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페이스북
  • 트위터
  • 유튜브

[인터뷰]황병주 잠수사, 그날을 말하다[세월호10년⑥]

등록 2024.04.11 06:00:00수정 2024.04.11 06:48:13

  • 이메일 보내기
  • 프린터
  • PDF

민간잠수사로 참사 초기부터 수색

국가 없던 자리 채우며 293명 건져

신장악화·트라우마·골괴사 투병 중

시민·유족·동료들 연대로 건져낸 삶

[서울=뉴시스] 김근수 기자 = 세월호 참사 당시 잠수사로 활동한 황병주(65)씨가 지난 3일 서울 강서구의 한 사무실에서 뉴시스와 인터뷰를 마치고 기념촬영하고 있다. 2024.04.11. ks@newsis.com

[서울=뉴시스] 김근수 기자 = 세월호 참사 당시 잠수사로 활동한 황병주(65)씨가 지난 3일 서울 강서구의 한 사무실에서 뉴시스와 인터뷰를 마치고 기념촬영하고 있다. 2024.04.11. [email protected]


[서울=뉴시스]임철휘 이소헌 수습 기자 = 1.8㎜ 굵기의 바늘이 황병주(65)씨의 팔뚝을 찌르자 그의 얼굴이 고통에 일그러졌다. 바늘이 투석 혈관에 자리 잡는 10여초 동안 미간에는 깊게 주름이 팼고, 질끈 감았다 뜬 두 눈엔 눈물이 맺혔다.

황병주씨는 세월호 참사 현장에서 희생자들 수색에 초기부터 참여했던 잠수사 중 한 명이다. 2014년 4월20일부터 수색에 참여해 6시간마다 돌아오는 물때에 맞춰 적게는 하루에 한 번 많게는 하루에 네 번까지도 맹골수도에 들어가 시신을 수습했다.

이후 신장이 급격히 망가졌다. 80대는 돼야 투석을 받을 거란 진단이 나올 정도로 강골이던 황병주씨의 신체시계는 25년 앞당겨졌다. 참사 이듬해부터 시작한 혈액 투석은 이제 일상이다. 10년간 이틀에 한 번 하루 4시간씩 온몸의 찌꺼기를 투석 기계로 걸러내 왔으며, 앞으로도 그래야 한다.

세월호 10주기를 앞둔 지난 3일 뉴시스는 투석 치료를 받는 서울 강서구의 한 병원 인근에서 황 씨를 만났다. 10년 전 이맘때 물속에서 벌이던 사투는 이제 그의 몸으로 옮겨가 있었다.

물속서 만져진 학생들…국가 대신 293명 건진 잠수사들

[서울=뉴시스] 김근수 기자 = 세월호 참사 당시 잠수사로 활동한 황병주(65)씨가 지난 3일 서울 강서구의 한 병원에서 신장 투석을 받고 있다. 2024.04.11. ks@newsis.com

[서울=뉴시스] 김근수 기자 = 세월호 참사 당시 잠수사로 활동한 황병주(65)씨가 지난 3일 서울 강서구의 한 병원에서 신장 투석을 받고 있다. 2024.04.11. [email protected]


2014년 4월20일 오후 4시께.

시신을 수습하러 모인 잠수사 중 첫 탕(그날의 첫 번째 잠수)을 뛴 것은 황씨였다. 시신 수습을 한 번도 안 해봤다는 후배의 걱정에 "내가 옛날에 해봤는데 아무것도 아니더라"라고 말했지만, 그 역시 걱정이 앞서긴 마찬가지였다. 그는 "늘 해왔던 잠수 한다고, 좋은 일 한다고 생각하자"고 후배를 다독인 뒤 가장 먼저 물속에 뛰어들었다.

남해 특유의 뿌연 흙탕물은 시계를 1m 이상 허용하지 않았다. 하강줄을 따라 30여m를 내려가니 세월호 선체가 손에 잡혔다. 세월호 선내에 진입하기 위해 세월호 우현 객실로 통하는 유리창을 깨뜨렸다.

