소 정상회담 추진 지시에 막후 채널 가동

소련 측 "정상회담 종료 시까지 완벽한 보안 요구"

김일성, '한·소 관계 정상화 시 사절단 철수' 위협

소련측 회담 후 "北신경질적 반응에 韓 홍보 자제"

[서울=뉴시스] 외교부는 생산 후 30년이 경과한 1990년도 문서를 중심으로 총 2,090권(약 33만쪽)의 외교문서를 2021년 3월 29일 원문해제와 함께 국민에게 공개했다. 사진은 한소 공동성명. (사진/외교문서 캡처) photo@newsis.com

[서울=뉴시스] 외교부는 생산 후 30년이 경과한 1990년도 문서를 중심으로 총 2,090권(약 33만쪽)의 외교문서를 2021년 3월 29일 원문해제와 함께 국민에게 공개했다. 사진은 한소 공동성명. (사진/외교문서 캡처)  [email protected]

[서울=뉴시스] 이국현 기자 = 1990년 6월4일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노태우 대통령과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이 만난 한·소 정상회담이 암호명 '태백산'으로 두 달간 극비리에 추진된 것으로 드러났다.

당시 북한 김일성 주석이 한·소 관계 정상화 시 사절단 철수를 위협하면서 반발하자 소련이 마지막까지 '완벽한 보완'을 요구한 데 따른 것으로 회담 장소와 시간이 이틀 전에야 결정되기도 했다.

외교부는 한소 정상회담 준비 과정과 기본 문서와 자료, 후속조치 및 홍보, 지역별 반응 등이 담긴 1990년 생산 외교문서 2090권, 33만쪽 분량을 29일 일반에 공개했다.

역사적인 정상회담에서 양국은 개혁 개방과 동서화해, 한반도 및 동북아 평화 정착, 남북한 관계, 한·소련 양국 관계에 관해 의견을 교환하는 성과를 거뒀다.

한·소 정상회담을 준비하는 과정은 '태백산'이라는 암호명으로 극비리에 진행됐다. 1990년 4월 7일 노태우 대통령은 한·미 정상회담 추진 상황을 보고 받는 자리에서 부시 미국 대통령과 고르바초프 대통령 간 미·소 정상회담이 한·미 정상회담 다음 날인 5월30일 워싱턴에서 개최되는 것을 지적하면서 한·소 정상회담 추진을 지시했다.

이후 청와대 고위 비서진들은 고르바초프 대통령 측근과 접촉을 시도하고, 미국에도 협조를 요청했다. 소련 측은 검토 입장을 표명했으나 최종 입장 결정이 지연되고, 국내 정치 상황으로 노 대통령의 방미 계획이 취소됐다.

이에 정부는 1990년 5월 막후 채널을 통해 제3국에서 정상회담 추진 문제를 제기했으며, 소련 측은 주모스크바 영사처를 통해 6월4일 회동에 합의했다. 이후 도브리닌 소련 대통령 외교고문을 한국에 파견해 이 사실을 통보하고 협의에 나섰다. 이후 정부는 1990년 5월31일 한소련 정상회담 개최를 공식 발표했다.
  
회담 시간과 장소가 이틀 전에 확정됐다는 점도 회담이 얼마나 극비리에 추진됐는지를 보여준다. 이정빈 차관보는 회담 이틀 전인 6월2일에야 페어몬트 호텔에서 6월4일 오후 5시경부터 1시간 정도 회담이 개최될 계획이라고 보고했다.

당시 외무부는 "대외 발표 및 대 우방국 협의가 늦어진 것은 한·소 정상회담 합의가 최종 순간 극적으로 이뤄졌고, 소련 측이 미·소 정상회담 종료 시까지 완벽한 보안을 요구한 데 기인한다"고 밝혔다.

소련이 극비 추진을 요구한 것은 당시 맹방이었던 북한이 한·소 관계 정상화에 대한 반발이 상당했기 때문이다.

[서울=뉴시스] 외교부는 생산 후 30년이 경과한 1990년도 문서를 중심으로 총 2,090권(약 33만쪽)의 외교문서를 2021년 3월 29일 원문해제와 함께 국민에게 공개했다. 사진은 1989년 1월 쌍용건설 초청으로 방한한 미구엘 스테클로프 고문이 전한 세바르드나제 외상의 소련 방문시 김일성 주석과 대화 내용. (사진/외교문서 캡처) photo@newsis.com

[서울=뉴시스] 외교부는 생산 후 30년이 경과한 1990년도 문서를 중심으로 총 2,090권(약 33만쪽)의 외교문서를 2021년 3월 29일 원문해제와 함께 국민에게 공개했다. 사진은 1989년 1월 쌍용건설 초청으로 방한한 미구엘 스테클로프 고문이 전한 세바르드나제 외상의 소련 방문시 김일성 주석과 대화 내용. (사진/외교문서 캡처) [email protected]

1989년 1월 쌍용건설 초청으로 방한한 미구엘 스테클로프 고문은 "1989년 1월 세바르드나제 외상의 소련 방문시 김일성 주석과 최근 소련의 대한 정책에 대해 심각한 의견 대립이 있었다"고 전했다.

특히 미구엘 고문은 "김일성 주석은 만일 소련이 헝가리식의 대한국 관계 정상화 시에는 모스브타 주재 대사관 이외 공식 사절단의 전원 철수로 소련 외상을 위협했다"고 밝혔다.

이에 세바르드나제 외상은 귀국 직후 "소련 연방상의와 한국 코트라 간 협력 관계 수립은 소련 정부의 최고위층이 결정한 사항이며, 당초 소련 연방정부는 정부 차원의 공식 관계 수립을 검토했으나 국제 정세 여건이 성숙되지 않았다는 판단하에 취소했다"는 입장을 밝히기도 했다.

당시 주미대사는 회담 직후 소련 측이 "북한이 무척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기 때문에 한국 측이 회담을 지나치게 홍보하지 않기를 희망한다"며 "한소 관계를 커다란 프로세스의 일부로서 추진할 것"이라는 입장을 전했다고 보고했다.

실제 북한은 한·소 정상회담에 대해 강하게 반발했다. 북한 외교부 대변인은 5월31일 회담 소식이 전해지자 조선중앙통신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한·소련 정상회담에 반대하는 입장을 발표했다.

회담 직후에는 김희수 주소련 북한대사대리가 소련 외무성을 방문해 "한소 정상회담은 한반도에서 사태를 악화시키고 남북한 간 첨예한 대립을 조장시킬 것"이라고 항의했다.

한민족 중앙위원회는 설명을 통해 "한·소련 정상회담은 통치 위기를 모면하고 두 개 한국을 국제적으로 합법화하기 위한 사대 매국, 분열 행각"이라며 "민족의 근본이익과 배치되며 통일지향에 역행하는 반평화, 반통일 죄악으로 용납할 수 없는 민족반역의 흥정판"이라고 비판했다.

이처럼 북한의 반발 속에서도 한국과 소련은 정상회담에 이어 1990년 9월 30일 유엔 본부에서 역사적인 국교 수립을 선언한 공동성명서에 서명했다.


◎공감언론 뉴시스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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