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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소 1500억, 은나라 도자기 한국에있다…중국들썩

등록 2012.07.07 07:02:00수정 2016.12.28 00:55: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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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이예슬 기자 = 대만 신생보(新生報)가 은나라 마지막 황제 제신(帝辛)이 '목야(牧野)의 전쟁' 직전 별점을 치고, 그 점괘를 새겨 남긴 홍도관을 전면 특집으로 보도했다.  ashley85@newsis.com

【서울=뉴시스】이예슬 기자 = 대만 신생보(新生報)가 은나라 마지막 황제 제신(帝辛)이 '목야(牧野)의 전쟁' 직전 별점을 치고, 그 점괘를 새겨 남긴 홍도관을 전면 특집으로 보도했다.

 제목(殷商古物現身韓國 占星紅陶罐出土) 아래 7개 서브타이틀(前言, 輾轉經手 不知是寶物, 陶罐甲骨文 暗藏天機, 熱釋光檢測 真偽解惑, 殷古物 總算驗明正身, 歷史價值 金錢難衡量, 專訪甲骨文專家 朴大鍾: 紅陶罐 來歷不凡)로 대서특필했다.

 ◇은나라 유물 한국에 현신(現身), 별점이 기록된 홍도관 출토          

 원래는 단지 어깨부위에 꽃무늬가 있는 일개 화병으로만 여겨졌던 향토적 홍도관이었다. 처음엔 그 둘레에 원형으로 새겨진 불규칙적 꽃무늬가 곧 갑골문임은 명확히 인지되지 않았다. 고증을 거치면서 이 일단의 갑골문은 역사적 '목야(牧野)의 전쟁' 사실과 관련이 있고 이 물건은 중국역사의 은상 유물인 것으로 능히 검증돼 현재 한국에 현신(現身)했다.

 1899년 중국대륙 은허 유적지에서 발견된 갑골문 이후 지금까지 약 15만 편의 갑골이 출토돼 세상에 전해 내려왔다. 그런데 그 중 대부분은 귀갑수골 위에 새겨진 것이고 또한 대부분은 모두 파손된 불완전한 것들이며, 도기상에 새겨진 갑골문은 드물 뿐만 아니라 물건이 거의 완정에 가까운 것은 더욱 보기 어렵다. 그리고 출토된 물건 위에 새겨진 갑골문 내용을 연구해보면 점복으로써 길흉을 묻는 것이 주류를 이루고 있는데 아직까지 별점 사실(史實)을 기술한 물건은 발견되지 않았다. 그런 관계로 은(殷) 주왕(紂王) 홍도관의 출토는 별도로 상조문화의 신영역에 대한 일개 연구를 개창하는 것이 된다.

 특히 홍도관 상에 새겨진 갑골문은 상나라 주왕이 별자리 모양을 관찰하고 주나라 무왕을 토벌하는 과정을 서술하고 있어, 이 홍도관이 상나라 주왕의 왕실유물일 수 있음을 증명, 가히 일건의 세계급 문화유산이자 세상에 보기 드문 진귀한 물건이라 할 수 있어, 그 중요성 및 역사 형성에 대한 충격은 모두 사람들을 놀라게 하고 과소평가할 수 없게 만든다.

 ◇여러 손으로 옮겨가는 동안 보물인 줄 몰랐다

 한국인 골동품 수집가인 안 선생은 중국대륙을 자주 다닌 사람으로, 1992년 또는 1993년 요녕성 부신(阜新)시 외곽지역에서 현지 골동상으로부터 1차로 물건들을 구입했는데 그 중에 이 홍도관이 포함돼 있었다. 그 후 안 선생은 이 물건을 요녕성 심양시 만융촌 내 거주지에 보관해두었다. 2005년 7월20일 전후로 안 선생은 이 홍도관을 또다른 한국인 골동품 수장가인 석 선생에게 팔았고, 석 선생은 8월18일 홍도관을 여행용 가방에 넣어 중국 북경공항에서 X레이 검색을 받은 뒤 북방항공편을 이용해 한국 인천공항으로 들여왔다. 홍도관이 한국에 도착한 이후 석 선생은 또 8월 말에 또다른 김 선생에게 팔았고, 접수자인 김 선생 또한 현재 소장자인 조 선생에게 소유권을 양도했다.

