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광진·장두이 "연극 '리어왕', 에베레스트 오르는 심정"
윤광진 연출, 연극 '리어왕'(사진=명동예술극장)
윤 연출은 31일 오후 서울 명동예술극장에서 열린 '리어왕' 간담회에서 "영국에서 '리어왕'은 에베레스트와 같다"면서 "정상을 허락하지 않는 자리다. 높이를 측정할 수 없다"고 잘라 말했다.
"연습하는데 정말 힘든 산을 올라가고 있다. 공연이 보름 남았는데 조난 없이 귀환을 했으면 한다.(웃음) 올라가면서 다른 연극에서 볼 수 없는 새로운 풍경을 보고 있다. 이를테면 우리 나라 관객들이 셰익스피어에서 볼 수 없었던 비전을 보는 중이다."
'리어왕'은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 중에서 가장 심오하다. '셰익스피어 비극의 정수'로 통한다. 영국의 전설 '레어왕'이 바탕인 것으로 추정된다. 딸들에게 배신을 당한 리어왕이 광기에 휩싸여 황야에서 방황하며 진실과 대면하는 이야기다.
윤 연출은 '현대적인 리어왕'을 볼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셰익스피어의 원어는 현대적이다. 명확하고 단순하고 힘이 있는데 여러 번역본은 이것을 풀어놨더라. 맥이 빠지는 거지. 원어에 충실하면서 우리말로 옮기는 노력을 했다. (원래 현대적이니) 현대적으로 바꾸려고는 하지 않았다."
윤 연출은 자신이 번역까지 맡아 7차례 수정을 했다. '칼집 속의 아버지' 고연옥(44) 작가가 세차례 가량 윤색했다.
그는 셰익스피어의 핵심은 "대사 원문에 있지 않나 생각"했다. "무대 위에서 볼 때 대사의 조형성이 굉장히 중요하다. 저도 번역하면서 놀랐는데 '리어왕'은 굉장히 센 작품이다. 인물들이 도전적이고 폭력적이다. 배우들에게 이런 점을 강조한다. 인물의 호전적, 공격적인 템포를 밀어붙이고 있다. 리어왕이 가지고 있는 힘이 물리적인 것으로 넘어가지 않고 연극적인 폭력으로 넘어갈 수 있도록 주안점을 뒀다."
내용적인 측면에서도 원전이 현대적이라고 했다. "영웅적인 죽음 대신 생물학적인 죽음이다. 2차 세계 대전 이후 (인류가 생물학적인) 고통을 겪었는데 그런 의미에서 현대적이다." 배경은 "과거와 현대가 중첩된 시대"로 생각했다.
장두이 배우·윤광진 연출, 연극 '리어왕'(사진=명동예술극장)
장두이는 비극 '리어왕'을 "트래직(tragic) 코미디", 즉 비극적 희극이라는 신선한 해석을 가했다. "리어가 사막에 가 미쳤는데 선명하다. 그것이 마음에 들더라. '취중언골'이라고 할까. 세태를 시니컬하면서도 역설적으로 반영한다. 코믹하고 통쾌하더라. 연습하는 내내 뉴욕의 길거리가 생각이 났다. 그곳에는 거지와 미친 사람이 많다. 작품에 분산되는 에너지가 있는데 이런 것들이 얼마나 조화롭게 극장 안에서 표출이 되는지가 핵심이다." 그는 이번이 세번째 '리어왕' 출연이다. 앞서 광대와 글로스터 백작의 사생아인 에드먼드를 연기했다.
'살아있는 이중생 각하' '못생긴 남자' '황금용' 등으로 호평 받은 윤 연출이 셰익스피어 작품을 연출하는 건 이번 '리어왕'이 처음이다. "'리어왕'은 현대와 소통할 수 있는 극이다. 그런 부분이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물론 맡고 나서 (연출이 힘들어) 후회도 했다.(웃음) 하지만 연극적으로 성숙하게 하고 더 많은 것을 보게 하는 계기가 됐다."
어느 연극보다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작품이기도 하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 충분히 극장 안에서 드러날 것이라 믿는다. 예를 들면 세대 간 갈등, 노인의 문제 등이 그렇다. 우리 시대가 안고 있는 문제가 총체적으로 드러난다. 관객들이 다양한 초점을 맞춰 생각할 수 있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 한다."
내용에서 장소는 변하지만 빈 무대에 그것을 담은 것 역시 '연극적인 연극'의 성격을 짙게 한다. "특정 공간을 암시하는 소품이 전혀 사용되지 않는다."
무대는 이태섭(60·용인대 연극과 교수) 무대미술가가 참여해 제작했다. 폭이 약 8m의 경사진 메인 무대가 있고 그 주변을 상하 이동이 가능한 곁가지 무대가 따른다. "곁무대는 기계 장치로 들어올려지고 내려진다. 흔들리고 아래로 떨어지기도 한다. 인물들이 유랑하는 것을 충분히 담아낼 수 있다고 본다."
윤 연출은 무엇보다 '연극적인 연극'이라고 강조했다. "인물들이 폭력을 저지르는 것을 보자. 사실주의 극을 보면, 폭력에 이르는 심리적인 단계를 보여준다. 근데 '리어왕'에서는 느닷없이 폭력이 가해진다. 인물의 내면적인 심리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 등장인물들이 우리 이웃의 인물이기보다 하나의 성질인 것이다. 사실주의 연극과 인물에 대한 개념이 다른 거다. 또 딸들에게 자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이야기해보라고 말한 뒤 막내딸이 그를 거부하자 바로 내친다. 연극적인 이야기 속에서만 가능한 이야기들이다."
연극 '리어왕'(사진=명동예술극장)
아울러 셰익스피어가 가장 잘 쓰는 드라마투르기(극작술)가 극중극인데 "'리어왕'은 극중극의 극"이라면서 "단순히 2층 깊이로 파고들어가는 게 아니라 지하 3층을 팠다"고 비유했다. "새로운 물이 계속 나오는 우물처럼 특별한 해석을 계속하게 되는 굉장히 연극적인 연극"이라는 것이다. "빈 무대를 연기로 채워야 하는 것이 부담이지만, 연극주의의 마지막 관문이지 않나 싶다."
학생들에게 연기를 가르치고 있는 그는 한국에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하기 위한 트레이닝이 없다는 점"을 아쉬워했다. 그래서 자신을 포함해 총 16명이 나오는 '리어왕'이 "배우들의 기량을 향상시키고 교육하는 측면도 크다"고 긍정했다.
"이런 고전 작품이 점점 무대에 올라가지 못하고 그나마 (올라가도 규모가)축소되는 상황이다. 이번 '리어왕'은 요약하지 않고 원전 그대로 올라가 고맙다."
명동예술극장 '2015 세계고전 시리즈'의 첫 작품이다. 4월16일부터 5월10일까지. 조영진, 서주희, 이영숙. 조명디자인 김창기. 러닝타임 170분(인터미션 15분). 2만~5만원. 명동예술극장. 1644-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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