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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75주년] ⑰소년단도 새로운 국가 건설에 한 몫

등록 2020.04.26 06: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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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조선소년군 전통 이은 대한소년단

소련소년단과 아동단의 경험 이은 조선소년단

해방직후부터 같은 이름, 다른 활동으로 분화



해방정국 3년의 역사적 경험은 오늘날 한반도가 당면한 문제를 풀어나가는데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해 준다. 과거의 실패를 성찰해야 현재의 과제를 파악할 수 있고, 미래를 내다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문제의식으로 광복 75주년을 맞아 새롭게 발굴된 사진과 문서를 중심으로 해방 직후 격동의 3년간을 매주 재조명해 본다. [편집자 주]


17. 대한소년단과 조선소년단

1946년 8월 15일 미군정청(중앙청) 앞 광장에서  해방 1주년을 기념해 ‘8·15 평화 및 해방1주년시민경축대회 기념식’이 성대하게 열렸다. 당시 신문들은 미군정 간부들과 각계 인사, 5만 명의 행렬대, 약 30만 명의 일반 관람자가 참가했다고 보도했다. 이 행사의 맨 앞줄에는 ‘특별한 손님’들이 자리 잡았다. ‘조선소년군’ 단원들이다. 이들은 오전 8시 서울역 광장에 모였다가 미군정청 앞으로 이동해 행사에 참여했다.

[서울=뉴시스] 1946년 8월 15일 해방 1주년을 맞아 미군정청 앞 광장에서 개최된 ‘8.15세계평화 및 해방기념식’에 참석해 앞자리에 앉아 있는 소년군 대원들. (사진=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04.26. photo@newsis.com

[서울=뉴시스] 1946년 8월 15일 해방 1주년을 맞아 미군정청 앞 광장에서 개최된 ‘8.15세계평화 및 해방기념식’에 참석해 앞자리에 앉아 있는 소년군 대원들. (사진=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04.26. [email protected]


조선소년군은 전 해인 1945년 10월 5일 ‘조선소년군 창립 23주년’을 기념하는 시가행진에 수만 명의 청소년이 참가하면서 해방 후 첫 모습을 드러냈다. 이날 시가행진은 구국 청소년운동을 목적으로 배재학교와 중앙고보 학생 중심으로 조선소년군 경성(서울) 제1호대 발대식을 가진 날을 기념하는 행사였다.

일제강점기 때 창설된 조선소년군이 1924년 이상재(李商在) 선생을 총재로 하여 확대 발전됐으나 1934년 강제 해산됐기 때문에 11년 만에 재건을 위한 첫걸음을 내디딘 것이다.

그 후 1946년 3월 사단법인 대한보이스카우트 중앙연합회로 재발족했지만 조선소년군이란 명칭은 계속 사용되었고, 이듬해에는 「조선소년단」 교본을 발행하기도 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에는 ‘대한소년단’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서울=뉴시스] 1947년 서울의 ‘초등학교’(현재 초등학교)와 평양의 인민학교(현재 소학교)에서 학생들이 수업에 열중하고 있다. 당시까지만 해도 남과 북의 초등학교 학생들의 머리 모양이나 복장이 크게 다르지 않았다. (사진=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04.26. photo@newsis.com

[서울=뉴시스] 1947년 서울의 ‘초등학교’(현재 초등학교)와 평양의 인민학교(현재 소학교)에서 학생들이 수업에 열중하고 있다. 당시까지만 해도 남과 북의 초등학교 학생들의 머리 모양이나 복장이 크게 다르지 않았다. (사진=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04.26. [email protected]


남쪽의 소년군(소년단)은 1945년 12월 서울운동장에서 열린 순국선열추념대회, 1946년 어린이날 행사, 그해 6월 유해가 송환된 윤봉길·이봉창·백정기 3열사 추도회 등 중요 행사에 빠짐없이 참가했다. 그러나 북한의 소년단과 달리 정치색이 강한 행사에 동원되지는 않았다.

