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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승전복지]지극히 평범한 '김혜자들' 삶도 '눈이 부시게' 하려면

등록 2020.01.18 08:00:00수정 2020.01.18 08:0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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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TBC 드라마 '눈이 부시게' 주인공 '김혜자'

스물다섯에서 하루아침에 70대 노인 되다

타임슬립 드라마가 전하는 치매노인 현실

전국 256개 보건소서 상담부터 관리까지

[기승전복지]지극히 평범한 '김혜자들' 삶도 '눈이 부시게' 하려면


[세종=뉴시스] 임재희 기자 = "내 이름은 김혜자, 스물다섯살. 믿기지 않겠지만 나는 대한민국의 지극히 평범한 스물다섯 여자입니다."

스스로를 평범하다고 평가하는 사람은 둘 중 하나일지 모른다. 아직 자신만의 장점을 발견하지 못했거나 특별함을 일부러 숨겨야 하거나. 평범한 스물다섯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김혜자(한지민)는 후자다.

비밀은 가족들과 바다에 놀러갔던 날 모래사장에서 줍게 된 시계에 있다. 그 시계의 바늘을 돌리면 아침잠을 5분 더 잘 수도, 쪽지시험을 다시 볼 수도 있다. 혜자의 특별한 능력은 바로 시간을 되돌리는 일이다.

물론 세상에 거저 주어지는 건 없다. 시간을 돌리는 능력에도 대가가 따랐다. 시간을 돌린 만큼 남들보다 빨리 나이 들어 보이게 된다는 것.

'타임슬립'(time slip, 과거·현재·미래를 오고가는 시간여행)보다 노안이 싫었던 혜자는 특별한 비밀과 시계를 감춘 채 '지극히 평범한 스물다섯'으로 살아가기로 했다.

하지만 세상은 혜자의 특별함을 가만두지 않았다. 택시운전을 하는 아빠(안내상)가 브레이크 사고로 세상을 떠나게 됐다. 사랑하는 아빠를 그대로 보낼 수 없었던 혜자는 "어떻게든 구해야 되는 사람이면 몇억번을 시도해서라도 구할 것"이라는 생각으로 시곗바늘을 수도 없이 돌린다.

그리고 맞이한 아침. 차가운 수술실의 그림자가 걷히고 따스한 햇볕 아래 밥 내음 가득한 식탁엔 잃어버릴 줄만 알았던 아빠가 있다. 미용실을 하는 엄마(이정은)도, 백수나 다름없는 크리에이터 오빠 김영수(손호준)까지 대한민국의 지극히 평범한 4인가족은 그대로였다. 단 한명 혜자만 변했다.

◇스물다섯에서 일흔으로…50년 넘게 흘러버린 시간

스물다섯 혜자는 하루아침에 70대 할머니 김혜자(김혜자)가 됐다. 시계는 스물다섯 혜자로부터 50여년 이상 시간을 가져갔다. 신체나이는 65세, 간 나이는 55세로 보기보다 건강하시다는 의사 선생의 말도 혜자에겐 전혀 위로가 못 된다.

갑작스러운 나이 듦은 낯선 일들 투성이다. 새벽 3시 잠에서 깨는가 하면 어제 가뿐히 걸었던 거리가 오늘은 숨이 가쁘다. 마음은 스물다섯에 머물러 있는데 육체가 따라주지 않는다.
 
"나도 내가 낯설어. 아침에 거울 볼 때마다 깜짝깜짝 놀라. 근데 받아들이기로 했어. 나한테 소중한 걸 되찾게 해 준 겪어야 하는 일이었으니까 그럴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해."
 
스물다섯 혜자가 70대 혜자에 익숙해지기까지 쉬운 일은 하나도 없었다. 그런데도 혜자는 더 소중한 아빠와 그런 아빠가 있는 가족이 자신 곁에 있음에 감사하고 평범했던 하루하루를 흘려보내는 대신 남은 하루하루를 특별하게 살아가기로 한 것이다.

100m 달리기는 꿈도 못꾸던 혜자는 노인들의 보험금을 타내려는 '효자홍보관' 대표(김희원) 무리에 맞선다. 홍보관 친구들과 '노벤져스'를 꾸려 지하실에 갇힌 노인들을 구해내고 마침내 특별함을 증명한다.

