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초보 컬렉터가 본 이건희컬렉션…"통 큰 기증, 진심 고마워요"
한상호(대찬병원 원장)
[서울=뉴시스] 국립현대미술관 '이건희 컬렉션 특별전' 전시 장면. 사진=국립현대미술관 제공. 2021.7.30. [email protected]
[서울=뉴시스] 말문이 막혔다. 작품 한 점 한 점이 명품의 표본이었다. 온갖 매스미디어에서 최고의 뉴스메이커였던 ‘이건희컬렉션’! 직접 눈으로 확인하기 전까지는 정말 큰 기대를 안했다. 그저 이름난 작가들의 작품들을 모아놓은 거겠지 싶었다. 막상 작품들을 마주하는 순간 ‘세기의 컬렉션’이라는 말이 왜 붙었는지 금방 알 수 있었다. 작품에 대한 경외감으로 움직일 수 없을 정도였다.
사실 학교 다니는 동안 미술시간을 통해선 그림들이 어떤 교육적 가치가 있는지 몰랐다. 특히 ‘감성치가 뒤떨어지는 표본’으로 여겨지는 ‘이과 남학생’이었기에 더욱 그런지도 모른다. 하지만 수십 년이 지나 미술교과서에 나온 그림들을 다시 마주한 순간 전혀 다른 상황이 되었다. 가슴 뛸 정도의 벅찬 감흥이 밀려왔다.
미술시간에 귀가 따갑도록 들었던 ‘국민화가’ 이중섭의 작품 '황소'는 발걸음을 떼지 못하도록 감동적이었다. 어떻게 최소한의 붓질 몇 번으로 이토록 강인한 황소의 인상을 표현할 수 있을까! 최고의 인기작가 김환기의 전면점화 <산울림>은 한국적 추상의 깊이가 무엇인지 확인시켜 줬다. 더불어 또 다른 화제작 '여인들과 항아리'는 파스텔 톤의 다양한 색감으로 단아한 멋의 김환기풍의 정수를 제대로 보여준 걸작이다.
[서울=뉴시스] 박진희 기자 = 서울 종로구 국립현대미술관에서 21일부터 전시 예정인 'MMCA 이건희컬렉션 특별전: 한국미술명작'전에서 감상할 수 있는 이중섭의 '황소'. 2021.07.20. [email protected]
[서울=뉴시스] 박진희 기자 = 서울 용산구 국립중앙박물관에서 21일부터 전시 예정인 '위대한 문화유산을 함께 누리다-고 이건희 회장 기증 명품전'에서 감상할 수 있는 겸재 정선의 '인왕제색도'(국보제216호). 2021.07.20. [email protected]
특히 겸재 정선의 '인왕제색도'(국보)는 미술사적 가치와 더불어 ‘이건희 회장과 홍라희 여사의 첫 컬렉션’이었다는 에피소드를 들어서인지 감흥이 남달랐다. 풋풋했을 부부의 30대 젊은 시절 모습이 떠오르기도 하고, 얼마 전 ‘이건희컬렉션 기증전’을 찾은 홍라희 여사가 그림 앞에서 한참을 머물렀던 침묵의 감정선이 느껴지기도 했다. 그림의 진정한 가치를 다시 생각하게 하는 대목이다. 전시된 수많은 작품들이 제각각의 매력으로 하나같이 빛났다.
의학을 전공해서일까, 숫자나 논리 혹은 추론에는 큰 흥미를 느꼈어도, 미술이나 시처럼 서정적인 아름다움에는 관심이 멀었었다. 6년 전 우연찮게 한 갤러리에서 젊은 현대미술 작가의 그림을 고심 끝에 소장하기 전까진 그랬다. 그림 값을 지불하고도 며칠은 ‘너무 큰 사치나 물욕을 부린 건 아닐까 싶었지만, 그리 오래가진 않았다. 어느새 집안에 새로 들어온 작품의 유리액자를 닦는 것이 일과가 되고, 작가의 근황을 궁금해 하며, 그림속의 숭고한 흔적들에서 생활 속 큰 기쁨을 갖게 되었다.
