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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파독 광부·간호사 국외 희귀기록물 대거 공개

등록 2013.12.18 10:00:00수정 2016.12.28 08:3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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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서독 파견후보자 제1진 장성훈련소 수련기념(독일동포역사자료실, 1964).2013.12.18.(사진 = 안행부 국가기록원 제공)  photo@newsis.com

【서울=뉴시스】서독 파견후보자 제1진 장성훈련소 수련기념(독일동포역사자료실, 1964).2013.12.18.(사진 = 안행부 국가기록원 제공)  [email protected]

국가기록원, 파독 50주년 기념 희귀기록물 전시회 개최 파독 광부, 열악한 근무환경 탓 65명 사망 간호사는 시체 닦기·틀니세척 허드렛일 해 차별·외면 역경 딛고 현지서 인정받아 정착

【서울=뉴시스】김훈기 기자 = 광부와 간호사의 파독 50주년을 맞아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희귀 기록물들이 일반에 대거 공개된다.

 안전행정부 국가기록원은 광부·간호사 파독 50주년을 맞아 '반세기 만에 다시 울려 퍼진 독일 아리랑'이라는 주제로 독일 정부기관, 전문기록보존소, 사회단체 등에서 수집한 국외  희귀기록물 전시회를 18~29일 서울도서관(옛 서울시청)에서 개최한다고 18일 밝혔다.

 이번에 공개되는 기록물은 국가기록원이 2012년부터 최근까지 약 2년간 독일 광산기록보존소·사회운동기록보존소·병원협회 등 독일 전문기록관리기관과 사회단체 등에서 수집한 총 25만여 매 중에서 엄선한 150여점이다. 

 파독 광부·간호사들의 험난한 독일생활 기록, 1960년대 이후 재독한인사회의 형성·발전과정 기록, 1920년대 일제강점기에 민간차원에서 시도된 한·독 교류 관련 기록 등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기록이 다수 포함되어 있다.

 영상기록으로는 파독 광부·간호사들의 독일 도착과정과 광산·병원에서의 근무모습, 파독광부·간호사들의 인권 관련 독일 측과의 논의모습 등 기존 영상에서 보기 힘든 장면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광산기록보존소 기록 등 최초 공개

 파독 광부와 관련된 방대한 기록은 독일 광산기록보존소와 사회운동기록보존소 등에서 수집됐다. 이 기록들은 국내에서 처음 소개되는 귀중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한국과 독일간의 광부 파견에 관한 협의과정 기록을 살펴보면, 1963년 4월 한국대사관이 독일 광산 측에 한국 광부 파견을 요청하는 '서신'을 보냈다. 독일 광산측은 '일본 광부들과 동일한 조건으로 파견을 원한다면 한국인 광부를 고용할 용의가 있다'고 답변해 그해 12월16일 '한국광부 파견에 관한 한-독 협정서'가 체결됐다. 일본 광부들은 1957~1963년까지 매해 400명 가량 파견됐다.

 우리나라는 1963~1977년 75차례에 걸쳐 모두 7936명의 광부들이 독일에 파견됐다. 1963년 최초로 파독광부 500명 모집에 전국에서 4만6000명이 응모, 100대1에 육박하는 경쟁률을 보였다. 이중 상당수는 대졸이상의 학력을 갖췄다. 음대나 미대를 졸업한 사람도 있었고 태권도 전국대회 은메달리스트, 경찰출신, 사이클 선수, 월남전참전 해병대 출신, 맹호부대 출신, 서울대법대생, 장관보좌관, 교사 등도 있었다.

【서울=뉴시스】독일 교육탄광에서 실습하는 모습(독일광산기록보존소, 1966).2013.12.18.(사진 = 안행부 국가기록원 제공)  photo@newsis.com

【서울=뉴시스】독일 교육탄광에서 실습하는 모습(독일광산기록보존소, 1966).2013.12.18.(사진 = 안행부 국가기록원 제공)  [email protected]

 이렇게 해서 뽑힌 1진 123명은 1963년 12월21일 김포공항을 출발해 미국 앵커리지를 거쳐 수십 시간의 비행 끝에 독일 뒤셀도르프 공항에 도착해 독일 각지의 광산으로 배치됐다.