하지만 거기까지. 씩씩하던 혜자의 눈빛이 갑작스럽게 흔들리기 시작한다. 용감했던 '노벤져스' 동료들도 하나둘 사라져간다. 그리고 저 멀리 50년과 맞바꿔 지켜낸 아빠와 사랑스런 엄마가 달려온다.

"엄마!"
[서울=뉴시스]JTBC 월화드라마 '눈이 부시게' 제3회

[서울=뉴시스]JTBC 월화드라마 '눈이 부시게' 제3회

◇행복했던 꿈에서 깨어난 혜자 앞에 다가온 현실

"긴 꿈을 꾼 것 같습니다. 그런데 모르겠습니다. 젊은 내가 늙은 꿈을 꾸는 건지, 늙은 내가 젊은 꿈을 꾸는 건지. 저는 알츠하이머를 앓고 있습니다."

지난해 방영된 JTBC 드라마 '눈이 부시게'는 판타지로 시작해 로맨스와 가족극, 범죄 스릴러물을 거쳐 종영을 2회 남기고 시간여행이 사실은 치매로 인한 섬망이었다는 반전을 선사한다.

1회부터 나온 모든 이야기는 치매라는 설정 아래 다시 짜맞춰진다. 하루아침에 늙어버린 스물다섯 혜자에게 부담이 될 만큼 많은 약이 필요했던 것도, 나이 든 딸이 씩씩하게 잘 살아가는데도 주위 가족들이 하나둘 지쳐갔던 것도, 머리가 흰 중년 남성과 여성을 보고 '아빠', '엄마'라고 불렀던 일까지 이해가 된다.

무엇보다 스물다섯에서 일흔이 된 혜자가 치매라는 사실을 듣자마자 떠오른 건 드라마 도입부에서 혜자의 자기소개다.
 
"믿기지 않겠지만 나는 대한민국의 지극히 평범한 여자입니다."
 
보건복지부 산하 중앙치매센터가 발간한 '대한민국 치매현황 2018' 보고서에 따르면 2017년 65세 이상 노인 인구 중 치매환자는 70만5473명이다. 전체 노인 인구(706만6201명) 10명 중 1명은 치매를 앓고 있다.

실제 치매를 겪은 사람도 이와 비슷하다. 국민건강보험 치매 상병코드를 기준으로 2017년 의료기관에서 치매로 진료를 받은 환자는 73만1779명이었으며 이 가운데 65세 이상은 66만1048명이었다.
 
이에 문재인 정부는 2017년 9월18일 치매국가책임제를 선언하고 현실 속 김혜자의 아빠와 엄마가 되겠다 자처했다.

그해 12월 경남 합천에서 처음 문을 연 치매안심센터는 지난해 12월20일 강릉시를 끝으로 전국 256곳 모두 정식 개소했다. 상담, 검진, 등록관리 등 필수업무부터 치매쉼터, 가족카페, 가족교실 등 서비스를 전국에서 제공하게 됐다.
 
치매안심센터에서는 상담, 치매선별·진단검사 실시, 인지지원프로그램 운영, 쉼터, 치매안심마을 조성, 치매공공후견 사업, 치매노인 지문 사전등록 등 치매환자 및 가족 맞춤형 서비스를 제공한다.

지난해 11월말 기준 전체 치매환자 79만명 중 57.6%인 45만5000여명이 치매안심센터에 등록해 관리를 받고 있으며 심층상담 383만건, 선별검사 425만건, 진단검사 33만건, 사례관리 7만4000건 등이 이미 진행됐다.
 
올해부터는 경증치매 환자들을 위해 치매안심센터 쉼터 이용시간을 종전 1일 3시간에서 최대 7시간으로 확대하고 이용 기한도 지금처럼 최대 6개월로 제한하지 않고 지방자치단체 재량에 맡기기로 했다.
 
◇가까운 보건소에서 상담부터 다양한 프로그램까지

드라마 속 '효자홍보관'처럼 대표가 노인들을 승합차로 태우러 오고 자식들이 출근길 들러 맡기고 가듯 치매안심센터도 문턱을 낮추는 데 방점을 뒀다.

