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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카모토 류이치 1주기…음악 건축물은 계속 지어지네

등록 2024.03.28 12:17: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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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희윤·정병욱·황선업 음악평론가 추모메시지

[서울=AP/뉴시스] 사카모토 류이치

[서울=AP/뉴시스] 사카모토 류이치

[서울=뉴시스]이재훈 기자 = 28일은 일본 거장 음악가 사카모토 류이치(1952~2023)의 1주기다.

사카모토의 음악은 물성을 갖춘 건축물이다. 고독함을 짓는 앰비언트 음악의 미학이다. 음악을 듣는 자신을 들여다보게 만든다. 고인이 세상을 떠났어도, 그가 음악으로 만든 집은 곳곳에 지어지고 리모델링된다.

1년간 국내에서 숱한 추모 행렬이 이어졌다. 자신의 솔로 앨범 '디-데이(D-DAY)'에 사카모토가 피아노 연주를 피처링한  글로벌 슈퍼 그룹 '방탄소년단'(BTS) 멤버 슈가(민윤기)는 자신의 솔로 월드투어에서 고인을 추모했다.

사카모토의 차녀인 일본 싱어송라이터 사카모토 미우는 지난해 말 첫 단독 내한공연에서 부친의 대표곡 '아쿠아'의 보컬 버전인 '인 아쿠아스케이프(in aquascape)'를 앙코르에서 불렀다. 이 미우의 콘서트엔 밴드 '새소년'의 프런트 퍼슨 황소윤이 스페셜 게스트로 등장해 '디 아더 사이드 오브 러브(The Other Side Of Love)'를 듀엣했다. 미우는 공연 후 자신의 소셜 미디어에 "황소윤과 노래를 하게 돼 너무 행복했다. '디 아더 사이드 오브 러브'를 부르면서 아버지께서 우리를 치유해주실 거 같은 묘한 느낌이 들었다"고 썼다. 미우와 황소윤의 인연은 사카모토 덕분이다. 그는 딸에게 한국에 멋진 밴드가 있다며 새소년 영상을 보여줬다고 한다.

극장가에서도 사카모토를 기억하는 행렬이 이어졌다. 사카모토가 음악을 맡은 영화 '괴물'(감독 고레에다 히로카즈)이 국내에서 흥행하면서 영화를 함부로 침범하지 않는 고인의 음악이 재조명됐다.
[서울=AP/뉴시스] 사카모토 류이치

[서울=AP/뉴시스] 사카모토 류이치

굽은 등, 마른 손, 초췌한 얼굴 등의 모습으로 103분간 20곡을 연주하는 사카모토의 숭고한 모습을 담은 '류이치 사카모토: 오퍼스'로 고인의 음악 세계가 다시 톺아봐졌다.

고인을 위한 추모 연주회는 계속 열리고 있다. 지난 24일 서울 롯데콘서트홀에서 '사카모토 류이치 트리뷰트 콘서트'가 펼쳐졌다. 일본에선 더욱 활발하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 피해 지역 출신 어린이들로 구성된 '도호쿠 유스 오케스트라'는 일본 전역을 돌면서 사카모토 추모 연주회를 열고 있다. 23일 이와테, 24일 미와기에서 공연했고 오는 30일 후쿠시마, 31일 도쿄 무대에 각각 오른다. 사카모토는 생전 이 오케스트라 감독을 맡아 매년 함께 연주회를 펼쳤다.

또 일본 음악 잡지 '사운드&레코딩 매거진' 5월호에선 '사카모토 류이치~창작의 옆모습~'을 주제로 그의 작품 제작에 참여한 21명의 증언을 담는다.

음악은 인간의 강함과 약함을 동시에 꿰뚫는다. 비극을 다룬 음악이 고와도 되는가. 죽음을 향해 가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음악이 아름다워도 되는가. 우리가 죽음에서 자유롭다고 믿는 순간 거기에 갇히게 되고, 그 죽음에 갇혔다고 믿는 순간 더 자유로워진다. 사카모토가 생을 마감하기 직전 보여준 작업들은 그 경지에 이른다. 예술은 길고, 인생은 짧다. 클리셰가 된 이 말은 사카모토를 만나 지극히 환기된다.
[서울=AP/뉴시스] 사카모토 류이치가 영화 '마지막 황제'(1986·감독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를 통해 아시아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받은 미국 아카데미 영화음악상 트로피를 1988년 4월 일본 도쿄에서 들어올리고 있다.

