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넘어북한]북한은 '잔소리 공화국'
청년동맹, 직업총동맹, 여성동맹에 보낸 김정은 서한
주민들에게 이래라저래라 온갖 잔소리가 절반 넘어
2주 전에 '창넘어 북한' 동영상 마지막 편을 내보내면서 잠정적으로 중단한다고 알렸습니다. 이번 주부터 '창넘어 북한'이라는 타이틀로 동영상 없이 북한 소식을 전하는 글을 연재하기로 했습니다.
당분간 글로만 북한 소식을 종합 정리해 전해드릴 예정입니다. 가급적 매주 쓸 계획입니다만 가끔 거르는 주도 있겠습니다.
[서울=뉴시스] 북한 조선중앙TV는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4일 당 중앙위원회 본부청사에서 진행된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제8기 제1차 정치국회의를 주재했다고 6일 방영했다. (사진=조선중앙TV 캡처) 2021.06.06. [email protected] *재판매 및 DB 금지
북한은 올해 들어 4월 사회주의애국청년동맹 대회, 5월 직업총동맹, 6월 여성동맹 등 북한 주민 전체를 묶어두고 있는 각종 단체의 대회를 연달아 개최했습니다. 애초 농업근로자총동맹 대회도 열릴 것으로 예상됐습니다만 아직 열리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들 대회마다 김정은 총비서가 서한을 보냈는데 글 형식에 재미있는 특징이 있었습니다. 바로 서한 내용 전체 문장들 가운데 '~해야 합니다'라고 김정은이 북한 주민들에게 잔소리하는 내용의 문장이 절반을 넘는다는 것입니다.
4월 29일 청년동맹 대회에 보낸 서한 "혁명의 새 승리를 향한 력사적 진군에서 사회주의애국청년동맹의 위력을 힘있게 떨치라'는 노동신문 2개 면에 전면으로 실린 장문입니다.
모두 모두 134개 문장으로 구성돼 있는데 이중 '~해야 합니다'로 끝난 문장이 61개였습니다.
5월 27일 직업총동맹에 보낸 서한 "직업동맹은 사회주의 건설의 새로운 고조기를 앞장에서 열어나가는 전위부대가 되자"라는 서한도 2개 면에 실린 장문입니다. 모두 126문장으로 구성돼 있는데 이중 '~해야 합니다'로 끝난 문장이 81개였습니다.
6월 20일 여성동맹에 보낸 서한 "녀성동맹은 우리식 사회주의의 전진발전을 추동하는 힘있는 부대가 되자"도 2개면에 실렸습니다. 146문장 가운데 '~해야 합니다'로 끝난 문장이 95개에 달합니다.
북한에서 하느님과 같은 권위를 가진 김정은이 사람들에게 지시하는 내용은 한마디 한마디가 교조(敎條)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교조에 대한 네이버 국어사전의 뜻풀이는 "역사적 환경이나 구체적 현실과 관계없이 어떠한 상황에서도 절대로 변하지 않는 진리인 듯 믿고 따르는 것" 또는 "종교상의 신조"입니다. 그 같은 교조가 단체별로 61가지에서 95가지까지 내려진 겁니다.
저는 워낙 개인주의 성향이 강해서인지 누가 저한테 이래라 저래라 하는 걸 잘 참지 못합니다. 그런데 김정은 총비서는 북한 주민 전체를 상대로 '잔소리'를 60번 이상 100번 가까이 거리낌 없이 해댔습니다.
예를 들어 여성 동맹에 보낸 서한에서 김정은은 크게 세 가지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선 '정치의식을 높이기 위한 사상사업을 잘해야 한다'면서 노동신문과 '조선여성'이라는 잡지를 열심히 읽으라고 주문했습니다.
둘째 '문화도덕적 풍모를 지녀야 한다'면서 '치마저고리를 입어라'라거나 '깨끗하게 생활하고 절약하라'는 내용도 있네요.
이런 대목도 있습니다.
"비록 가정생활에서 부족한 것이 있어도 가정의 주부로서, 며느리로서, 안해와 어머니로서의 책임을 항상 자각하면서 시부모들을 잘 모시고 남편과 자식들이 국가와 사회 앞에 지닌 본분을 훌륭히 수행해 나갈 수 있게 정성을 다하여야 합니다."
세 번째로 강조한 '애국사업'이 가장 긴 내용입니다. 애국사업은 직업활동과 공익활동을 포괄하는 정도의 뜻입니다. 너무 많은 내용이 포함돼 있어서 일일이 소개하진 않겠습니다만 직장생활과 재활용, 육아 등 여성의 삶 모든 부문을 다 언급하고 있습니다.
95가지에 달하는 잔소리는 김정은 총비서가 북한의 여성들에게 아침에 일어나서 저녁에 잠들 때 까지 한 순간도 빠지지 않고 간섭한다는 느낌을 줍니다.
'북한은 잔소리 공화국'이라고 한 제 느낌에 공감하시나요?
