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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테랑 형사의 안타까운 극단적 선택…유족 순직 신청

등록 2021.03.07 14:55:59수정 2021.03.07 14:5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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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울한 옥살이 윤성여 씨, 재심서 무죄 선고 후 고마운 경찰관으로 꼽아

이춘재사건 재수사 과정서 선배들 조사하며 괴로움, 회의감 호소

양진호·조재범 등 굵직한 사건 잇따라 수사하며 스트레스 높아졌을 듯

유족들 "박 반장 극단적 선택으로 그간 쌓아온 공적 사라질까 걱정"

[수원=뉴시스]사진공동취재단 = 화성연쇄살인범 이춘재 8차사건의 범인으로 투옥되어 20년간 복역한 윤성여 씨가 17일 오후 경기도 수원시 수원지방법원 형사법정에서 무죄 선고를 받고 기뻐하고 있다. 2020.12.17. photo@newsis.com

[수원=뉴시스]사진공동취재단 = 화성연쇄살인범 이춘재 8차사건의 범인으로 투옥되어 20년간 복역한 윤성여 씨가 17일 오후 경기도 수원시 수원지방법원 형사법정에서 무죄 선고를 받고 기뻐하고 있다. 2020.12.17. [email protected]

[수원=뉴시스]안형철 기자 = "박일남 반장님, 감사합니다."

지난해 11월 19일, 수원지방법원 501호 법정.

이춘재 연쇄살인 8차 사건 범인으로 몰렸던 윤성여(54)씨는 20년간의 억울한 옥살이 끝에 재심을 청구했다.

그는 이날 결심공판에서 검찰이 자신에게 무죄를 구형하자 그동안 자신의 무죄를 믿고 도와준 여러 명의 은인 이름을 불렀다. 박일남 반장(경위)도 그 중 한 명이다.

박 반장은 1980년대 악명을 떨쳤던 일명 ‘화성연쇄살인사건’이 이춘재(57)의 자백으로 전면 재수사에 들어갔던 2019년 7월 이 사건을 맡았다.

그는 두달 뒤 범행을 자백한 이춘재를 상대로 수사하면서 윤 씨가 누명으로 몰린 사실도 밝혀냈다.

이 과정에서 윤 씨에게 가해졌던 가혹행위 등 부당한 수사로 인한 경찰의 과오도 드러났다.

베테랑 형사답게 ‘이춘재연쇄살인사건’ 말고도 그의 손을 거쳐간 사건은 수두룩하다.

당시 경기남부경찰청 광역수사대 소속이었던 박 반장은 양진호 한국미래기술회장 사건, 조재범 전 쇼트트랙 국가대표 코치 사건 등 굵직한 사건을 맡아왔다.

이러한 과도한 업무가 그를 스트레스로 내몰았던 것일까. 윤 씨가 무죄를 선고받는 데 큰 도움을 줬던 박 반장은 1년 2개월여 전 극단적 선택으로 세상을 떠났다.
【성남=뉴시스】이윤청 수습기자 = 상습폭행과 마약류관리법 위반 등의 혐의를 받는 양진호 한국미래기술 회장이 첫 공판을 받기 위해 24일 오전 경기 성남시 수원지방법원 성남지원 법정으로 들어서고 있다. 2019.01.24. radiohead@newsis.com

【성남=뉴시스】이윤청 수습기자 = 상습폭행과 마약류관리법 위반 등의 혐의를 받는 양진호 한국미래기술 회장이 첫 공판을 받기 위해 24일 오전 경기 성남시 수원지방법원 성남지원 법정으로 들어서고 있다. 2019.01.24.  [email protected]

박 반장은 이춘재연쇄살인사건 재수사가 진행 중이던 2019년 12월 19일 경기 수원시 모처에서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 경찰이 지난해 7월 종합수사를 발표하기 7개월 전이다.

박 반장의 가족과 동료들은 쉴 틈 없이 이어진 수사 일정과 그 속에서 겪었던 스트레스가 영향을 줬을 것으로 보고 있다.

20년 가까이 박 반장과 알고 지내온 한 경찰관은 "사고가 있기 며칠 전에 둘이 만난 자리에서 박 경위가 ‘너무 힘들다. 이번에는 힘든 게 다르다’고 어려움을 토로했다. 특히 선배들을 다시 수사하는 과정에 많은 회의감을 느낀 것 같다"고 당시 상황을 전했다.