38선 이북에서도 ‘조선소년단’이란 이름은 같지만, 성격은 조금 다른 청소년 조직이 등장했다. 1946년 5월 5일 해방 후 처음 맞이한 어린이날을 남과 북은 같은 날 성대하게 기념했다. 당시까지는 남과 북의 소학교나 중학교 학생들의 머리 모양이나 복장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서울=뉴시스] 1946년 5월 5일 해방 후 첫 어린이날을 맞아 평양 공설운동장에서 수만 명의 소학교가 모인 가운데 각종 공연을 하며 기념행사를 진행하고 있다. 이때까지만 해도 서울과 평양에서 똑같이 5월 5일을 어린이날로 기념했다. 북한은 그해 6월 6일 조선소년단을 창립한 후 이날을 어린이날에 해당하는 ‘국제아동절’로 기념하기 시작했다. (사진=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04.26.  photo@newsis.com

[서울=뉴시스] 1946년 5월 5일 해방 후 첫 어린이날을 맞아 평양 공설운동장에서 수만 명의 소학교가 모인 가운데 각종 공연을 하며 기념행사를 진행하고 있다. 이때까지만 해도 서울과 평양에서 똑같이 5월 5일을 어린이날로 기념했다. 북한은 그해 6월 6일 조선소년단을 창립한 후 이날을 어린이날에 해당하는 ‘국제아동절’로 기념하기 시작했다. (사진=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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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날을 크게 기념한 북한은 남쪽보다 조금 늦은 6월 6일 조선소년단 창립행사를 개최했다. 북한은 해방 직후부터 노동자, 농민, 청년, 여성 등 각 계급·계층별로 대중단체가 조직됐는데, 소년들의 통합조직인 조선소년단 결성도 그러한 작업의 일환으로 추진되었다.

북한의 소년단은 1922년 5월 창립된 소련 소년단(피오니르, 개척자란 뜻)을 모델로 하고 있다. 북한에서는 1930년대 항일무장투쟁 시기 유격대 산하에 조직된 아동단에 시원을 두고 있다고 주장한다.

자율적인 남쪽의 소년단과 달리 북쪽 소년단의 경우 북조선민주청년동맹(민청) 산하에 설치된 소년부의 지도를 받아 활동했다. 북한은 조선소년단의 임무와 운영방안을 담은 조선소년단 세칙을 발간하는 한편, 이북 전역의 인민학교에 소년단을 조직했다.

[서울=뉴시스] 1946년 6월 6일 조선소년단 창립식을 마친 평양의 소년단원들이 악대를 앞세우고 창립 경축 시가행진을 하고 있다. (사진=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04.26. photo@newsis.com

[서울=뉴시스] 1946년 6월 6일 조선소년단 창립식을 마친 평양의 소년단원들이 악대를 앞세우고 창립 경축 시가행진을 하고 있다. (사진=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04.26. [email protected]

[서울=뉴시스] 1946년 6월 평안남도 순천군의 한 인민학교에서 거행된 소년단 입단식 모습. 북한에서는 북조선민주주의청년동맹의 지도로 전국적으로 소년단 입단식이 거행됐다. (사진=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04.26. photo@newsis.com

[서울=뉴시스] 1946년 6월 평안남도 순천군의 한 인민학교에서 거행된 소년단 입단식 모습. 북한에서는 북조선민주주의청년동맹의 지도로 전국적으로 소년단 입단식이 거행됐다. (사진=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04.26. [email protected]

[서울=뉴시스] 1946년 6월 조선소년단 창립을 맞아 평양의 소년단원들이 창립행사 기념 벽보를 만들고 있다. (사진=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04.26. photo@newsis.com

[서울=뉴시스] 1946년 6월 조선소년단 창립을 맞아 평양의 소년단원들이 창립행사 기념 벽보를 만들고 있다. (사진=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04.26. [email protected]


1946년 북한의 모든 인민학교와 중학교에 조직을 마친 소년단에 주어진 첫 정치적 임무는 그해 11월 3일 시행된 도·시·군 인민위원회 선거를 홍보하는 선거선전대, 가창대 활동이었다.

선거 홍보지를 나눠주고, 악대를 조직해 선거 참여를 독려하는 일이었다. 당시 소년단의 핵심 구호는 ‘새 민주 조선을 위하여 항상 배우고 준비하자’였다. 이와 함께 농촌일 돕기, 문맹 퇴치 운동 선전 등에도 한몫을 담당했다.