 이러한 일련의 이동 과정 중에서 소유인 모두는 홍도관 상에 새겨진 것을 단지 꽃무늬가 수려하고 독특하다라고만 생각했지, 그 특별한 의의와 가치는 진정으로 인식하지 못했는데 현재 소장자인 조 선생 또한 마찬가지였다.

 조 선생은 홍도관을 획득한 후에도 특별히 중시하지 않고 단지 일반가정에 진열해놓았다. 텔레비전 받침대 위에 놔둬 평시에는 그것을 수장함(收藏盒)이 되게 하고 손길가는대로 일부 잡동사니와 어린 아들의 장난감들을 담아놓았다. 2005년 12월24일 저녁시간, 조 선생은 TV를 보는 도중, 동시에 시선이 이 홍도관에 이르렀는데, 곧 그것을 손으로 붙잡고 자세히 한 번 감상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때 그는 문득 이 독특한 꽃무늬가 중국 고문자와 닮았고, 만일 그렇다면 이 홍도관은 진정한 골동품일 수 있음을 경각(驚覺)했다. 또한 이 고문자에 대해 도대체 무슨 뜻인지 호기심으로 가득 찼다. 이에 이튿날 그는 즉시 대종언어연구소 박대종 소장을 찾았고 그때부터 홍도관이 갖는 진정한 신분의 역정(歷程)을 탐색하기 시작했다.

 ◇천기가 암장된 제신홍도관(帝辛紅陶罐) 갑골문

 갑골문은 일종의 매우 중요한 고한자(古漢字) 자료이다. 절대 부분은 은허에서 발견됐는데 기본적으로는 모두 은상왕조 통치자의 점복기록이다. 은허는 저명한 은상시대 유적지로 그 범위는 하남성 안양시 서북 소둔촌, 화원장, 후가장 등지를 포괄한다. 이곳은 일찍이 은상 후기 왕조들의 도성 소재지인 까닭에 은허라 불리운다.

 홍도관에는 모두 61개의 갑골문자가 새겨져 있는데, 그 중 ‘占(그 외부에는 囗이 있음)’자 하나는 바닥부위에 있고, 나머지 60개 글자는 도관 견부에 있는데, 중복된 부분을 제외하면 총 49자이다. 도관 견부의 60개 글자들은 각자 모두 하나의 완전한 원을 형성하고 있는데 결코 조금의 간격도 없이 단원횡행(單圓橫行) 방식으로, 우측에서 좌측 방향으로 서사돼 있다. 그 주요사항은 성상(星象)을 관찰하고 전쟁결과를 추구한 내용이 기록돼 있다.

 연구에 따르면 '주왕(紂王)'이라고도 하는 은상 최후의 황제 '제신(帝辛)'의 재위 만기 시에 '태백경천'이라고 하는 금성의 이상 현상이 나타났다. 이는 반란 및 국가기강을 파괴하는 대흉조였으니 은상으로서는 왕조 존망이 걸린 절박한 지경에 직면하게 됐다. 당시는 때마침 주나라 무왕이 기병해 주(紂) 왕을 치려는 시기여서, 주왕은 화근을 소멸시키기로 결정하고 이에 출병 전에 제사의 예를 거행하고 성상을 관찰, 그 결과를 구해 물었다. 주왕이 평상시처럼 그 결과를 수골(獸骨) 위에 새기지 않은 까닭을 규명해보면, 그 주된 원인은 중국전통의 천간과 지지는 60으로써 한 사이클을 이룬다는 사고방식이 있는데 주왕은 응당 천자의 군대가 작전 중에 전체 과정을 끝까지 가기를 희망했기 때문이다. 둥근 원에 꽉 차게 표시를 한 것은 승리를 획득해 상왕조의 사직을 지키는 의의가 있다. 이에 주왕은 특수한 정황에 직면한 상태에서 특수한 결정을 내리게 되는데 장차 결과는 60개의 글자들을 둥근 도관 위에 새겨 구웠으니 이것이 곧 현재의 이 홍도관이다.