선체에 진입해 손을 휘두르니 곧 뭔가가 만져졌다. 두껍게 코팅된 장갑을 끼고 있었지만 단원고 학생들의 머리라는 걸 직감했다. 황씨는 "조그만 방이었다. 손을 휘저으니 순간 머리 셋이 잡혔다. 감정 컨트롤이 안 돼서 욕을 내뱉으며 비명을 질렀다. 다른 기억은 나지 않는다. (동료는) 내가 (밖에 나와서) 오열했다고 한다. 감정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황씨와 잠수사들은 연거푸 잠수했다. 안전한 잠수를 위해서 지켜야 하는 지침들은 물론 지켜지지 않았다. 수심 40m 이상을 잠수한 뒤에는 충분한 감압 시간을 가져야 잠수병을 예방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혈관에 녹아있던 질소가 수압이 떨어지면서 팽창해 쌓인다. 그의 어깨가 저려온 데에는 채 엿새가 걸리지 않았다.

황씨를 비롯한 민간 잠수사들은 심해 잠수 능력이 없어 갈팡질팡하던 해경을 대신해 현장에서 구조 체계를 만들어 나갔다. 작업 인원 관리부터 구체적인 작업 내용·방법까지 잠수사들의 손을 거치지 않고는 작업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원래는 해경이 할 일이었다. 그는 "해경이 엄두를 못 내서 우리가 해경을 끌어왔다. 민간 잠수사들이 주 다이버고 해경이 세컨 다이버를 했다"며 "아무것도 못 하면 비판을 받아야 하는 해경 입장에선 잠수사들이 고마운 존재였다"고 했다.

하지만 맹골수도는 녹록지 않았다. 수색 작업이 길어지면서 부상자들이 나왔다. 동료 후배인 고(故) 김관홍 잠수사가 감압 과정에서 실신했고, 전광근 잠수사는 급상승 과정에서 잠수병으로 쓰러졌다. 조준 잠수사는 수중에서 호흡이 막혀 죽을 고비를 넘겼고, 김상우 잠수사는 객실이 무너지면서 다쳤다.

작업 방식 변경 등 명목으로 해경의 퇴거 명령이 있었던 2014년 7월10일까지 황씨를 비롯한 민간 잠수사 25명은 80여일간 모두 293명의 희생자를 수습했다.

"형님 죽을 거 같아요" 엄습한 트라우마에 떠나간 동료

[서울=뉴시스] 김근수 기자 = 세월호 참사 당시 잠수사로 활동한 황병주(65)씨가 지난 3일 서울 강서구의 한 사무실에서 뉴시스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2024.04.11. ks@newsis.com

[서울=뉴시스] 김근수 기자 = 세월호 참사 당시 잠수사로 활동한 황병주(65)씨가 지난 3일 서울 강서구의 한 사무실에서 뉴시스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2024.04.11. [email protected]

잠수 이후 황씨는 우울증과 불면증, 극심한 트라우마(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에 시달렸다.

특히 숨진 학생들을 만질 때의 촉감, 시신을 건져 올릴 때의 장면이 떠오를 때면 운전을 하다가도, 치료를 받다가도 눈물이 차올랐다. 황씨는 "매일 아침 일어나면 '오늘은 어떻게 살아야 하지'라는 생각부터 들었다. 나무를 보면 (죽기 위해) '저 나무를 택해야 하나, 이 나무를 택해야 하나'를 매일 고민했다"고 했다.

황씨뿐 아니라 시신 수습에 나섰던 다른 잠수사들도 극심한 트라우마로 인한 자살 충동을 느꼈다. 2019년 10월에는 정신적 트라우마와 생활고에 시달리던 고 김관홍 잠수사가 마흔셋의 일기로 경기 고양시 용두동의 한 비닐하우스 집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술을 마시면 맏형 격인 황씨에게 자주 전화했다는 고인이었다.

황씨는 "관홍이가 술에 취해 전화하곤 했다. '형님 나 정말로 죽을 것 같은데 어떻게 합니까' '죽고 싶습니다' 그러면 내가 '무슨 소리 하는 거냐'며 욕을 했다. 근데 그게 후회된다. 그때 보듬어주고 좀 알아줬어야 했다. 나도 너무 힘들었다 보니 그럴 정신이 없었다"고 했다.