[서울=뉴시스] 1946년 11월 북한의 소년단원들이 할아버지와 할머니들을 한글을 가르치는 위해 설치된 성인학교로 안내하고 있다. 1946년 6월 북한에서 창립된 조선소년단에 부여된 첫 번째 중요 임무는 그해 11월 3일 치러진 도·시·군 인민위원회 선거와 문맹 퇴치 운동을 홍보하는 ‘선전대’, ‘가창대’ 활동이었다. (사진=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04.26. photo@newsis.com

[서울=뉴시스] 1946년 11월 북한의 소년단원들이 할아버지와 할머니들을 한글을 가르치는 위해 설치된 성인학교로 안내하고 있다. 1946년 6월 북한에서 창립된 조선소년단에 부여된 첫 번째 중요 임무는 그해 11월 3일 치러진 도·시·군 인민위원회 선거와 문맹 퇴치 운동을 홍보하는 ‘선전대’, ‘가창대’ 활동이었다. (사진=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04.26. [email protected]


“항상 준비”라고 외치며 한 손을 들어 인사하는 것과 붉은 스카프는 조선소년단을 상징한다. 소년단의 구호 “항상 준비”는 소련 소년단의 “브씨그다 가토프”를 그대로 우리말로 옮긴 것이다.

해방 직후에는 소련군이 진주하고 있었기 때문에 조선소년단 단원들은 평양에 거주하고 있던 소련군 소학교 자녀들과도 자주 ‘친선 모임’을 진행했다. 북한과 소련의 우호친선 관계를 선전하려는 목적이었다.

[서울=뉴시스] 해방 직후 평양에 진주한 소련군 간부들의 소학교 자녀들로 구성된 소년단(피오니르)과 평양의 소년단원들이 친선모임을 갖고 있다. 북한 사진기자가 써 놓은 사진의 설명에는 “소련 삐오넬과 춤을 추는 소년단원. 말 몰라도 서로 안다. 마음이 통하니까! 조선 어린이와 소련 어린이와의 친선 만세”라고 쓰여 있다. (사진=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04.26. photo@newsis.com

[서울=뉴시스] 해방 직후 평양에 진주한 소련군 간부들의 소학교 자녀들로 구성된 소년단(피오니르)과 평양의 소년단원들이 친선모임을 갖고 있다. 북한 사진기자가 써 놓은 사진의 설명에는 “소련 삐오넬과 춤을 추는 소년단원. 말 몰라도 서로 안다. 마음이 통하니까! 조선 어린이와 소련 어린이와의 친선 만세”라고 쓰여 있다. (사진=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04.26. [email protected]


소년단은 반-분단-학교소년단으로 조직되었고, 학교에는 소년단위원회가 구성됐다. 지금까지도 이러한 형태의 조직이 유지되고 있다. 일상적인 소년단 조직 운영에서 가장 중요시된 것은 일주일에 한 번 열리는 ‘생활총화’(남쪽의 학급 회의에 해당)였다.

일주일간의 조직 활동과 맡겨진 일을 얼마나 잘 수행했는지를 성찰하고, 다음 주 분공(分功)을 논의하는 회의이다. 현재 북한의 소년단은 소학교 2학년부터 초급중학교 3학년 학생까지 300여 만 명으로 구성돼 있다.

[서울=뉴시스] 1946년 7월 북한의 평양 제1 소학교 소년단원들이 분단총회(학급 회의에 해당)를 진행하고 있다. 북한 소년단의 일상활동 중 가장 중요한 것이 1주일에 한 번 열리는 ‘생활총화’이다. 70여 년 이 지난 지금까지도 계속 유지되고 있다. (사진=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04.26. photo@newsis.com

[서울=뉴시스] 1946년 7월 북한의 평양 제1 소학교 소년단원들이 분단총회(학급 회의에 해당)를 진행하고 있다. 북한 소년단의 일상활동 중 가장 중요한 것이 1주일에 한 번 열리는 ‘생활총화’이다. 70여 년 이 지난 지금까지도 계속 유지되고 있다.  (사진=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04.26. [email protected]


해방 후 남쪽에서는 1947년에, 북쪽에서는 1946년에 같은 이름의 ‘조선소년단’ 세칙이 출간되기도 했지만, 1948년 분단 정부가 들어서면서 청소년 조직인 소년단도 대한소년단과 조선소년단으로 ‘분단’되어 버렸다. 그 후 남쪽의 소년단은 민간차원의 스카우트운동으로 이어졌고, 북쪽의 소년단은 그대로 유지하여 현재 “사회주의 강국건설의 후비대”로 기능하고 있다.


정창현 평화경제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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