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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양전쟁 韓전범 마지막 생존자 "동료 원통 풀어달라" 보상 촉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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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2020-08-14 10:39:38
일제에 징집돼 태국 수용소에서 포로감시원으로 일해
전후 군사재판에서 포로학대 등으로 전범 사형선고 받아
"내가 살아남은 이유는 보상 문제와 싸우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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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태평양전쟁 한국인 B·C급 전범 가운데 마지막 생존자로 남은 이학래(95) 동진회(同進会) 회장. 사진은 NHK플러스 갈무리. 2020.08.14.
[서울=뉴시스] 김예진 기자 = 태평양전쟁 한국인 B·C급 전범 가운데 마지막 생존자로 남은 이학래(95) 동진회(同進会) 회장은 "동료들의 원한을 풀고싶다"며 일본 정부의 보상을 거듭 촉구하고 나섰다.

이 회장은 도쿄(東京)도의 자택에서 14일자 도쿄신문과 가진 인터뷰에서 "동료가 모두 죽어버렸다. 가장 젊은 나만 남아버렸다"고 말했다.

이 회장은 "내가 사형에서 살아남은 것은 이 문제와 싸우기 위해서라고 생각한다"며 "일본의 여러분의 힘을 빌려 어떻게든 해결하겠다"고 강조했다.

전라남도 출신인 그는 17세였던 1942년 일제에 징집된 후 포로 감시원으로서 태국 수용소 등에서 일했다. 2차대전 후 군사재판에서 포로 학대 등으로 B·C급 전범으로 사형을 선고받았다가 감형됐다. 한국인 출신 전범 148명이 유죄 판결을 받았으며 23명이 사형됐다.

이 회장은 도쿄 스가모(巣鴨)형무소에서 형을 살았다. 이후 1955년 한반도 출신 전범 약 70명과 동진회를 결성했다.

그는 귀국도 생각했으나 대일 협력자, 친일파 등 비난을 받고 가족에게 영향을 끼칠까봐 돌아오지 못했다.

이 회장은 1952년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 발효로 일본 국적을 잃었다. 식민지 출신자였기 때문이다. 일본인 전 군인, 군대 소속자 등 전범에게는 정부가 연금 등 보상을 했다.

그러나 한국인 점범자들은 대상에서 제외되면서 보상을 받지 못했다. 일본 정부는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으로 “해결됐다”는 입장을 보였다.

이 회장은 1991년 "왜 일본인과 대우가 다르냐"며 일본 정부에 보상을 요구하는 소송을 제기했다. 소송은 최고재판소(대법원)까지 갔으나 기각됐다. 다만, 판결(1998년 도쿄고등법원)에서 "적절한 입법조치가 취해지는 것이 바람직한 점은 분명하다"고 명기됐다.

일본 국회에서 입법 움직임도 있었다. 2008년 야당 민주당은 전범 1인당 300만엔 지급 혜택을 골자로 하는 국제법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그러나 여당과 합의하지 못해 다음 해 폐안됐다.

2016년에는 여당도 포함한 일한의원연맹이 급부액 260만엔으로 법안을 마련했으나 아직 국회에 제출되지 못했다,

제출되지 못하는 큰 원인은 ‘반대 의원’이다. 신문에 따르면 일한의원연맹 간사장인 자민당 가와무라 다케오(河村建夫) 전 관방장관은 "빨리 성립시킬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면서도 "이 문제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는 의원도 있다"고 시인했다.

신문은 이 회장에게 남겨진 시간이 많지 않다며, 고령인 그가 외출을 위해서 휠체어를 이용해야 하며 몸 상태가 나빠지는 경우도 늘었다고 전했다.


◎공감언론 뉴시스 aci27@news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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