[서울=뉴시스] 박진희 기자 = 박수근, 유동, 1954, 캔버스에 유채, 130x97cm. (사진=국립현대미술관 제공) 2021.07.20. [email protected] *재판매 및 DB 금지
이제는 웬만한 유명작가의 작품을 보며 제작연대를 얼추 구별해보기도 하고, 해외 인기작가의 동향이나 가격추이 등도 관심을 갖게 되었다. 누구나 그렇듯 초보 컬렉터 단계를 벗어나면 ‘수집병’에 걸리는 것이 문제다. 이 병은 경제적 여건이나 개인 취향과 상관없이 주변에 산재한 수많은 유혹 때문에 쉽게 낫지 못할 수 있다. 또한 작품을 모으는 것보다 어떻게 관리하고 활용할 것인가 하는 점이 더 큰 숙제이다.
대중에게 공개된 이건희 컬렉션의 규모와 범주는 개인의 상상과 한계를 넘어선 것이었다. 너무나 치밀하고 체계적인 안목과 신념으로 오랜 기간을 투자한 결과이다. 단순히 작품의 경제적 가치가 몇 조원이라는 산술적 계산은 무의미하다. 이 회장은 생전에 “문화자산 보존은 시대적 의무”라고 강조하곤 했다. 똑같은 돈으로도 무계획의 수집은 병이 될 수 있지만, 뚜렷한 신념의 결과는 무궁한 가치를 발현한다는 교훈을 보여준다. 그 결과 국보 14점과 보물 46점을 포함해 2만3000여 점을 모든 국민이 향유할 수 있게 되었다.
한 인터뷰에서 이 회장 유족들은 “(미술품 기증과 더불어) 기업의 사회적 책임과 상생 노력을 거듭 강조한 고 이건희 회장의 뜻에 따라 다양한 사회 환원사업을 지속적으로 이어가겠다”는 뜻을 밝혔다. 누구나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주창하고 권유하긴 쉬어도, 선뜻 실천하긴 힘들다. 그렇다고 꼭 규모가 엄청나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실천의지의 문제이다.
[서울=뉴시스] 박진희 기자 = 천경자, 노오란 산책길, 1983, 종이에 채색, 96.7x76cm. (사진=국립현대미술관 제공) 2021.07.20. [email protected] *재판매 및 DB 금지
그동안 이건희 회장은 삼성그룹을 글로벌 대표 기업으로 성장시킨 굴지의 기업 총수로서 이미지가 강했다. 당연히 일반 국민들에겐 ‘넘사벽’의 존재였다. 이번 아트컬렉션 기증을 계기로 이건희 회장에 대한 국민적 인상이 많이 달라졌다. 한결 친근하고 대범하며 고마운 존재감의 표상이 되었다. 일명 ‘쁘띠건희’라는 별명이 다시 생각나기도 한다.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세계관의 공인에서 ‘친절한 키다리아저씨’로 돌아온 느낌을 받게 된다.
대한민국은 경제적으로 선진국이다. 음악계는 젊은 뮤지션들의 K-POP이 세계적 대세가 되었다. 체육계 역시 올림픽에서도 항상 선두권을 차지한다. 이러한 국가적 역량에도 불구하고, 미술계는 아직 갈 길이 멀다. 특히나 국공립 미술관에 피카소 그림 한 점 없었다. 하지만 단번에 ‘굴지의 소장품 3만 점 시대’를 바라보게 되었다. 그것도 한 개인의 기부로 이룩한 성과이다. 국공립미술(박물)관 연간 작품 구입예산 기준해 최소 500년 이상의 수집품을 한 번에 받은 셈이다.
이번 ‘이건희 컬렉션 기증’의 에피소드는 우리에게 많은 과제를 남겼다. 어떻게 해야 ‘즐거운 마음으로 사회에 환원하는 기부문화’를 지속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점이다. 기부는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자발적 선행이어야 제 빛을 발한다.
숭고한 이건희 컬렉션의 기증이 더욱 값진 유산으로 제 가치를 발현하도록 다 같이 깊이 고민하는 계기로 삼아야 하겠다. 2004년 리움미술관 개관식에서 “비록 문화유산을 모으고 보존하는 일에 막대한 비용과 시간이 들어가더라도 이는 인류문화의 미래를 위한 것으로 우리 모두의 시대적 의무로 생각한다”고 한 이건희 회장의 말이 다시 되새겨진다.
■글 한상호(대찬병원 원장)
[서울=뉴시스] 한상호 대찬병원 원장
Copyright © NEWSIS.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