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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가포르 울린 '트로이의 여인들', 恨으로 위로했네

등록 2017.09.10 10: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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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가포르=뉴시스】 국립창극단 '트로이의 여인들' 싱가포르 빅토리아 극장 공연. 2017.09.10. (사진 = 국립극장 제공) photo@newsis.com      

【싱가포르=뉴시스】 국립창극단 '트로이의 여인들' 싱가포르 빅토리아 극장 공연. 2017.09.10. (사진 = 국립극장 제공) [email protected]

【싱가포르=뉴시스】 이재훈 기자 = 지난 7일 밤 싱가포르 빅토리아 극장의 객석 500석을 가득 채운 관객들의 표정이 점차 변화하는 것만으로도 창극 '트로이의 여인들'이 가진 정서적 힘이 느껴졌다.

'트로이의 여인들'의 2시간 러닝타임 중 여러 번에 걸쳐 객석 조명이 밝혀진 건 다행이었다. 트로이의 여인들에게 불행을 알리는 아가멤논의 전령 '탈튀비오스'(이광복)가 객석 뒤편에서 등장할 때마다 불이 환하게 켜졌다.

덕분에 창극이라는 낯선 장르를 마주한 싱가포르 관객들의 얼굴을 살필 수 있었다. 극 초반에 심드렁하던 현지 관객은 여인들의 수난사에 눈시울을 붉히기까지 했다.  

국립극장(극장장 안호상) 전속단체 국립창극단(예술감독 김성녀)의 '트로이의 여인들'이 싱가포르 공연계 중심에서 관객들의 심장을 후려쳤다. 국립창극단 창극 작품 중 창(唱)의 본질을 가장 잘 살려냈다고 평가를 받는 작품인데, 그 본질이 낯선 땅의 객석에 꽂힌 것이다.

싱가포르예술축제(SIFA·Singapore International Festival of Arts)의 초청작으로 9일까지 공연한 '트로이의 여인들'은 3일간 전석 매진돼 약 1500명을 불러 모았다.

올해로 40주년을 맞은 싱가포르예술축제는 무역 거점 도시 싱가포르의 주요 축제인 만큼 아시아의 유럽 진출 관문 역을 맡고 있다. 더구나 '트로이의 여인들'은 싱가포르예술축제가 국립극장과 공동제작한 작품이다. 싱가포르 공연계를 대표하는 옹켄센 연출로 지난해 11월 한국의 국립극장에서 초연됐다.

◇옹켕센, 창(唱)의 본질을 살리다

국립창극단이 외국 연출가에게 창극 연출을 맡긴 건 이번이 세 번째다. 앞서 2011년 독일의 오페라 연출가 아힘 프라이어가 '수궁가', 2014년 루마니아 출신 미국 연출가 안드레이 서반이 '다른 춘향'을 국내 선보인 바 있다.

【싱가포르=뉴시스】 국립창극단 '트로이의 여인들' 싱가포르 빅토리아 극장 공연. 2017.09.10. (사진 = 국립극장 제공) photo@newsis.com      

【싱가포르=뉴시스】  국립창극단 '트로이의 여인들' 싱가포르 빅토리아 극장 공연. 2017.09.10. (사진 = 국립극장 제공) [email protected]

'트로이의 여인들'은 기원전 1350년에서 1100년 사이에 일어난 것으로 추정되는 트로이전쟁 관련 신화와 전설이 기반이다. 서사적인 측면에서 국제적인 보편성을 획득했다. 

배삼식 작가(동덕여대 교수)가 에우리피데스 '트로이의 여인들'(기원전 415)과 장 폴 사르트르가 개작한 동명 작품(1965)을 바탕으로 창극을 위한 극본을 다시 썼다.

올해를 끝으로 싱가포르예술축제 예술감독 자리를 내려놓는 옹켕센 연출은 프랑스 테아트르 드 라 빌·영국 에든버러 페스티벌·미국 링컨센터 페스티벌 등 세계 주요 공연장과 축제에서 러브콜을 받아왔다. 그 역시 글로벌한 감각을 갖추고 있는 셈이다.

'트로이의 여인들'을 통해 처음으로 창극에 도전한 옹켕센은 한국의 어느 연출가보다도 날 것의 판소리를 들고 전력질주한다. 공연의 전체 콘셉트를 미니멀리즘으로 잡은 이유 역시 소리의 아름다움을 돋보이게 하려는 전략이었다.

