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가 떠난 뒤, 문화적 놀 터, 예술적 쉼터를 만들자[기고]
정준모(문화정책, 전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실장)
[서울=뉴시스] 김명원 기자 = 청와대 전경. 2022.03.16. [email protected]
[서울=뉴시스] 많은 국민이 구중궁궐 같은 청와대를 나오겠다는 역대 대통령의 공약이 허언으로 끝났을 때 모두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를 되뇌었다. 그런데 이번 대통령 당선인의 의지는 꽤 확고해 광화문은 아니지만, 용산 시대를 열 것 같다.
국민이 오매불망 청와대를 나온 ‘입 트이고 귀 열린’ 대통령을 바랬음에도 불구하고 대통령집무실의 용산 이전에 대한 반대여론이 높은 것은, 너나 할 것 없이 상대방이 하는 모든 것을 습관적으로 부정해온 진영논리에 따르는 습성 때문이기도 하지만 실은 청와대가 용산으로 옮겨간 후의 청와대의 모습, 용산의 풍경을 국민에게 제대로 설명하고 보여주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사실 대통령집무실이 떠난 뒤의 청와대에 대해 “국민에게 돌려드리겠다”는 말 외에 어떤 대안도, 청사진도 제시된 것이 없다. 그렇다면 청와대가 떠난 뒤를 한번 상상해보자. 많은 이들이 다양한 상상력을 동원해 아이디어를 내는 것은 창의적인 경연의 장을 열면 어떨까. 이를 계기로 국민통합이라는 시대의 소명을 바탕으로 문화적 총량을 모아 ‘청와대 이후’를 논한다는 것은 새로운 실험의 장인 동시에 모두에게 꿈꿀 기회가 주어졌다는 점에서 청와대 이전보다 더 의미 있는 창조적인 기회이자 국민통합의 계기가 될 것이다.
비운다는 것은, 어떤 다른 것으로, 채울 수 있음을 의미한다. 이는 대통령집무실의 용산 이전의 의미를 배가시키는 일인 동시에 오히려 그보다 더욱 의미 있는 일이 될 수도 있다. 왜냐면 비어있는 청와대와 인근을 어떻게 무엇으로 채울 것인가 하는 일은 서울이 수도로 정해진지 630여 년 만에 새로운 서울, 우리 시대의 서울을 그려볼 기회를 갖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장기적이고 넓은 시각에서 정도 1000년을 바라보는 수도 서울 재편 계획을 세워 어느 정권이건 ‘계승할 것은 끌고 가’ 우리의 서울을 새롭게 만드는 일에 착수해야 한다.
우선 그 꿈을 먼저 펼쳐보자. 국군기무사령부와 서울지구병원이 있던 지금의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을 처음 상상했던 건 27년 전 일이다. 그 후 18년이 흘러 대통령이 다섯 분이 바뀌고서야 개관했다. 그 당시 서울관을 꿈꾸던 이들이 가졌던 꿈은 경복궁과 청와대를 중심으로 북촌과 서촌을 잇는 공간에 대한민국을 상징하고, 한국의 문화예술을 표상하는 문화 벨트, 문화 콤플렉스를 만드는 것이었다. 그 꿈은 서울관에 이어 풍문여고 터에 서울공예박물관으로 실현되었고, 송현동 구 미국대사관 직원 숙소부지도 서울시로 소유권이 넘어오면서 꿈이 현실이 될 상황을 맞았다. 여기에 청와대까지 국민의 손에 쥐어진다면.
[서울=뉴시스] 송현동 부지의 국립근대미술관 건축안. 사진=정준모 제공.
오늘의 파리가 모습은 갖춘 것은 1853년 오스만의 도시계획에서 비롯되었다. 우리도 용산 이전을 우리만의 우리 시대를 상징하는 서울로 만들 기회로 삼아 선진국의 대열에 당당히 이름을 올린 대한민국 국격을 세우고 지구공동체 문화에 기여하는 문화적인 도시 서울로 도약할 기회로 거듭날 백년대계를 세워보자.
청와대에는 본관을 비롯해 영빈관, 경호실, 여민관, 춘추관을 비롯해서 관저 등 많은 건물과 녹지가 있다. 이 건축물과 정원 등의 녹지를 활용해 국립민속박물관 서울관을 건립하자. 그간 경복궁 내에 한국건축을 짬뽕한 양식의 국립민속박물관이 자리하고 있어 경복궁 복원에 걸림돌이 되어왔다. 수십 년 동안 이전을 검토했지만, 서울 시내에 적절한 부지를 찾지 못해 방황하다 세종시로 이전하기로 했다. 그러나 국립민속박물관 없는 수도 서울은 있을 수 없다는 점에서 국립민속박물관 서울관은 꼭 필요하다.
국립민속박물관은 자연스럽게 청와대의 대통령집무실 등등을 그대로 보존하고 현상을 유지하면서 우리 역사의 한 장으로 펼쳐 보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일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이 한국현대사의 아픈 상처를 담은 국군기무사령부의 부끄러운 역사를 문화와 예술로 치유하고 있는 것처럼 제왕적 대통령제의 상징인 청와대를 민속, 즉 민초들의 기층문화를 모아 연구 조사하고 전시하는 국립민속박물관으로 탈바꿈시켜 진정한 제왕적 대통령의 시대를 끝내고, 명실공히 민주국가로 진입했음을 선언하는 상징적인 사건이 될 것이다.