"유가족이 가만히 있지 말라 해" 연대가 만든 '김관홍법'

[서울=뉴시스] 김근수 기자 = 세월호 참사 당시 잠수사로 활동한 황병주(65)씨가 지난 3일 서울 강서구의 한 병원에서 신장 투석을 받기 위해 대기하고 있다. 2024.04.11. ks@newsis.com

[서울=뉴시스] 김근수 기자 = 세월호 참사 당시 잠수사로 활동한 황병주(65)씨가 지난 3일 서울 강서구의 한 병원에서 신장 투석을 받기 위해 대기하고 있다. 2024.04.11. [email protected]


생사의 경계에서 허우적대던 황씨를 삶으로 건져낸 건 유족과 동료 잠수사들, 그리고 이들과 연대한 시민들이었다.

황씨는 "유가족들을 만났는데 유가족들이 가만히 있지 말고 소리를 내야 한다고 했다"며 "오지원 세월호 특별조사위원회 피해자지원점검과장은 나보고 치료를 좀 받아야 될 것 같다고 했다"고 전했다.

이어 "정신의학과 전문의 정혜신 박사를 만나서 동료 잠수사 6명과 치료를 받기 시작했다. 잠수사들이 모여서 힘들었던 점을 함께 얘기했다. 다른 국가폭력 피해자에 대한 얘기도 들었다. 조금씩 나아졌다"고 했다.

정치와 자신은 무관하다고 생각했던 황씨였지만 받았던 도움을 나눠야 한다는 생각에 '활동'을 시작했다. 국회에서, 거리에서 수없이 자신의 피해를 증언했다. 그 결과 2020년 5월20일 '김관홍법'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그 덕에 구조·수습활동으로 죽거나 다친 민간 잠수사들에 대한 피해 보상이 가능해졌다.

그러나 정작 잠수사들에게 가장 치명적인 골괴사(뼈에 혈액이 공급되지 못해 뼈조직이 괴사하는 잠수병)는 지원에서 제외됐다. 법원도 골괴사와 수중 구호의 인과성을 인정할 수 없다며 이들의 소송을 기각했다.

포기하지 않고 바다로…"마음은 싫어도 몸은 가 있을 것"

[서울=뉴시스] 김근수 기자 = 세월호 참사 당시 잠수사로 활동한 황병주(65)씨가 지난 3일 서울 강서구의 한 사무실에서 뉴시스와 인터뷰를 마치고 기념촬영하고 있다. 2024.04.11. ks@newsis.com

[서울=뉴시스] 김근수 기자 = 세월호 참사 당시 잠수사로 활동한 황병주(65)씨가 지난 3일 서울 강서구의 한 사무실에서 뉴시스와 인터뷰를 마치고 기념촬영하고 있다. 2024.04.11. [email protected]


이제 황씨는 친구가 운영하는 토목 회사에서 관리직으로 일한다. 이틀에 한 번은 투석으로 자리를 비워야 하는 그를 친구는 이해했고, 그 덕에 씩씩하게 다시금 삶을 일구고 있다. 30여년간 해왔던 산업 잠수사 일을 더 못하는 건 슬프지만, 피폐했던 삶이 제 궤도를 찾은 데에 감사하며 살고 있다.

그토록 좋아했던 바다도 포기하지 않았다. 차디찬 4월 바다를 지나 따뜻한 7월이 되면 경남 통영의 매물도에 방문해 스쿠버다이빙을 한다.

용기의 대가로 잠수병과 트라우마, 생활고에 시달려야 했던 그는 '다시 돌아가도 같은 선택을 할 것이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한다.

"그 이후로 제 삶이 정신적으로든, 육체적으로든, 경제적으로든 모든 게 나빠졌어요. 가기 싫죠. 그런데 우리가 아니면 못 할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심적으론 가기 싫지만, 몸은 가 있을 것 같아요."


◎공감언론 뉴시스 [email protected], [email protected]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