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열단100주년]⑧종로경찰서 폭탄 투척 김상옥…홀로 일제경찰 400명과 전투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이후인 1919년 11월10일. 만주의 한 시골 마을에 신흥무관학교 출신 젊은이 13명이 모였다. 이들은 대한의 독립을 위해 항일 무장 투쟁을 벌이기로 뜻을 모아 조선의열단을 결성했다. 뉴시스는 프랑스 레지스탕스 활동에 비견되는 의열단의 창단 100주년을 맞아 '조선의열단 100주년 기념사업 추진위원회' 도움으로 의열단의 대표적 인물들을 매주 소개한다. 독립운동사에 지울 수 없는 족적을 남겼음에도 잊혀져만 가는 선인들의 숭고한 희생과 헌신을 재조명해 본다.
【서울=뉴시스】김상옥 의사의 모습. 2019.09.14. (사진=조선의열단 100주년 기념사업 추진위원회 제공) [email protected]
폭탄이 터지면서 건물 일부가 파괴됐고, 건물 앞을 지나가던 기자를 포함해 7명이 파편에 맞아 다치는 등 중경상을 입었다. 종로경찰서와 그 주변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됐다.
하지만 폭탄을 던진 사람의 행방은 묘연했고, 조선총독부에서는 누가 폭탄을 던졌는지조차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5일이 지나서야 무장한 일제경찰들이 이 대담한 조선인을 쫓았지만, 오히려 10여 명의 경관이 살상을 당할 뿐이었다.
쌍권총을 든 이 용맹스러운 조신인은 일제경찰과 1 대 400 대결에서 당당하게 싸우고, 마지막 남은 한 발을 자신의 머리에 겨눴다.
서울 한복판에서 이처럼 당당하게 일제에 무장투쟁을 벌인 주인공이 바로 의열단원 김상옥(1889~1923) 의사다.
1889년 1월5일 서울에서 태어난 김상옥 의사는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셔 홀어머니 밑에서 어렵게 자랐다. 8세 무렵부터 벌써 말총으로 체의 얼개미를 만드는 쳇불노동에 종사했다.
그렇지만 가난으로 제대로 공부는 하지 못해도 야학교를 다니며 학업에 정진했고, 누구보다 의협심이 강해 청년시절부터 독립운동에 관심이 많았다.
1903년 14세에 대장간에서 일하면서 대장간 이지호 노인에게 한문을 배웠고, 그 무렵부터 연동교회에 나가기 시작했다. 1905년께에는 동대문교회로 옮기고, 밤에는 동대문교회 부설 신군학교 안에 별도로 설치된 신군야학에 다녔다. 1907년 18세에는 동흥야학을 만들어 불우청소년들에게 배움의 기회를 주면서 자신도 공부에 매진했다.
1910년 21세 무렵 미국 유학의 꿈을 품고 황성기독교청년회관(YMCA) 부설 야간 영어반에 등록해 낮에는 대장간에서 노동을, 밤에는 영어공부를 했다. 이듬해 동대문교회 근처에서 기독교 서점을 운영했으나 경영난으로 1년 만에 폐업했다. 이후 1912년 5월부터 10월까지 삼남지방을 돌면서 기독교 서적을 보급하는 한편 약품 판매를 하며 견문을 넓혔다.
1912년 10월 23세 때 약품 판매로 마련한 밑천으로 서울에 돌아와 동대문 앞 창신동 493번지 신작로 변에 형 김춘옥, 동생 김춘원과 함께 영덕철물점을 열고 경제적인 독립을 이뤘다.
김상옥 의사는 영덕철물점을 운영하는 한편 1913년 경상북도 풍기에서 채기중, 유창순, 한훈 등과 함께 비밀결사인 대한광복단을 결성해 군자금을 모금하고 무기를 구입했다. 1916년 5월에는 한훈, 유장렬 등과 전남 보성군 조성면의 헌병대 기습작전에 참여해 반민족 분자 2명을 처단하고 무기를 탈취하기까지 한다.
또 1917년부터는 영덕철물상회를 경영하며 조선물산장려운동과 일본에서 수입한 상품을 배척하는 운동을 전개했다. 이를 위해 말총모자를 창안해 생산·보급했으며, 농기구·장갑·양말 등도 생산해 지방을 돌며 국산품 장려에 앞장섰다.
그러다 1919년 3·1운동이 전국적으로 일어난다. 3·1운동은 김상옥 의사에게도 중대한 계기가 된다. 그는 그해 4월 동대문교회 안의 영국인 피어슨 여사 집에서 윤익중, 신화수 등과 함께 혁신단이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했다. 혁신단은 '혁신공보'(뒤에 독립신문으로 개제)를 발간해 독립사상을 고취했으며, 김상옥 의사는 이 과정에서 신문 제작의 재정 지원을 맡는 한편 배포 책임자로서 일선에서 활동했다.
