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만세" 외치고 산화한 장갑차 위 청년은 김준동씨
1963년 해남 출생 목공소 견습생
진상조사위, 계엄군 저격 피살 확인
[서울=뉴시스] 박태홍 기자 = 광주 시민들이 1980년 5월 24일 전남도청 앞 상무관에서 계엄군 발포로 사망한 시민들을 추모하고 있다. 박태홍 뉴시스 편집위원이 1980년 당시 한국일보 사진기자로 재직 중 5·18 광주 참상을 취재하며 기록한 사진을 5·18광주민주화운동 40주년에 즈음해 최초로 공개한다. (사진=한국일보 제공) 2020.05.17. [email protected]
5·18민주화운동진상규명조사위는 12일 대국민 보고회를 열고 5·18 유공자인 김씨의 사망 경위를 확인했다고 밝혔다.
김씨는 1980년 5월 21일 오후 2시께 도청 앞 집단 발포 현장에서 계엄군 저격수의 조준 사격에 의해 숨졌다.
계엄군은 이날 오후 1시께 옛 전남도청 앞에 모인 광주시민들을 향해 집단 발포를 감행했다.
10여 분 동안 이어진 계엄군의 집단 발포 끝에 시민들은 해산하는 듯 했으나, 곧 1000여 명의 시민이 전남도청 앞으로 다시 모여들었다.
시민들 가운데 일부가 태극기를 두르고 뛰쳐나오자 빌딩 곳곳에 배치된 저격수들이 사격을 가했다.
태극기를 두른 시민들이 쓰러지고 뒤따르던 시민들의 수습이 반복되던 가운데 장갑차가 시위대 사이에서 나타났다.
장갑차 위에는 김씨가 상의를 벗고 흰 머리띠를 두른 채 태극기를 들고 올라타 있었다.
전남도청으로 돌진하는 장갑차 위에서 김씨는 태극기를 흔들며 "광주 만세"라고 외쳤다.
장갑차가 광주관광호텔 앞을 지나던 찰나 계엄군 저격수의 총탄이 그의 머리를 향했다. 흉탄에 머리를 맞은 그는 곧 고꾸라졌으며, 장갑차는 그를 싣고 광주천 방향으로 운전대를 튼 뒤 사라졌다.
머리가 크게 훼손돼 신원을 파악할 수 없었던 김씨는 당시 그를 쏜 계엄군의 진술을 통해 신원이 드러났다.
진상조사위는 지난해 5월 그를 쐈다는 계엄군의 진술을 확보하고 1년 동안 조사를 이어왔다. 김씨 사망 직후의 사진과 당시 적십자병원에 안치됐던 시신들의 사진을 비교하는 동시에 5·18 기록관에 소장된 그의 유품을 대조하면서 신원을 확인했다.
김씨는 최초 5·18 행방불명자로 신고됐지만, 2002년 무연고 사망자 11명의 유전자 검사를 통해 그의 신원이 확인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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