치매안심센터가 있는 256곳은 모두 시·군·구 보건소들이다. 가까운 보건소를 한 번 방문하면 치매 여부 검사부터 관련 프로그램까지 모두 안내받을 수 있다. 주민등록기준 보건소에 치매환자로 등록하고 선정기준(기준 중위소득 120% 이하)을 만족하면 치매치료관리비 보험급여분 중 본인부담금을 월 3만원씩 연간 최대 36만원까지 지원받을 수도 있다.

정부는 보건소로부터 멀리 떨어져 사는 노인도 치매안심센터를 가족 도움 없이 방문할 수 있도록 설치비로 업무수행 차량을 구입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나아가 가족의 돌봄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종일방문요양서비스 이용 대상과 제공기관을 늘리고 드라마 속 '노벤저스'처럼 노인들에게 힘이 될 치매 동반자(파트너즈) 89만명을 양성하고 있다. 정신적 제약으로 통장관리, 의료행위에 대한 동의 등 의사결정에 어려움을 겪는 치매노인의 의사결정권을 보호하기 위한 공공후견제도 또한 시행 중이다.

자세한 사항은 보건복지상담센터(129, http://www.129.go.kr), 치매상담콜센터(1899-9988, http://www.nid.or.kr)으로도 문의할 수 있다.
[서울=뉴시스]JTBC 월화극 '눈이 부시게' 제12회

[서울=뉴시스]JTBC 월화극 '눈이 부시게' 제12회

◇노인 10명 중 1명의 오늘 하루도 '눈이 부시게'

이 드라마로 배우 김혜자씨는 '2019 백상예술대상' 시상식 TV 부문 대상을 받고 나서 수상 소감을 대사로 대신했다.

"새벽에 쨍한 차가운 공기, 꽃이 피기 전 부는 달큰한 바람, 해 질 무렵 우러나오는 노을의 냄새, 어느 한 가지 눈부시지 않은 날이 없었습니다. 지금 삶이 힘든 당신, 이 세상에 태어난 이상 당신은 이 모든 걸 매일 누릴 자격이 있습니다. 후회만 가득한 과거와 불안하기만 한 미래 때문에 지금을 망치지 마세요. 오늘을 살아가세요. 눈이 부시게."
 
드라마 끝자락에 이르러서야 드러난 '치매'라는 반전을 기억한 채 다시 드라마를 1화부터 되돌려 봤다.

하루하루가 낯설다는 혜자에게 엄마는 "다시 아기 때로 돌아가는 거지. 일어서는 것 하나까지 누구 도움받아야 되는. 그냥 그렇게 생각하면 단순해져. 다시 돌아가는구나, 이제 누군가 도움 없이는 살 수 없구나"라고 말한다.

기자 지망생이었다가 '효자요양원'에서 일하게 된 이준하(남주혁)는 휴지 한 상자 받는 것도 미안해 하는 노인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효도하는데 손해가 어디 있어요. 손해 따져가면서 효도하면 안 되죠. 저희가 어렵고 말지 이것(홍보관 판매 의약품) 갚으시려면 어르신들이 어렵잖아요. 대접받으실 만하니까 대접받으시는 겁니다."

기억을 잃어버린 채 누군가의 짐으로, 아픔으로만 다뤄왔던 치매를 드라마 '눈이 부시게'는 행복한 하루하루를 누릴 자격이 있는 사람으로, 아기와 마찬가지로 도움이 필요한 사람으로, 대접받을 만한 사람으로 그렸다.

어떤 작품에서 타임슬립이란 소재는 누구나 한 번쯤 꿈꿔봤을 환상을 체험케 한다.

하지만 '눈이 부시게' 속 시간여행을 통해 우리는 스물다섯에서 하루아침에 일흔 넘은 노인이 된 혜자가 느꼈을 당혹감을 타임슬립 형태로 체험할 수 있었다. 노인 10명 중 1명이 겪고 있고 겪게 될 치매라는 현상을 아주 조금이나마 느끼는 사람들이 늘어난다면 이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 적어도 그렇지 못했던 날보다는 눈이 부시지 않을까.


◎공감언론 뉴시스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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