 60개의 갑골문자는 각 30자씩 2조로 나뉘어져 있다. 제1조 복사는 '금(金)'에서 '후(侯)'까지로, 추구해 묻는 사항을 설명하고 있다.

 "불길하게도 대낮에 금성이 나타났습니다. 신(辛)의 군대를 출병시킬까요? 주후서백(周侯西伯)의 군대와 그의 우군들이 주(州) 서읍으로부터 혁명을 일으키는 일이 없을까요? 조왕 문정과 부왕 제을께서 돕고 지켜주실까요? 엄정한 기강이 무너지고 방임되는 일이 있을까요? 과연 서백후(西伯侯)로부터 그러한 일이 있었다."

 제2조복사는 '조(祖)'에서 '어(御)'까지로 계속해서 질문을 구함과 아울러 결과를 설명하고 있다.

 "조왕 문정과 부왕 제을이시여! 문(文)을 치기 위해 저녁에 제를 올리면, 우리 군대가 승리를 획득할 수 있을까요? 정수(井宿)에 제를 올리면 짐이 재앙을 막을 수 있을까요? 왕이 성조를 살펴 길흉판단을 해 가로되, '각성(角星)이 밝게 빛나니, 나는 문(文)의 세력을 정벌해 배(나라)를 평안하고 고요하게 이끌 것이고, 승리를 획득한 후에는 서읍을 분봉할 것이며, 재앙은 능히 막을 수 있을 것이다'." (해석 박대종)

 이 60개의 글자들은 3000여년 전 주왕과 주후서백간의 전쟁을 앞둔 장면을 생동감 있고 완전하게 묘사하고 있다. 주왕은 금성이 대낮에 출현한 사실을 흉조로 여기고, 국가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이성제성(以星制星)'의 전략적 사고 하에 각성(角星) 별점을 진행해, 금성으로부터 야기된 불안을 저지해낼 것이라 판단하고 있는데 그것이 갖고 있는 역사적 가치와 의의는 확실히 말로는 설명할 수 없을 정도이다.

【서울=뉴시스】이예슬 기자 = 대만 신생보(新生報)가 은나라 마지막 황제 제신(帝辛)이 '목야(牧野)의 전쟁' 직전 별점을 치고, 그 점괘를 새겨 남긴 홍도관을 전면 특집으로 보도했다.  ashley85@newsis.com

 ◇진위 의혹을 풀기 위한 열석광검측(熱釋光檢測)

 옛 물건에 대한 진위를 고증하는 일은 일단 힘들고 고생스러우며 또한 완전무결함을 얻기가 매우 어려운 과정이다. 각 방면으로부터 힐책이 따르게 되는데, 물론 선의도 있고 혹은 악의도 있다. 모두 인내심을 가지고 상세하게 하나하나 해설을 해줘야 한다. 진정한 것인지에 이르러야 의문자로 하여금 진심으로 신복(信服)하게 만드니 오직 '진인사청천명(盡人事聽天命)' 밖에 없는 것이다.

 홍도관의 고증에 대해 갑골문 방면의 의혹이 따랐는데, 대종언어연구소 소장 박대종 저 '상제신(商帝辛)의 점도문(占陶文)에 관한 연구' 논문에 매우 상세하게 설명돼있어 여기서 더 이상 반복해, 이 갑골문은 도대체 어느 때 새겨졌는지, 도기를 굽기 전에 새겼는지 아니면 도기를 구운 후에 새겼는지 등의 의문을 언급할 필요가 없다.