[서울=AP/뉴시스] 사카모토 류이치가 영화 '마지막 황제'(1986·감독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를 통해 아시아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받은 미국 아카데미 영화음악상 트로피를 1988년 4월 일본 도쿄에서 들어올리고 있다.

다음은 누구보다 사카모토를 애정하는 임희윤·정병욱·황선업 세 음악평론가에게 부탁한 1주기 추모 메시지다. 사카모토 그리고 그의 음악이 재조명되는 이유도 함께 물었다.

임희윤 음악평론가

오랜 세월 동안 음악 활동을 한 사카모토 류이치가 요즘 젊은 세대에게 재조명된 배경을 살펴보려면 몇 개의 키워드가 필요할 듯합니다.
[서울=AP/뉴시스] 사카모토 류이치

[서울=AP/뉴시스] 사카모토 류이치

▲2010년대 이후 포스트미니멀리즘(post-minimalism) 장르의 인기

초월적 몰입이 필요한 클래식 음악 감상보다는, 바이브에 몰입하거나 아름다운 배경음악으로 틀어둘 만한 음악에 대한 수요 증가입니다. 근년에 유튜브를 중심으로 BGM용 플레이리스트가 인기를 끌었죠. 고전, 낭만, 현대의 클래식 음악은 피아니시모부터 포르티시모까지 음량의 차이가 한 곡 안에서 매우 큽니다. 비트도 거의 없고 템포로 자유롭죠. 클래식 학도가 아닌 이상 엄청난 집중력이 아니면 그 감동을 고스란히 느끼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포스트미니멀리즘은 팝처럼 다이내믹과 템포가 일정하면서도 고전 클래식의 2악장 안단테처럼 서정성이 극대화돼 있으며 이해하기 쉽게 반복적입니다. 프리페어드 피아노나 앰비언스 녹음을 활용해 근년의 ASMR 트렌드와도 맞닿아 있습니다. 2000년대 초반까지 힐링 뮤직으로 뉴에이지 연주곡들이 인기를 끌었지만 이후 뉴에이지는 엘리베이터나 로비 뮤직으로 폄하되면서 조명이 거의 사라졌죠. 뉴에이지가 사라진 영역을 삼켜버린 것이 포스트미니멀리즘입니다. 막스 리히터, 올라퍼 아르날즈, 루도비코 에이나우디, 닐스 프람 등등요. 근년의 사카모토 류이치는 포스트미니멀리즘으로 소비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신스팝부터 아방가르드까지 어마어마한 스펙트럼을 가지고 있지만 사카모토 스스로도 대표곡들을 피아노 독주, 피아노 트리오 편성의 셀프-리메이크로 자주 선보이면서 이런 방식의 소비를 (본의든 아니든) 부추긴 측면이 큽니다. 온갖 괴팍한 곡들이 난무하는 방대한 사카모토의 디스코그래피에서 많은 사람들은 '메리 크리스마스 미스터 로런스(Merry Christmas Mr. Lawrence)' '레인(Rain)' '아쿠아(Aqua)' '해피 엔드(Happy End)'처럼 느리고 서정적인 곡들 위주로 소비한 것이 어느 정도는 사실입니다.

▲아이콘으로서의 이미지

1과 같이 소비되는 와중에 사카모토 특유의 백발에 검은 뿔테 안경, 신경을 온통 피아노에 집중하는 듯한 자세, 다부진 표정 같은 시각적 이미지가 '멋진 음악가'로 자리매김하는 데 필수불가결한 요소였다고 생각합니다. 데이비드 보위, 빌 에번스, 쳇 베이커, 키스 재럿의 대표 이미지처럼 피아노를 향해 몸을 기울인 백발의 사카모토는 성화(聖畫)처럼 박제된 측면이 있습니다. 그 '성화'에 '메리 크리마스마스 로런스'처럼 진지하고 사색적이나 대중적인 몇 곡이 결합되면서 '나는 이 형(오빠, 아저씨)의 팬이야'라는 고백이 그의 방대한 디스코그래피를 모두 살펴보기 전에 바로 튀어나오게하는 요소가 됐다고 (매우 조심스럽게) 생각합니다. 또, (더 조심스러운 이야기이지만) 2014년 이후 여러 암과 싸우면서 인터뷰, 음반, 에세이 등을 통해 투병 사실을 공개적으로 밝혔던, '비극성'도 그의 아이콘적 이미지에 일조했다고 봅니다.
[서울=AP/뉴시스] 사카모토 류이치