 파독 광부들의 임금기록에 따르면 당시 월급은 평균 650~950마르크(당시 원화 가치 13만~19만원)였으며 이는 국내 직장인 평균 8배에 달하는 큰 금액이었다. 1963년 우리나라의 1인당 GNP는 79달러로 필리핀(170달러)과 태국(260달러)에도 크게 못 미쳤으며 국내 실업률은 30%에 육박했다.

 파독 광부들의 다양한 생활상을 담은 기록들도 새롭게 확인됐다. 파독 광부들의 탄광 실습 장면과 독일어 수업 광경을 비롯해 '광부 광산근무 시 지켜야할 수칙 안내문'부터 '광부 작업복 제공 및 세탁 안내문', '신분증 발급 안내문' 등 탄광 내 광부들의 일상사 관련 기록이 담겼다.

 또 파독광부들이 부당해고를 당하고 있다는 기사와 한국 광부의 인권 관련 보도, '한인자치회에서 저임금 등의 해결을 독일 노동조합에 요청하는 서신' 등 힘겨운 노동현장 관련 기록들도 전시된다.

 실제로 파독광부들은 독일 맥주 한 병과 보리빵으로 한 끼를 때우는 생활 속에서도 여가시간에 틈틈이 독일어 공부, 첨단기술습득 등 자기개발에 투자했다. 또한 새벽 4시에 기상해 종일 고된 노동을 했는데, 지하 1200m 갱도에서 섭씨 35도를 넘는 지열과 석탄가루를 견뎌 내야만 했다. 이처럼 열악한 근무환경 탓에 파독 광부들은 1964~1979년 사이 65명이 사망했다.

 ◇독일병원협회 기록 최초 소개    

 파독 간호사 관련 독일병원협회 기록도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것이다. 여기에는 파독간호사들의 병원 내 다양한 생활모습과 '양로원에서 일하는 한인 간호사가 다른 병원으로 옮기고 싶다는 서신'(1973년)처럼 한국 간호사들이 독일과의 문화적 차이 등으로 어려움을 겪는 모습 등도 소개되어 있다.

 파독 간호사들은 언어가 서툴다는 이유로 처음에는 시체 닦기, 환자 목욕, 침대시트 갈기, 화장실 청소, 틀니세척 등 허드렛일을 해야 했다. 하지만 독일 병원 내 환자를 중심으로 입소문이 퍼지면서 한국 간호사에 대한 호평이 이어져 현지 언론에서도 연꽃, 천사 등으로 부르기도 했다.

 파독 간호사들은 1966~1976년 모두 1만1057명이 파견됐으며 평균 약 800마르크(당시 원화가치 약 16만원)의 월급을 받았다.

 독일병원에서 만든 '한국간호사들의 독일병원 적응을 위한 교육프로그램'(1974년), '독일병원협회와 한국개발공사 간 한국간호사 업무개선 회의'(1974년) 등 한국간호사들이 독일병원에서 잘 적응할 수 있도록 도와줬던 양국 간 노력을 담은 기록도 확인되고 있다.

 개인 기증기록물 중에는 간호보조원으로 출발해 무기한 계약서를 받고 수간호사로 임명되기까지의 일대기를 확인 할 수 있는 기록, 해방직후 간호대학 재학 중 발발한 6·25전쟁으로 간호장교로 입대하게 되고 이후 다시 파독 간호사로 가서 생활하는 등 한국간호사 변천사를 이해할 수 있는 기록 등이 눈에 띈다.

