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동립 잡기노트]아십니까, 풍산김씨 허백당 문중
【서울=뉴시스】간찰(며느리에게 보낸 편지)
168년 전인 1845년 5월24일 시아버지가 며느리에게 한글로 답장을 했다. 며느리가 친정에 다니러 간 뒤 마을에 역질이 발생해 걱정을 하던 중 무사하다는 며느리의 편지를 받고 안심했다면서 가까이에 있는 외가도 방문하고 편하게 지내다가 돌아오라는 내용이다. 또 아들을 보내 며칠 묵어오게 하고 싶지만 아들이 두창(천연두)에 걸려 보내지 못해 민망하다는 말과 함께 사돈의 안부를 두루 묻고 한 번 다녀갔으면 좋겠다는 말을 전하라고 했다.
이 편지는 풍산김씨 시조 김문적의 23세손 김중후가 안동시 온혜리에서 봉화 오록으로 시집온 진성이씨 며느리에게 보낸 것이다. 편지에 을사 5월24일이라고 적혀있는데, 풍산김씨 족보에 따르면 온혜에서 시집 온 며느리는 진성이씨 이만식의 딸인 것으로 확인된다.
【서울=뉴시스】남애정사잡영(8장 가운데 일부)
김세락은 풍산김씨 시조 김문적의 25세손으로 김진흠의 맏아들이다. 문장이 뛰어나 많은 후학들을 지도했으며 사림의 추앙을 받았다.
【서울=뉴시스】세전서화첩(완영민읍수도)
이 문중은 한말과 일제강점기에 많은 독립운동가를 배출했다. 안동시 풍산읍 오미동 오미광복운동기념공원에는 독립운동에 헌신한 20명 이상의 풍산김씨 인물들의 공적이 돌에 새겨져있다. 이 중 김순흠은 을사오적의 처단을 주장하는 ‘토오적문(討五賊文)’을 유림에 배포하고 “일제치하의 곡식은 먹지 않겠다”는 결연한 각오로 단식 끝에 자정(自靖) 순국했다.
【서울=뉴시스】동해안주공소첩
1923년 관동대지진이 일어났을 때 일본이 한국인을 6000여명이나 학살하는 만행을 저지른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김지섭은 이를 응징하고자 1923년 의열단을 대표해 도쿄로 가서 일본 왕궁에 폭탄을 투척, 처음으로 일본왕에게 책임을 물은 인물이다. 김재봉은 경성공업전습소를 졸업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지원과 사회운동에 투신하고 1925년 제1차 조선공산당 책임비서로서 민족문제를 해결하는 데 앞장섰다.
한국국학진흥원 제10회 기탁문중특별전 ‘민심을 보듬고 백성을 생각하며’가 7일부터 내년 1월5일까지 국학진흥원 대강당에서 열린다. 풍산김씨 허백당 문중 주요 기탁자료 130여점을 선보인다.
문화부장 [email protected]
Copyright © NEWSIS.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