 한국의 경기도무형문화재 제37호인 김일만 옹기장은 비록 홍도관 상의 각문을 한 글자도 알지 못하지만 집안 대대로 6대째 이어져 내려오는 옹기 명인으로, 그가 제기한 견해는 전문적일 뿐만 아니라 권위도 있다. 그는 "홍도관 위에 새겨진 문자는 점토로 기물의 형태를 완성한 다음 완전히 굳기 전에 새기고 나서 자기에 비해 낮은 온도에서 구워낸 것이며, 이미 구워낸 도기에 이처럼 섬세한 곡선을 새겨넣는다는 것은 기술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래서 '홍도관과 글자'는 함께 완성된 것이라 할 수 있다"고 밝혔다. 동시에 그는 또한 "이 홍도관은 두드렸을 때 나는 소리가 낮고 묵직해 일반적인 그런 맑고 듣기 좋은 소리 같지 않은데 그 이유는 장기간 흙속에 매장돼 습기를 받았기 때문이며, 사용한 도토는 곧 강 근처의 토질이다”고 표명했다. 이 두 가지 견해 또한 홍도관이 장기간 지하에 묻혀 있었던 것과 은상 도성의 위치 및 실제정황이 모두 완전히 부합한다.

 이밖에, 갑골문이 발견된 연대가 1899년이므로 그 이전에는 이런 종류의 문자를 아무도 몰랐기 때문에 자연히 위각(偽刻)이 나타나기는 불가능하므로, 홍도관의 소성연대가 1899년보다 더 이르다는 것이 증명되기만 하면 홍도관 상의 갑골문의 진실성은 실증된 것에 해당한다. 그래서 홍도관 소장자인 조 선생은 중국 고문자학자인 중산대학 진위담(陳煒湛) 교수의 건의를 받아들여 최선진의 '열석광검측'을 진행, 홍도관의 연대를 판단키로 결정했다.

 ◇검측으로 정신(正身)이 증명된 은나라 유물

 2008년 3월 조 선생 등은 홍콩의 고동감정유한공사(古董鑑定有限公司), 중과연발유한공사(中科研發有限公司), 성대전업고문유한공사(城大專業顧問有限公司) 및 중국상해박물관 문물보호 고고과학실험실에 열석광검측을 신청했다. 홍도관의 안전을 고려해 한국에 방문해 시료채취(샘플링)하는 조건이었는데 결과는 오직 성대(城大)만이 받아들여 그 책임자인 량보류(梁寶鎏) 박사가 4월15일 방한했다. 이와 동시에 조 선생 등은 또한 상해박물관 하군정(夏君定) 연구원의 지시에 따라 홍도관 분말을 칼로 긁어내어 국제우편으로 상해박물관에 보내 검측을 진행했다.

 2008년 4월23일 홍콩 성대(城大)의 검측보고가 나왔는데 그 결과는 지금으로부터 1465년이었다. 이는 홍도관이 옛 물건임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에 이어 바로 며칠 뒤 4월25일에 상해박물관 또한 검측결과를 제출했는데 그 결과는 지금으로부터 100년 미만이고, 또 홍도관은 모방제작한 모조품이라 말했으니 양가(兩家)의 감정결과가 1000년 이상 차이가 나 사람들로 하여금 이해할 도리가 없게 만들었다.

 그로부터 1년이 경과해 전자우편으로 연락, 상해박물관은 제2차검측 및 하군정을 파견키로 결정한다. 그는 2009년 12월14일에 친히 한국을 방문해 직접 시료채취를 했는데, 22일자 발표검측결과는 지금으로부터 480년 전이고 오차는 ±100년이었다. 이러한 검측결과는 비록 홍도관이 진정한 옛 물건임을 실증하는 것이었지만 검측연대의 차이가 너무 커서 사람들로 하여금 완전히 신복(信服)케 하기 어려운 유감스러운 것이었다. 그러한 유감을 풀 길이 없어 조 선생 등은 세계적으로 가장 권위 있는 영국 옥스퍼드 감정공사에 요청, 최종 검측을 진행키로 결정한다.