 한편 1959년 독일 마인츠대학병원 소아과 의사로 재직했던 이수길 박사 개인기증기록도 주목된다. 이 박사는 한국 간호사 파독의 산파 역할을 한 인물이다. 이번 전시회에서는 당시 대통령비서실에서 "박정희 대통령의 휘호를 보낸다"는 '공문'과 당시 중앙정보부장 김형욱이 이수길 박사에게 보낸 개인 서신도 공개됐다.

【서울=뉴시스】1960년대 초 한국 간호사의 독일병원 취업을 주선했던 독일 아이힝어(Eichinger) 신부와 파독 간호사들.2013.12.18.(사진 = 안항부 국가기록원 제공)  photo@newsis.com

【서울=뉴시스】1960년대 초 한국 간호사의 독일병원 취업을 주선했던 독일 아이힝어(Eichinger) 신부와 파독 간호사들.2013.12.18.(사진 = 안항부 국가기록원 제공)  [email protected]

 ◇재독 한인사회의 발전상도 보여줘

 1970년대 초반 들어 점차 독일사회에 익숙해지고 생활이 안정되면서 파독 광부와 간호사간 결혼이 많아지는 등 재독 동포사회가 본격적으로 형성됐다. 파독 광부와 간호사가 결합해 새로운 가정이 꾸려지면서 2, 3세대가 형성됐고 이들의 교육을 위해 주말 한글학교도 세워지기 시작했다. 현재 독일의 한국교민 3만여 명중 1만2000여명이 광부나 간호사 출신이다.

 이외에도 파독 광부·간호사들이 발간한 '새 활동', '재독간호' 등의 잡지와 '교포신문, '우리 신문' 창간호, 한글학교 교재, 민족문화학교 포스터 등 파독 광부·간호사들이 이후 재독한인사회를 형성하는 과정과 관련된 기록도 공개됐다.

 여기에는 IMF당시 조국통장 갖기 운동 관련 기록, 위안부 문제를 독일사회에 알리는 사진기록, KAL기 피격희생자추모에 관한 기록 등 독일 광부·간호사들이 대한민국 정치, 경제, 문화적 발전에 지속적인 관심과 애정을 보냈던 기록도 확인되고 있다.

 실제로 1965~1975년 파독광부·간호사들이 대한민국에 보낸 송금액은 모두 1억1530만 달러에 달했다. 이는 같은 기간 우리나라 국민총생산(GNP)의 약 2%에 해당하는 액수다.

 ◇초기 한·독 관계 자료도 망라  

 초창기 한독 관계 기록 중 '독일 바이에른 수도원장이 독일 외무부에 보낸 서신'에 의하면 일제강점기 이후 1949년까지 원산 등 북한지역에 모두 66명의 베네딕트수도원 소속 신부와 수녀들이 있었다는 사실이 기록돼 있다.

 또한 베네딕트신부 중 한명인 파비안담(Fabian Damn) 관련 기록도 처음 확인됐다. 파비안담 신부는 1958년에 김천에서 선교활동을 하면서 성의여자고등학교 졸업생 30명을 선발해 서독병원에 간호학생으로 입학시킨 인물이다.

 이 외에도 1920~30년대 독일유학생들이 조직한 '유덕고려학우회'에서 일본의 폭정을 독일사회에 알리는 기록과 대표적인 독일지역 독립운동가인 이미륵을 필두로 김법린·허헌·이극로 등이 1927년 벨기에 '세계피압박민족회의'에 참석하는 사진 등도 확인됐다.

 이동기 강릉대 교수는 이번 기록 공개에 대해 "1883년 한독수교 및 일제강점기 이후 민간차원의 교류가 해방 후 공식적인 정부차원의 교류로 이어지는 과정을 복원한 기록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며 "광산기록보존소·병원협회 기록은 이 분야 연구를 한 단계 발전시킬 수 있는 귀중한 기록"이라고 평가했다.

 유정복 안행부 장관은 "이번 기록 공개를 계기로 미국, 일본, 중국, 러시아, 중남미 등 세계 각국에 산재한 재외동포의 역사와 관련된 기록을 국가 차원에서 수집 관리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들어 나갈 계획"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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