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서서히 식어가는 불륜의 사랑, 연극 '배신'
【서울=뉴시스】이재훈 기자 = 연극 창작집단 양손프로젝트가 선보이는 영국 극작가 해럴드 핀터(1930~2008)의 '배신'은 부서질 듯 외로운 현대인의 가련한 외침이다.
'로버트', 그의 아내 '에마', 로버트의 친구 '제리'가 얽힌 허허한 삼각관계의 헛헛함을 보여준다.
한때 뜨거웠던 에마와 제리의 불륜관계는 여름 햇살 아래 흐물흐물해진다. 로버트와 제리는 각자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 재학 시절 나란히 시(詩) 잡지 편집장을 맡았는데, 현실에서 자신들의 마음을 표현해줄 적합한 언어는 찾지 못한다.
배우 3명과 연출 박지혜로 구성된 양손프로젝트는 '마이 아이즈 웬트 다크' '죽음과 소녀' '여직공' '단편소설극장' 등 밀도 있는 드라마로 마니아 관객층을 보유하고 있다.
무엇보다 무대와 소품을 최소화한 미니멀한 순도의 무대에서 감정을 차곡차곡 쌓아가는 구성으로 주목 받았다. 공간이 비어 있었기에 어떤 장소로든 탈바꿈했다.
이번 '배신'에서도 마찬가지다. 양쪽에 객석을 두른 11㎡(3.5평) 무대에서 사랑, 설렘, 욕망, 배신 등의 감정이 여름 덩굴처럼 엉킨다.
이번 작품은 공간보다 시간에 방점이 찍혀 있다. 에마와 제리의 7년 연인관계를 역순(1977→1968년)으로 전개하는 극의 구성은 인물들 머릿속이 비어지고 차오르는 순간을 자연스럽게 목도하게 만든다.
애초부터 불안정했던 에마와 제리의 관계가 어디서부터 본격적으로 틀어지기 시작했는지 단서들을 추적하게 된다. 에마와 제리가 각자의 가정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아파트를 마련한 순간부터? 로버트와 에마가 여행을 떠난 베니스에 도착한 제리의 편지?
에마와 제리는 제리가 에마의 딸과 놀아준 곳이 누구의 집인지 헷갈리는데, 이들 기억의 연안에는 무엇인지 분간할 수 없는 것들이 막무가내로 떠밀려 내려온다. 그렇게 해변, 아니 삶은 엉망이 된다. 지성과 본능, 순간과 지속, 윤리와 쾌락 같은 것이 해초처럼 뒤엉켜 있다.
일부 관객은 감정의 파고를 오간 기존 양손프로젝트의 작품보다 파괴력이 덜하다고 느낄 수도 있다. 하지만 가슴을 쥐어짜는 절절함, 머릿속을 뒤흔드는 묵직함이 없어도 현대인 심리의 정경을 그려내는 세련됨은 여전하다. 박지혜 연출은 환희와 환멸의 징검다리를 전과 같이 능숙하게 건넌다.
눈앞에 보이는 욕망을 향해 얄밉게 치근대는 제리 역의 손상규, 쿨하면서도 음흉하면서도 로버트 역의 양종욱 등 양손프로젝트 배우들은 역시 능수능란하다. 객원 배우로 나선 우정원은 눈빛 만으로 설렘, 욕망, 혼란을 보여준다.
공연에 적합한 공간을 설계하는 예술가를 뜻하는 시노그라퍼 여신동은 비움의 미학을 누구보다 잘 아는 디자이너임을 이번에도 증명했다. 하얀 조명과 무대는 설원 같아서, 한여름에도 마음을 시리게 만든다.
가수 박효신의 음악 파트너이자, 영화·방송·공연을 넘나드는 음악감독 정재일의 음악은 존재감을 부각하지 않은 정갈함을 택했다. 극중 혼란한 마음을 자연스럽게, 빳빳한 악보 위로 그려나간다.
핀터의 작품은 오래됐지만, 이렇게 새롭다. 20일까지 서울 한남동 더줌아트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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