 2012년 2월26일 영국 옥스퍼드 감정공사는 요원들을 한국에 파견, 시료를 채취했다. 3월8일자로 발표된 검측결과는 지금으로부터 1700~2700년 전이었다. 홍도관은 출토된 지 20년 이상이 지나 비로소 열석광검측을 진행했고 더욱이 출토 후 뜨거운 햇빛을 받고 뜨거운 물로 세척하는 등의 과정을 겪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 검측결과로 인해, 물건의 연대가 오직 감소할 수는 있지만 증가할 수는 없는 상황에서 지금에 이르렀음을 감안하면, 홍도관은 정신(正身)을 밝힌 것으로 응당 은상의 고물(古物)이라는 점에 추호의 의문도 없게 된다.

 ◇역사적 가치 돈으로 헤아리기 어렵다

 '무왕벌주(武王伐紂)', '목야(牧野)의 전쟁'은 우리들이 초등학교 교과서에서 공부할 수 있는 역사적 사실이다. 제신홍도관의 출토는, 고대도자발전사 발전과정을 명백히 나타냈다는 의의 외에 도관상의 갑골문 또한 은상시대 언어문자학 및 천문성상학 방면에 대한 천석(闡釋)을 갖추고 있다는 의의가 있다. 그리고 가장 적극적인 의의는 상(商)과 주(周) 왕조가 서로 대항하는 균형성을 취득했을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사기(史記)', '상서(尚書)'에 기술된 역사 내용의 진실성을 다시 한 번 검증해줬다는 것으로, 그 역사적 가치는 확실히 돈으로 값을 헤아릴 수가 없을 정도로 크다.

 ◇갑골문 전문가 박대종 전방(專訪), 평범치 않은 홍도관의 내력

 박대종은 갑골문을 연구한 한국인이다. 그가 2005년 12월25일 처음으로 제신홍도관을 보았을 때 그의 표정은 거의 완전히 굳어버렸다. 그는 홍도관 바닥 부위에 새겨진 ‘占(그 외부에는 囗이 있음)’자가 은상시대 복사 전문용어임을 한 눈에 알아보고 그것이 은나라의 유물임을 알고 놀랐다. 그가 갑골문을 전문적으로 연구한 지 15년간에 오직 보통의 점복 사건을 기재한 100여 건의 갑골문만을 접촉한 적이 있었을 뿐이고 이번 경우는 전연 그와 같지 않았기 때문에 홍도관은 현저하게 그 내력이 평범치 않았다. 갑골문을 연구한 사람의 입장에서 말하자면 이것은 구득하기가 매우 어려운 것이고 또한 만날 수는 있으나 구할 수는 없는 일이어서, 그의 손은 바야흐로 한 건의 완정한 역사적 사실을 기재한 3000년된 유물일 가능성을 붙잡고, 그의 입장에서 말하자면 정말 청천벽력 같았으며, 일순간 온 몸의 감각이 소름이 끼치고 전율했다고 한다.

 3일이 경과해 자지도 쉬지도 않고 연구한 끝에 그는 홍도관 견부상의 60개 갑골문자를 명확히 인식했다. 그것은 상왕조 말엽 국가가 긴급사태에 직면해 황제가 별점을 쳐 점괘를 구한 결과를 기술한 것이었다. 또한 그 새김 문자들 중에는 황제와 강적 라이벌의 이름이 명백하게 나와 있었다. 이런 까닭에 그는 이것이 상 왕조의 역사 사실을 완정하게 기술한 홍도관이며 이처럼 완정하게 보존된 세계 유일의 국보급 유물임을 인식했다.

 2006년 2월 박대종은 제신홍도관의 갑골문을 전문적으로 연구한 논문을 발표했다. 뒤이어 수년 동안 그는 부단히 논문을 개진했고 외부의 질의들에 대해 일일이 해설해 지금은 의심을 품은 목소리가 갈수록 적어지게 됐으며, 홍도관의 신분은 점차 모두의 인정과 동의를 획득하게 됐다. 이 모두는 박대종의 공헌이며, 그 공은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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