이어 "사회적으로 많은 주목을 받아 같은 사건이라도 이춘재 사건은 업무강도가 더욱 높았다. 과거 경찰의 잘못을 드러내고, 결과적으로 어떤 처벌이나 결과도 이끌어 낼 수 없는 상황도 더욱 마음을 힘들게 한 것 같다"고 말했다.
【수원=뉴시스】추상철 기자 = 조재범 전 쇼트트랙 국가대표 코치가 23일 오전 경기 수원시 영통구 수원지방법원에서 심석희 선수를 비롯한 쇼트트랙 선수 4명을 상습 폭행 등 사건에 대한 항소심 공판을 받기 위해 호송차서 내려 법정으로 향하고 있다. 2019.01.23. scchoo@newsis.com

【수원=뉴시스】추상철 기자 = 조재범 전 쇼트트랙 국가대표 코치가 23일 오전 경기 수원시 영통구 수원지방법원에서 심석희 선수를 비롯한 쇼트트랙 선수 4명을 상습 폭행 등 사건에 대한 항소심 공판을 받기 위해 호송차서 내려 법정으로 향하고 있다. 2019.01.23.  [email protected]

지난해 12월 17일 법원에서 재심 사건의 무죄를 선고받은 윤성여 씨도 그의 갑작스런 죽음을 안타까워했다.

윤 씨는 뉴시스와의 통화에서 "박 반장님의 안타까운 소식을 들었을 때 갑자기 하늘에서 뭔가 꽝 떨어진 느낌이었다"며 "숨지기 3~4일 전에도 통화하고 잘 마무리되면 소주 한 잔하자고 약속했는데 그게 마지막 될 줄 몰랐다"고 말했다.

또 "마지막 통화도 답답한 심정에 내가 먼저 걸었던 전화다. 참고인 조사를 모두 마치고도 한 달에 한 번씩은 박 반장님에게 감사의 마음도 전하고 답답한 마음을 풀어내고자 그렇게 통화를 해왔다"고 박 반장을 회상했다.

윤 씨는 "(박 반장이) 야근을 많이 하다 보니까 당시에도 많이 피로해 보였다"며 "당시 사건이 선배들을 조사해야 하는데 아마 이런 압박감을 못 이기지 않았을까 생각도 들고  30년 된 사건을 다시 파헤치는 것도 힘들었을 것 같다"고 말했다.

유족들은 가족을 잃은 슬픔에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다.

박 반장의 아내는 "이춘재 사건 전에도 양진호 사건, 조재범 사건 등 굵직한 사건을 1년 가까이 계속 맡아왔다"며 "지친 모습이 보이기도 했지만 내색하는 사람도 아니었고, 평소에도 일하느라 밖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아서 당시에도 조금 힘든 일을 맡고 있다고만 생각했다"고 말했다.

이어 "이춘재 사건을 수사할 때는 선배 경찰들을 만나고 와서는 지금 초라한 모습으로 있는 선배들을 보며 착잡함을 보이기도 했다"며 "‘나도 잘못해서 억울하게 형을 살게 했던 사람이 있는 것은 아닌가’라고 직업적인 회의감을 표현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가장 걱정되는 것은 집보다 밖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내며 나라를 위해 일을 해왔는데 스스로 떠난 것 때문에 그동안 남편이 해왔던 일이 모두 없던 일이 돼 버리는 것이 가장 힘들다"며 "그동안 남편이 나라를 위해 헌신했던 공적과 명예를 위해서라도 순직으로 인정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수원=뉴시스] 경기남부경찰청 전경.

[수원=뉴시스] 경기남부경찰청 전경.

현재 박 반장이 소속됐던 경기남부경찰청은 유족들을 도와 박 경위의 순직 인정을 돕고 있다.

경기남부청은 박 경위의 극단적 선택에 대해 ▲강력사건 수사를 위해 지속적인 90시간 이상의 지속적인 과로 ▲고인의 사망 직전 사회적 이목이 쏠린 양진호 사건, 쇼트트랙 국가대표 감독 관련 사건 등으로 인한 업무적 스트레스 및 압박감 ▲이춘재 8차 사건 담당하며 최고조에 달한 부담감과 스트레스 ▲가족에게 신경 쓰지 못했다는 자책감, 자괴감 등이 복합 작용한 것으로 봤다.

경기남부청 관계자는 "박 경위가 지속적인 과로와 스트레스로 정상적인 인식능력이나 행위선택능력, 정신적 억제력이 현저히 저하된 상태에서 사망한 것으로 추정한다"고 순직 신청 사유를 밝혔다.

현재 박 경위의 순직 인정에 대해서는 지난 20일 인사혁신처 실사 등을 마치고 오는 5월 인사혁신처 공무원재해보상심의회에서 심의가 열릴 예정이다.


◎공감언론 뉴시스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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