[서울=AP/뉴시스] 사카모토 류이치

▲영상 음악가, 선구적 음악가로서의 인지도

근작 '괴물'을 비롯해 '레버넌트: 죽음에서 돌아온 자' '남한산성' '철도원' '마지막 황제' 등의 음악. 또, 사카모토가 전체적으로 음악을 맡지는 않았지만 그의 음악이 삽입된 '바벨'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등도 그의 음악을 찾아보게 하거나 생명력을 연장시키는 데 역할을 했다고 봅니다. 사실, 사카모토 류이치가 몸담은 옐로 매직 오케스트라(YMO)는 일찍이 1970년대부터 월드투어를 돌았고 미국에서 싱글을 40만 장이나 팔 정도로 세계적인 성공을 거뒀습니다. 이런 YMO 붐 속에서 서구의 힙합 프로듀서, 전자음악가들이 이미 1980년대부터 수많은 작품에 YMO의 곡을 샘플링했죠. 서구의 음악 마니아들 사이에서 YMO와 사카모토는 서정적 피아니즘보다는 오히려 신스팝, 롤랜드 TR-808의 선구자로 더 알려져 있는 경우도 많습니다.

정병욱 음악평론가

시간이 흐를수록 경력과 작품 면에서 위대한 음악가의 이름은 자연히 하나둘 늘어갈 테지만 음악이 지닌 본질적인 힘과 그것의 음악 외적인 영향력, 확장성을 진정으로 믿고 실천하는 이의 이름은 갈수록 찾기 힘들 것입니다. 사카모토 류이치는 국경과 시대, 장르를 넘어 계속해서 자신의 음악 지평을 넓혀간 인물입니다. 젊은 시절 혁신적이고 감각적인 전자음악과 이후 깊은 울림과 감동을 주는 영화음악, 서양 고전과 일본의 민족성을 아울러 이지적이고 독특한 음악을 창조했습니다. 다만 이해와 감상이 어렵지 않은 음악을 창조했다는 데 중요한 의의와 방점이 있죠. 그는 자신이 했던 말처럼 더 넓은 시야의 미래로 우리를 이끌기 위해 기꺼이 과거와 현재를 해체할 사람이면서도("Deconstructing the past, and the present, in order to lead us into the future with a greater scope"), 동시대 및 대중과 눈과 귀를 맞추려 늘 고심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세상으로부터 분리되지 않고 재해 구호, 환경 보호, 평화 증진, 탈중앙화 등 사회, 정치 메시지에 목소리를 실었으며, 투병 생활 이래 마지막 순간까지 소리의 의미에 대해 계속 자문했습니다. 그가 나이가 들수록, 세상을 떠난 이후에도 계속 존경 받은 건 음악과 세상을 대하는 진중한 태도가 점차 무르익은 덕분일 것입니다. 한 개인의 작품과 경력 그리고 그 너머 그의 태도와 삶이 주는 영감과 감흥은 거대한 산업화, 고도화된 자동화 및 협업이 음악계에 미치는 영향 속 더욱 특별한 의미를 갖습니다.

황선업 음악평론가

벌써 1주기라니 시간이 참 빠르고, 한편으로는 아직까지 사카모토 류이치라는 이름의 존재감이 너무나 크게 남아있어 그의 음악이 잊혀지려면 정말 많은 시간이 흘러야겠구나라는 생각도 하게 됩니다. 가뜩이나 그가 숨을 거둔 후에도 생전에 진행했던 작업물들이 하나 둘씩 공개되면서, 생명이 꺼져가는 순간까지도 음악과 정면으로 마주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다시금 깨닫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런 음악에 대한 순수한 열정이 오히려 그를 볼 수 없게 된 지금 더욱 간절해지고 그리워지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개인적으로 사카모토 류이치의 딸인 사카모토 미우의 공연을 작년 말에 본 적이 있는데, 두 사람이 함께 했던 '더 아더 사이드 오브 러브'를 부르는 순간, 관객들 역시 많은 생각에 잠기는 듯한 모습이었습니다. 그만큼 이르게 떠나버린 음악 거장의 흔적이 사라지기엔 1년이라는 세월은 너무나도 짧다는 느낌이 강하게 듭니다.


◎공감언론 뉴시스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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