사실 근대국가의 성립과정을 보면 대부분의 나라가 권위적인 왕정 시대를 끝내고 국민국가, 민주국가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혁명은 필수였고, 그 결과 제왕이 살던 궁전이나 성을 미술관, 박물관으로 조성해 국민에게 개방하는 것으로 민주정을 선언적으로 공표했고 박물관 미술관은 민주정의 상징적인 표상공간이 되었다. 그런 점에서 청와대의 국립민속박물관 서울관 건립은 경제적으로 선진국에 진입한 대한민국이 정치적으로 민주화를 이루어 지난 했던 혁명이 완성되었다는 사실을 널리 공표하는 계기가 될 것이 분명하다. 이때 청와대 부속 건물 중 하나를 서민들이 사랑했던 민화관으로 조성하는 것도 청와대가 시민의 품에 돌아왔음을 상징하는 멋진 일이 될 것이다.
청와대 부속 건물로 체육시설인 연무대는 K-POP을 연중무휴로 공연하는 공연장으로, 연풍문과 여민관을 한국문화의 창, 한국문화상품을 판매하는 전문점으로 활용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한국의 영화, 드라마, 도서 등등 한국 관련 문화 상품을 판매한다면 한류를 즐기는 세계인들의 성지가 될 것이다.
[서울=뉴시스]'청와대 일대 지도'. 정준모 제공.
청와대 사랑방과 청와대 수송부도 제법 넓어 현재 경복궁 내에 자리한 국립고궁박물관의 이전이 가능하다. 사실 경복궁 복원계획이 지지부진한 이유 중 하나는 국립민속박물관 이전문제도 있지만, 경복궁 복원을 책임진 문화재청 소속의 국립고궁박물관이 경복궁 내에 있기 때문이다. 현 국립고궁박물관은 원래 중앙청을 정부청사로 쓸 당시 ‘후생관’으로 사용할 목적으로 1979년 경복궁 마방터에 세워진 ‘시멘트 한옥’이다. 경복궁 복원을 위해서는 철거가 필수적인 건물이라서 국립민속박물관과 국립고궁박물관이 각각 청와대와 수송대 터로 이전한다면 경복궁 복원의 걸림돌이 사라져 경복궁을 제대로 살려낼 수 있다.
서울시로 소유권이 이전된 송현동 부지를 지상에는 공원을 조성하고, 일부 지상과 지하를 활용해 국립근대미술관을 건립한다면 청와대의 국립민속박물관, 국립고궁박물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과 금호미술관, 서울공예박물관, 선재미술관과 이어지고 인사동으로 연결되면서 이 일대는 명실공히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는 문화 콤플렉스, 뮤지움 단지로 자리하게 될 것이다.
국립근대미술관은 우리가 일제의 압제에서 벗어나 대한민국을 건국할 당시 세워졌어야 할 기관이다. 그러나 미술문화란 것이 단순하게 감상의 대상이라는 일차원적인 사고에 머물렀던 인식 때문에 나라의 문화적 상징이자 예술적 총량이며 근대정신을 표상하는 근대미술관 건립 시기를 놓치고 말았다.
그리고 근대를 건너뛰어 현대미술관을 설립해 근대를 역사의 공백으로 남겨둔 채이다. 국립근대미술관은 선진국 대한민국의 필수 시설이다. 차제에 국립현대미술관등 국립기관과 이건희가 기증 문화재·미술품 중 ‘근대미술’을 따로 모아 한국 근대사를 바로 쓰고 세우는 국립근대미술관의 건립이 꼭 필요한 이유다. 시대에 뒤떨어진 백과사전식 박물관을 ‘국립융복합뮤지엄’이란 이름으로 국민을 속이려고 하지말고 말이다.
[서울=뉴시스] 조수정 기자 =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이 10일 대통령 비서실장과 정무수석 예방 자리에서 청와대 이전 문제, 광화문 정부서울청사 집무실 등과 관련한 생각을 전한 것으로 알려졌다. 사진은 11일 서울 종로구 북악산 앞의 청와대(위). 2022.03.11. [email protected]
우리는 예로부터 격을 갖춘 잘 노는 민족이었다. 금단의 땅 청와대가 열리고 그 안에서 문화와 예술, 미술과 공예, 음악을 듣고, 누워 책을 읽고, 함께 뛰고 놀 격조 있는 시민들의 모습은 상상만 해도 가슴이 뛴다. 선진국을 향해 그간 모두 쉴 틈 없이 달려온 국민에게 청와대를 비워 ‘노는 것다운 놀 터’를 제공해주는 일. 어쩌면 대통령집무실이 용산으로 이전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고 가치 있는 윤석렬 정부의 과업일지도 모른다. 청와대가 떠난 뒤를 우리 모두 함께 그려보자.
[서울=뉴시스]정준모(문화정책, 전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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