[서울=뉴시스] 북한 노동당원들은 매일 아침 모여서 노동신문을 읽으며 당방침을 숙지해야 한다. 사진은 최근 노동신문에 실린 노동신문 독회 장면. (출처=노동신문) 2021.07.23.
특히 이달 들어 상반기엔 간부들을 다그치는 내용의 글이 거의 매일 등장했습니다.
2일 자 1면 사설 제목은 "일군들은 당 중앙위원회 제 8기 제2차 정치국 확대회의 사상을 높이 받들고 혁명적 수양과 단련을 더욱 강화하자"입니다.
잘 알려진 대로 6월 말에 열린 정치국회의에서 김정은 총비서가 리병철 정치국 상무위원 등 고위 간부 여럿을 문책 경질한 일이 있었습니다.
위 사설은 김 총비서가 한 연설 내용의 한 대목을 부각해 강조하는 내용입니다. 자신의 지시를 무조건 집행하지 못하는 간부들은 사상적으로 문제가 많기 때문이라고 질책하면서 목숨을 바쳐서라도 지시사항을 관철해야 한다는 내용입니다.
이런 식의 '잔소리글'이 3일, 4일, 5일, 6일, 10일, 12일 1면에 실렸습니다. 그런데 이런 잔소리 위주의 글들이 13일부터는 김정은 총비서를 우상화하는 '숭배글'로 슬며시 바뀝니다.
14일 자는 "혁명가의 제일 신조-순간을 살아도, 한 생을 살아도 경애하는 총비서동지를 위하여!"라는 글입니다. 15일자는 "언제나 인민을 마음속에 안으시고"라는 글이 실렸습니다.
16일 자는 "백절불굴의 혁명가가 되자"라는 정론이 실렸습니다. 이 글도 제목만 보면 잔소리에 해당할 것 같습니다만 글 내용은 '백절불굴의 핵은 수령에 대한 충실성'임을 강조하고 있어 역시 김 총비서에 대한 충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17일 자는 2면에 "경애하는 총비서 동지는 주체조선의 무궁강대한 힘이시다-희세의 위인을 높이 모신 인민의 끝없는 영광"입니다.
18일 자는 다시 '잔소리글'이 실린데 이어 19일자에는 노동신문, 근로자 공동논설 "이민위천, 일심단결, 자력갱생 리념을 더 높이 들고나가자"가 실렸습니다. 1월초에 열린 8차 노동당대회 슬로건을 다시 한번 강조하면서 노동당의 이념을 새삼 강조하는 내용입니다. 상반기 코로나와 식량난 등으로 어수선해진 북한 사회 분위기를 다잡기 위해 쓴 글로 보입니다.
20일 자는 "경애하는 총비서동지를 순결한 량심과 의리로 받드는 참된 인간이 되자"의 '잔소리글' 겸 '숭배글'이, 21일자는 1면에는 "혁명의 지휘성원들은 당과 인민 앞에 다진 엄숙한 서약을 결사의 실천으로 지키자"는 '잔소리글'과 2면에 "승리와 영광으로 빛나는 위대한 혁명령도의 10년-당의 령도력과 전투력을 백방으로 강화하신 불멸의 업적"라는 '숭배글'이 실렸습니다.
7월 노동신문의 주요기사를 길게 나열한 건 노동신문을 매일 읽으면서 느낀 생각을 전하기 위해서였습니다.
[평양=AP/뉴시스]북한 조선중앙통신이 제공한 사진에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7일 평양에서 열린 노동당 8차 대회 3일 차 회의에 참석해 발언하고 있다. 김정은 위원장은 이날 대남문제를 고찰하고 대외 관계를 전면적으로 확대·발전시키겠다는 견해를 드러낸 것으로 전해졌다. 2021.01.08.
그런데 그 '웅대한 포부'가 시작부터 삐걱거리고 있습니다. 코로나와 경제제재를 뚫고 경제 발전을 달성하겠다는 생각 자체가 애당초 무리한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당장 북한은 경제 발전은커녕 식량난으로 북한 주민들이 굶어 죽지 않도록 하는 일이 급해진 상황이니까요. 그러자 김정은 총비서는 나이 많은 간부들을 질책하고 대거 경질하는 것으로 책임 전가를 했습니다.
그렇지만 김 총비서 자신도 도무지 넘기 힘든 커다란 장벽에 가로막혔다는 좌절감을 느끼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제 머리를 스쳤습니다.
젊은 사람이 의욕적으로 큰 일을 벌였는데 여기저기서 펑크가 나니 짜증과 나고 좌절감을 느낄 수 있다는 건 누구라도 예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월초에는 간부들을 채찍질하는 글을 싣다가 슬며시 김 총비서를 우상화하는 글로 도배를 이어서 1월 당대회에서 선보인 이념을 새삼 강조하는 노동신문의 흐름은 조금 미묘합니다.
제 생각엔 혹시라도 좌절하는 김 총비서를 보고 그를 보필하는 아래 사람들이 '다시 마음을 다잡으시라고' 넛지(Nudge)한 건 아닐까요?
글로 쓰는 '창넘어 북한' 예전처럼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공감언론 뉴시스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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