③5·18 역사왜곡 북한군 '광수'…"가짜뉴스와 싸운다"
시민군 출신 양기남·곽희성씨 당시 증언
과거엔 폭도, 최근엔 광수…거짓과 싸움
내면의 39년 상흔도…"증언에 나서주길"
"제일 바라는 것은 진상규명…희망이죠"
【서울=뉴시스】 극우논객 지만원씨가 온라인에 게시한 광주 시민군 출신 양기남씨(왼쪽)와 최룡해 북한 최고인민위원회의 상임위원장 얼굴 비교 게시물. 사진은 양씨가 촬영했다. (사진 = 양기남씨 제공)
지난 13일 오후 시민군 출신 양기남(58·양동남)씨와 곽희성(59)씨는 서울 영등포구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그들은 "어떻게든 우리 일을 더 알려야 하지 않겠나"라며 말문을 했다.
◇아직 끝나지 않은 싸움…가짜뉴스
양씨와 곽씨는 5·18 관련 여러 '가짜 뉴스'에 대해 분개했다. 특히 이른바 보수논객 지만원씨가 주장하는, '광수(광주에 내려온 북한특수군)'로 언급되는 북한군 개입설에 대해선 분노를 감추지 못했다. 양씨와 곽씨는 각각 광수 36번, 184번으로 지목됐다.
"주먹구구식으로 모든 사람 지목해서 광수라고 해놓고, 3~4살 먹은 애도 광수예요. 뭐 공작조? 그런데 그걸 믿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는 것. 그게 문제예요."(양기남·이하 양)
이들은 1980년 5월 이후 39년이 지난 지금까지 가짜뉴스와 싸워오고 있다. 광주시민들은 5·18 이후에는 신군부에 의해 '폭도'로 불렸고, 지금은 '광수'로 지칭되고 있는 것이다.
'광수' 문제는 극우논객 지만원(77)씨가 명명한 5·18 북한군 개입설에서 시작된다. 광주 시민군의 얼굴 윤곽을 연결하면서 1980년 5월 광주에 북한군이 있었고, 5·18은 북한이 일으킨 폭동이라는 게 지씨 주장의 주된 내용이다.
"80년대 후반에 5·18 사진전 전국투어를 한 3번인가 했는데 책이나 비디오테이프를 들고 곳곳을 다녔어. 그런데 6·25때 사진 갖고 왔다면서 야유도 여러 번 들었지. 말다툼도 많이 했고. 5·18에 대해서 잘 모르시는 분들이 여전히 많은 것 같아. 관심 없는 분들도 많은 것 같고. 더군다나 가짜뉴스에 속는 사람도 많은 것 같아 속이 상해요."(양)
【서울=뉴시스】조수정 기자 = 5.18 민주화운동 당시 시민군으로 참여한 양기남씨가 지난 13일 서울 여의도 한 카페에서 뉴시스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양기남 씨는 1980년 5월, 가톨릭센터 앞에서 리어카에 실려 있는 시신을 보고 시위에 참여했다. 화순경찰서 무기고에서 총을 가져와 시민들에게 나눠주고 기동타격대로 마지막까지 전남도청을 사수하다 27일 새벽 계엄군에게 체포돼 상무대 영창으로 끌려갔다. 모진 고문으로 심한 상처를 입고 국군통합병원으로 후송돼 70여 일간 입원 치료를 받았으며 광주교도소에 수감됐다. 2019.05.15. [email protected]
"5·18 같은 경우에는 7등급까지 있는 다른 국가유공자와는 달리 17등급까지 나뉘어 있어. 나는 이렇게 잘게 나눈 것이 혜택을 축소시키려고 했던 것이라고 봐. 보상 같은 경우는 노동자에 준해서 55세까지만 계산해서 줬었어. 비교를 하자는 것이 아니라 국민들이 모른다 이거지. 연금처럼 받으면서 편히 사는 줄 알아. 그런 부분이 굉장히 안타깝고 그렇지."(곽희성·이하 곽)
"유공자 만든 것은 김영삼 정부고, 5·18 기록이 유네스코 문화유산 등록될 땐 이명박 정부였어요. 그런데 가짜라고 하고, 세금 잡아먹는 괴물집단이라고 하니 기가 막히죠."(양)
◇"진상 규명은 희망"
이들은 1980년 5월부터 그 날의 참상을 부정하는 목소리는 물론 자신 내면의 상흔과도 싸워오고 있다. 이는 비단 이들 두 사람만이 아닌 그날의 기억을 가진 시민 모두가 겪고 있는 싸움이다.
"39년이 지났어도 잊혀지지 않는 거지. 시신을 실제 보고 그러면…평온히 돌아간 게 아니잖아. 유가족들 오열하고 시신을 찾으려고 수많은 사람들이 오가고, 계속 다친 사람, 죽은 사람들은 몰려오고 그랬지."(곽)
"잊으려고 여러 가지 방법을 찾아봤어. 약도 먹어보고 산을 다니거나 술을 담아도 보고. 아직도 3~4월정도 되면 몸이 먼저 인식을 해요, 5·18을. 생각을 먼저 하는 게 아니라 아프고, 불안하고 그렇게 몸이 먼저 인식을 하는 거죠."(양)
【서울=뉴시스】조수정 기자 = 5.18 민주화운동 당시 휴학생 신분으로 시민군에 참여한 곽희성씨가 지난 13일 서울 여의도 한 카페에서 뉴시스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1980년 5월 광장에서 머리에 총을 맞고 쓰러진 고등학생을 후송하던 때를 잊지 못한다. 살려내지 못했다는 자책감과 수많은 희생자들 사이에 자신은 살아남았다는 죄책감이 30년 넘게 그를 괴롭혔다. 이젠 마음의 짐을 조금씩 덜어내며 5.18 민주화 운동 유공자라는 자부심을 회복했다. 2019.05.15. [email protected]
"본인이 고문 받은 장소 지하에 내려가면서 갑자기 흥분하고 목소리가 커지는 분도 있었어. 본인만 느꼈던 트라우마가 엄청났던 거지. 나는 아직 묘지를 못올라가봤어. 멀리서만 지켜보고. 그걸 이겨내려고 많이 시도했지."(곽)
"관련자들은 트라우마가 심해요. 스스로 안타까운 선택을 하는 경우도 많고. 제대로 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들은 그렇게 많지 않을 거예요. 나도 도청에서 살아나왔다는 것이…그래서 전 어떻게든 더 알리고 싶은 거죠."(양)
이들은 5·18의 진상규명을 바란다고 했다. 그간 5·18에 대한 역사적, 법적 평가는 여러 차례 이뤄져 왔다. 하지만 여전히 5·18의 실상은 많은 부분이 감춰져 있다고 보는 시선이 많다.
"우리가 제일 바라는 것은 진상규명이에요. 진상규명을 위해 초석이 될 수 있는 분들이 많이 나와 주셨으면 좋겠어요. 쉽지는 않을 거예요. 저희 희망이죠, 희망. 저희에겐 아직 5·18은 진행 중인 거죠."(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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