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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 전 충북서 국군 vs 북한군 첫 전투 승자는?

등록 2020.06.24 10:32:23수정 2020.06.24 11:16: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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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극리·문락리 등 음성지구 전투서 국군 첫 승전보

[음성=뉴시스]강신욱 기자 = 6·25전쟁 초기 국군은 파죽지세로 남진하는 북한군을 상대로 힘겨운 전투를 벌이면서도 음성지구 전투에서 첫 승전보를 전했다. 사진은 당시 충북지역 주요 전투 현황. (사진=충북지역전사 지도 캡처). 2020.06.24. photo@newsis.com

[음성=뉴시스]강신욱 기자 = 6·25전쟁 초기 국군은 파죽지세로 남진하는 북한군을 상대로 힘겨운 전투를 벌이면서도 음성지구 전투에서 첫 승전보를 전했다. 사진은 당시 충북지역 주요 전투 현황. (사진=충북지역전사 지도 캡처). 2020.06.24. [email protected]

[음성=뉴시스] 강신욱 기자 = 1950년 6월25일 북한군의 기습 남침으로 수도 서울이 적의 수중에 들어가고 한강방어선도 무너지자 국군은 북한군의 남진을 저지하는 지연작전을 펼쳤다.

충북연구원 부설 충북학연구소가 24일 '6·25전쟁 70년 충북의 기억과 의미'를 주제로 연 2020년 1차 충북학 포럼에서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전쟁사부 양영조 부장은 '충북지역 6·25전쟁의 특징과 성격'을 발표했다.

양 부장의 발제문에 따르면 1군단장 김홍일 소장은 7월4일 부대 개편 명령과 작전명령을 하달해 6일 아침부터 수도사단을 진천으로, 1사단을 음성으로 전개했다. 각각 전방에서 엄호작전 중인 6사단 19연대와 7연대를 작전 통제해 북한군을 저지하도록 했다.

2사단은 증평으로 이동하게 해 군단 예비로 확보하고 군단사령부를 청주에 설치해 연합전선이 어느 정도 골격을 갖췄다.

그렇다면 당시 남진하던 북한군과 이를 저지하려는 국군은 언제 충북에서 처음으로 맞닥뜨렸을까?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가 펴낸 '6·25전쟁 주요 전투'에 따르면 장호원을 점령한 북한군 15사단(사단장 박성철 소장) 48연대는 7월5~6일 음성 공격에 나섰다.

북한군 15사단 48연대와 맞선 국군은 6사단(사단장 김종오 대령) 7연대(연대장 임부택 중령)였다.

국군 7연대는 공백 상태인 무극리~음성 간 도로 방어에 나섰고, 6·25전쟁 초기 충북에서 북한군과의 첫 전투가 이곳에서 벌어졌다. 이른바 '무극리전투'다.
[음성=뉴시스]강신욱 기자 = 충북 음성군 음성읍 소여리 무극전적국민관광지에는 6·25전쟁 초기 음성지구 전투에서 북한군을 물리친 기념으로 음성감우재전승비가 세워져 있다. 2020.06.24. ksw64@newsis.com

[음성=뉴시스]강신욱 기자 = 충북 음성군 음성읍 소여리 무극전적국민관광지에는 6·25전쟁 초기 음성지구 전투에서 북한군을 물리친 기념으로 음성감우재전승비가 세워져 있다. 2020.06.24. [email protected] 

국군은 이 전투에서 적 270명을 사살하고 6명의 포로를 잡았다. 45㎜ 대전차포 1문, 중기관총 9정, 경기관총 1정을 노획하는 전과를 거뒀다.

이어 국군 6사단 7연대와 북한군 15사단 48연대는 음성 북부 충주시 신니면 문락리 동락마을에서 다시 만났다.

이 '동락전투'는 동락초등학교 교정에 북한군이 숙영한다는 이 학교 김재옥(여) 교사의 제보를 받은 7연대 2대대(대대장 김종수 소령)는 7월7일 무방비 상태의 북한군을 기습 섬멸해 북한군 48연대에 결정적 타격을 입혔다.

이 전투로 6사단 7연대는 대통령 부대표창과 함께 전 장병 1계급 특진의 영예를 안았다. 전쟁 발발 이후 연전연패로 사기가 떨어진 국군에게 용기와 사기를 북돋워준 쾌거였다.

최초의 승전보를 울리는데 큰 역할을 한 김재옥 교사는 민간인으로서는 대한민국 역사상 최초로 태극무공훈장을 받았다.

이 동락전투에서 국군 7연대는 적 2186명을 사살하고 포로 132명을 붙잡았다.

앞서 무극리전투의 성공적인 방어에 이은 동락전투의 대승과 함께 감우재·부용산 일대에서 벌어진 '음성지구 전투'는 국군이 충북에서 북한군과 싸운 첫 전투이자 첫 육상전 승전이었다.
[충주=뉴시스]강신욱 기자 = 충북 충주시 신니면 동락초등학교 교정에는 6·25전쟁 당시 국군에 최초의 승전보를 전한 육군 6사단 7연대 2대대 박격포 반장이었던 신용관 중위가 1968년 건립한 '김재옥교사현충탑'이 있다. 2020.06.24. ksw64@newsis.com

[충주=뉴시스]강신욱 기자 = 충북 충주시 신니면 동락초등학교 교정에는 6·25전쟁 당시 국군에 최초의 승전보를 전한 육군 6사단 7연대 2대대 박격포 반장이었던 신용관 중위가 1968년 건립한 '김재옥교사현충탑'이 있다. 2020.06.24. [email protected]

양영조 부장은 "무극리전투는 방어전에서의 승리였고, 동락리전투는 기습공격으로 일궈낸 승전이었다"고 말했다.

동락전투는 노획한 북한군의 장비 대부분이 소련제로 전쟁의 배후에 소련이 있다는 사실이 확인되면서 유엔군이 참전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반면에 소련 측은 음성지구 전투를 간략히 기술했다.

당시 북한군 군사고문단장이며 북한 주재 소련대사관이었던 블라지미르 니꼴라예비치 라주바예프의 6·25전쟁 보고서에 따르면 북한군 15사단은 장호원에 진출한 뒤 음성과 충주 공격에 나섰으나 7월8일까지 국군의 조직적인 저항과 강력한 역습을 받았다고 적고 있다.

6·25전쟁 첫 육상전 승리의 주역인 6사단 7연대는 청주에서 창설했다. 승전의 주역인 2대대 병사 대부분은 충북이 고향이었다.

7연대는 낙동강까지 밀렸던 국군이 인천상륙작전 성공으로 반격에 나서 압록강변까지 북진했을 때 압록강 물을 떠서 이승만 대통령에게 헌수했다.


◎공감언론 뉴시스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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