'트로이의 여인들' 싱가포르 첫 날 공연 다음날 현지의 한 호텔에서 만난 옹켕센 연출은 "판소리의 정수를 보여주기 위해 노력을 기울였다"면서 "창극이 가지고 있는 본래의 순수성을 끄집어내는데 신경을 썼다. 판소리는 인간의 목소리가 지닐 수 있는 가장 자연스런 힘을 갖고 있다"고 했다.

커튼콜에서 싱가포르 관객들의 끊이지 않았던 박수를 거듭 언급하며 놀라워했다. 그는 "싱가포르 관객들은 박수를 짧게 치는 것으로 유명해요. 박수를 중간에 멈출까봐 걱정을 많이 했는데 공연을 굉장히 좋아한 것 같다"고 흡족해했다.

그간 창극의 해외 진출은 유럽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프라이어 연출의 '수궁가' 독일 공연(2013), 고선웅 연출의 '변강쇠 점 찍고 옹녀'의 프랑스 공연 등이 예다. 특히 '변강쇠 점 찍고 옹녀'의 파리 공연은 현지를 들썩이게 하며 화제가 됐으나 '트로이의 여인들'은 같은 문화권인 아시아에서 공연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싱가포르=뉴시스】 국립창극단 '트로이의 여인들' 싱가포르 빅토리아 극장 공연. 2017.09.10. (사진 = 국립극장 제공) photo@newsis.com      

【싱가포르=뉴시스】  국립창극단 '트로이의 여인들' 싱가포르 빅토리아 극장 공연. 2017.09.10. (사진 = 국립극장 제공) [email protected]

안호상 국립극장 극장장은 "그간 창극이 아시아보다는 유럽이나 미국에 주력한 것이 사실"이라면서 "아시아 예술이 우선 풍성해지려면 아시아 예술가들과 관객들이 교류를 통해서 우리를 먼저 발견해가는 것이 선행돼야 한다"고 말했다.
 
송현민 음악평론가도 "창극이 그간 아시아 시장에 진입을 못했는데 싱가포르는 홍콩 못지 않은 아시아의 허브"라면서 "공연 사냥꾼이라는 디렉터들이 많이 찾는 곳이기도 하다. 이곳을 지렛대 삼아 세계로 진출할 수 있는 기회가 많다"고 전했다.

◇배우들의 대활약…관객들의 열광적인 반응

작품은 헤큐바, 카산드라, 안드로마케, 헬레네로 대표되는 네 명의 여인들이 벼랑 끝에서 선택하는 각기 다른 감정과 삶의 방식에 가슴이 덜컹 내려앉게 만든다.

이날 헤큐바, 카산드라, 안드로마케, 헬레네를 각각 연기한 김금미, 이소연, 김지숙, 김준수에 대한 관객들의 반응은 말 그대로 폭발적이었다.

안숙선이 전체적인 작창, 정재일이 일부 곡의 작곡과 음악감독을 맡았는데 판소리 본연의 아름다움에 집중하는 미니멀리즘은 각 배역별로 절묘하게 들어맞으며 소리의 최대치를 끌어냈다.

【싱가포르=뉴시스】 국립창극단 '트로이의 여인들' 싱가포르 빅토리아 극장 공연. 2017.09.10. (사진 = 국립극장 제공) photo@newsis.com        

【싱가포르=뉴시스】  국립창극단 '트로이의 여인들' 싱가포르 빅토리아 극장 공연. 2017.09.10. (사진 = 국립극장 제공) [email protected]

트로이의 마지막 왕비 헤큐바의 장엄한 목소리는 거문고, 복수심에 불타오르는 트로이 공주 카산드라의 목소리는 대금, 남편 헥토르마저 잃은데 이어 어린 아들 아스티아낙스를 그리스군에게 빼앗기는 안드로마케 역의 목소리는 아쟁,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이자 트로이 파멸의 씨앗인 헬레네는 피아노 선율이 짝을 이뤘다.

여기에 판소리의 시김새(음을 꾸며내는 모양새)가 다른 형식으로 버무리게 만든 코러스들의 활약도 돋보였다.

옹켕센 연출은 "솔로 파트가 부각되는 동시에 코러스 부분도 풍성하게 만들었다"면서 "판소리의 미래 방향성을 제시하지 않았나라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창극을 처음 접했다는 대학생 에드워드(23)는 "한국말을 모르지만 영어 자막을 보지 않더라고 소리의 뉘앙스만으로 배역들의 감정이 잘 전달됐다"면서 "셰익스피어의 '리어왕' 같은 분위기를 음악적으로 느끼게 만드는 클래시컬함도 있었다"고 봤다.