그러나 의사는 이 같은 평화적인 방법에 한계를 절감했고, 1920년 1월 하순 동지들과 암살단을 조직해 일제 고관과 민족반역자에 대한 응징 및 숙청을 기도하기로 결심하게 된다. 특히 4월에는 한훈, 유장렬 등과 함께 전라도 지방에서 친일민족반역자 수명을 총살하고, 오성헌병대분소(烏城憲兵隊分所)를 습격해 장총 3정과 군도(軍刀) 1개를 탈취하기도 했다.
1920년 8월24일에는 미국의원단이 내한한다는 소식을 접하고, 이를 영접하기 위해 나오는 총독 사이토 및 일본 고관을 암살하려는 계획을 추진했다. 하지만 거사 하루 전 일본경찰에게 정보가 탐지돼 동지들이 붙잡히고 단독으로 활동이 여의치 않자 10월 말 상해로 망명했다.
이후 같은 해 11월 임시정부요인 김구, 이시영, 조소앙, 신익희 등과 만나 항일전 거사 계획에 참여하는 동시에 김원봉을 만나 조선의열단에 입단하게 된다. 의사는 의열단 가입 후 국내로 들어와 최경학의 밀양경찰서 폭탄 투척사건(1920년)을 지원했다. 1921년 7월에도 일시 귀국해 충청도·전라도 등지에서 군자금 모금과 정세 파악의 임무를 수행한 후 상해로 돌아가기도 한다.
그러다 1922년 11월 중순 드디어 임시정부요인 이시영, 이동휘, 김구, 조소앙, 의열단장 김원봉 등과 함께 조선총독 및 주요 관공서에 대한 암살·파괴를 목적으로 하는 계획을 세우게 된다. 이 거사의 적임자로 의열단원인 감상옥 의사와 동지인 안흥한이 뽑혔는데, 이들은 모두 스스로 지원을 했다.
김상옥 의사는 1923년 1월 사이토 총독이 일본제국의회 참석차 동경으로 떠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이를 기회로 삼기로 했다. 그는 거사용으로 의열단에서 준비한 권총 3정과 실탄 500발, 살포용 '의열단 선언' 등을 지닌 채 1922년 꽁꽁 얼어붙은 압록강을 밤중에 걸어서 건넜다.
경의선 간이역에서 몸을 숨긴 채 석탄수송차에 올라타 12월1일 일산역에서 내려 결국 서울로 잠입하는 데 성공한다. 대형 폭탄은 다른 의열단원을 통해 별도로 전달받기로 했다.
이윽고 1923년 1월12일 오후 8시10분,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지는 거사가 진행됐다. 종로경찰서와 그 주변 현장은 아비규환이었다.
거사 5일 뒤인 1월17일 저녁, 김상옥 의사는 그날도 서울역사와 주변을 돌아보고 은신처인 매부 고봉근의 집으로 돌아와 잠을 청하려고 했다. 그러나 새벽 3시께 이상한 낌새가 느껴져 문틈으로 내다봤고, 무장한 일제경찰이 은신처로 몰려들어와 그를 포위하고 있음을 확인했다.
김상옥 의사는 단 한치의 망설임없이 두 손에 권총을 들고 총격전을 벌이기 시작했다. 이 전투에서 종로경찰서 형사부장이자 유도사범인 다무라(田村振七)를 사살했으며 종로서 이마세 경부, 동대문서 우메다 경부 등 수명이 차례로 의사의 총탄에 맞아 쓰러졌다.
의사는 추격하는 일본경찰에게 총을 쏘며 눈 덮인 남산을 넘어 금호동에 있는 안장사(安藏寺)로 피신했다. 그는 여기서도 기지를 발휘해 승복과 짚신을 빌려 변장을 한 채 산을 내려와 경찰들을 따돌린다. 18일에는 무내미(현 수유동) 이모집에서 은신하고 19일 새벽에 삼엄한 일본경찰의 경계망을 피해 효제동 이혜수의 집으로 피신했다.
하지만 일제의 추격은 집요했다. 일제는 가족들과 지인의 뒤를 밟아 최후 은신처인 이혜수의 집을 알아냈고, 무장경찰 400여 명을 풀어 결국 포위하기에 이른다. 당시 일제는 김상옥 의사 단 1명을 상대로 선발대, 형사대, 기미대, 자동차대 등 엄청난 병력을 동원했다.
1923년 1월22일 새벽, 의사는 최후 은신처마저 탐지되자 단신으로 두 손에 권총을 쥐고 효제동 일대를 겹겹이 포위한 400여 명의 일본경찰과 3시간 반 동안 총격전을 벌였다. 이 전투에서 구리다 경부를 비롯한 10여 명을 살상했고, 최후의 항전을 하다 탄환이 다하자 결국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며 마지막 남은 탄환 한 발을 자신의 머리에 쏘아 자결했다.
그가 순국한 뒤 일제 총독부 검의관은 검시 과정에서 김상옥 의사의 몸에 수십 발의 총탄이 박혀 있었음을 확인했다. 총탄 수십 발을 맞고도 마지막까지 총을 놓지 않고 의열단원의 용맹을 만천하에 전한 것이다.
정부는 의사의 이 같은 공훈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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