또 다른 대학생 리처드(24)는 "판소리의 역사가 길다고 들었는데, 소리 자체는 현대적인 느낌도 상당했다"면서 "특히 고혼(안숙선)의 깊은 소리가 인상 깊었다"고 했다.

국립창극단의 주역급 배우로 이번 무대에서는 코러스를 맡은 민은경은 "관객들의 반응이 무대 위에서 바로 느껴질 정도로 대단한 공연이었다"고 했다.

특히 이날 절세의 미녀 역을 소화한 국립창극단의 남성 단원 김준수에 대한 반응이 뜨거웠다. 곱상한 외모의 그는 이미 한국에서는 '창극계의 아이돌'로 유명하다. 현지 관객들이 함께 사진을 찍자는 요청이 쇄도했다. 김준수 한국 팬클럽 회원은 전남 장흥이 주거지임에도 그가 출연하는 '트로이의 여인들' 싱가포르 3회 공연을 모두 보기 위해 홀로 현지로 비행기를 타고 날아오기도 했다. K팝 부흥기에서나 볼 수 있는 풍경이었다.

【싱가포르=뉴시스】 국립창극단 '트로이의 여인들' 싱가포르 빅토리아 극장 공연. 2017.09.10. (사진 = 국립극장 제공) photo@newsis.com       

【싱가포르=뉴시스】  국립창극단 '트로이의 여인들' 싱가포르 빅토리아 극장 공연. 2017.09.10. (사진 = 국립극장 제공) [email protected]

각국의 공연 배급·유통을 맡는 프리젠터들 역시 이번 공연에 대한 관심이 지대했다. 그리스의 카티야 아르파라 아테네 오나시스 컬처럴센터 연극·무용 예술감독, 스페인의 프란세스 카사데수스 칼보 바르셀로나 그렉 페스티벌 축제감독, 일본의 히로미 마루오카 요코하마 공연예술회의 총감독, 호주의 스티븐 암스트롱 멜버른아츠센터 아시아-태평양 공연예술 트리엔날레 축제감독, 네덜란드의 조켐 발켄버그 홀란드 페스티벌 음악·음악극 프로그래머 등이 이번 공연을 봤다.

특히 '트로이의 여인들'의 고향인 그리스의 아르파라 감독은 "판소리와 창극을 처음 접했는데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를 지은 호메로스로부터 이어지는 그리스의 음유시인들의 음성이 연상됐다"면서 "구두로 전승되는 문학이라는 점에서 상통하고, 판소리에서 발전한 창극도 드라마 예술의 근원지인 디오니소스 극장에서 올라가는 연극과 음악극을 떠올리게 했다"고 말했다. "그리스 비극이 창극과 만나고, 한국의 전통이 해외 예술가와 만나서 새로운 동시대성을 가지게 된 점이 놀랍다"고도 했다.

"고대에는 그리스 비극이 발표된 역사적 장소이고, 지금은 그리스 비극을 현대적으로 번안한 작품들을 올리고 있는 그리스의 디오니소스 극장, 에피다우로스 극장에 올라가면 좋을 것 같다"고 덧붙였다. 안호상 국립극장 극장장과 만난 자리에서는 그리스 연출가가 창극을 연출해보는 것이 어떻겠냐는 의견도 내놨다.

싱가포르 현지에서는 첫날 공연을 보고 바로 리뷰를 내는 등 큰 관심을 표했다. 싱가포르 주요언론사인 '더 스트레이츠 타임(The Straitstimes)'의 악시타 난다(Akshita Nanda) 기자는 9일 자 신문의 '순수한 감정의 뮤지컬'(A musical of pure emotion)이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트로이의 여인들'에 대해 "완전 넋을 빼놓고, 잊을 수 없게, 잊지 못하게 만들었다"(mesmerising, haunting, unforgettable)고 호평했다.

"영감을 받은 그리스 신화에 대한 이해를 돕게 해준다"면서 "새로운 걸 맞이한 관객들은 음악의 정직함이 끌어들이는 아픔으로 인해 오랫동안 압도당할지도 모른다"고도 썼다.

한편 '트로이의 여인들'은 싱가포르 공연 이후인 11월 22일부터 12월3일까지 장충동 국립극장 달오름에서 재공연된다. 또 2018년 5월 26~27일 브라이턴에 위치한 애튼버러센터, 6월 2~3일에는 런던 사우스뱅크센터 퀸엘리자베스홀에서 공연을 이어가며  셰익스피어의 나라인 영국에서 현지 관객들을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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