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고무줄 잣대에 신뢰 잃은 밸류업
[서울=뉴시스] 강수윤 기자 =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이 없었다. 기대를 모은 한국거래소의 야심작 '코리아 밸류업 지수가' 공개됐지만 시장과 투자자들의 눈높이를 맞추지 못한 미흡한 결과물에 '밸류업'이 아니라 '밸류없'이란 비아냥이 나오며 반응은 싸늘하다.
국내 증시 저평가를 해소하고 상장사의 낮은 기업가치를 끌어올리기 위해 만든 밸류업 지수가 예상과 달리 모호한 선정 기준과 구성 종목에 대한 형평성 논란이 불거지자 거래소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다. 정은보 거래소 이사장은 올해 2월 취임 당시 밸류업 지원을 최우선 과제로 내세웠다. 거래소는 태스크포스(TF)를 꾸리고 기업가치 제고 계획 공시를 위한 가이드라인을 마련했다. 또 주요 상장사와 외국계 증권사 등과 만나 밸류업 프로그램의 참여를 독려하는 등 적극적인 행보를 보였다.
그러나 거래소가 7개월 만에 내놓은 밸류업 지수는 아쉬움이 많다. 5단계 스크리닝을 통해 공정하게 종목을 선별했다는 밸류업 지수는 당초 취지를 살리지 못하고 방향성을 상실한 모습이다. 100종목으로 구성된 밸류업 지수는 기업가치 제고 계획 공시에 적극적인 KB금융 등 대표 금융주나 저평가된 고배당 종목은 빠지고, 주주환원에 인색해 투자자들의 원성을 샀던 기업이 다수 편입되면서 도입 취지를 무색케했다.
수익성을 충족하지 못한 SK하이닉스가 시장 영향력을 이유로 '특례제도'를 통해 지수에 편입된 것도 원칙을 어긴 '고무줄 잣대'란 비판이 나왔다. 지수 발표 당시 편입 특례 요건에 대해 아무런 설명이 없다가 논란이 커지자 뒤늦게 해명하는 거래소의 아마추어적인 대응에 시장의 의구심은 오히려 커지며 신뢰를 떨어뜨렸다. 거래소는 질적 요건과 비중상한제를 도입해 차별화를 뒀다고 하지만, 코스피200과 코스닥150에 이미 종목이 편입돼 있어 밸류업의 뚜렷한 색깔을 찾기 어렵다는 반응이다.
미래지향적 판단 근거인 기업들의 밸류업 공시 참여율이 낮아 첫 종목 선정에 어려움이 있었을 것이란 고충은 이해된다. 하지만 과거 지향적인 데이터 의존해 성장성과 현재 시장 상황을 대변하지 못한 모호한 지수로 시장의 혼란을 키운 것은 거래소의 안일한 준비와 정책적 빈틈이 자초한 측면이 크다.
첫 술에 배부를 수는 없다. 지수 출범부터 여러 논란으로 힘이 빠졌지만 밸류업은 계속돼야 한다. 거래소도 지수에 대한 눈높이가 시장과 달랐다는 점을 인정하고 시장의 의견을 즉각 반영해 연내 구성 종목 변경 가능성을 열어뒀다. 밸류업 지수를 타이트하게 관리하겠다는 의지를 내비친 점은 긍정적이다.
현재 거래소 밸류업 지원부서는 다음 달 초 밸류업 지수를 기초로 한 상장지수펀드(ETF) 출시를 앞두고 자산운용사와 적극적으로 소통하고 있다. 또 최근 기업 공시 담당자들을 대상으로 밸류업 공시 실무 교육을 두 차례 진행했으며 예상 보다 많은 회사들이 관심을 보였다고 한다. 거래소는 기업들이 공시 준비과정에서 겪는 어려움을 상담해주고 제도적 지원 부분도 협의하고 있다. 대기업을 중심으로 4분기 공시를 준비하고 있으며 연내 공시 기업들이 늘어날 전망이다. 따라서 올해 보다 내년 6월 정기 리밸런싱에서 상당수 공시 기업들의 종목 변경이 이뤄질 가능성이 크다.
거래소가 ETF가 출시되기 전 업계의 의견을 반영해 상품화에 차질이 없도록 지수의 안정성을 확보해 주는 것이 바람직하다. 무엇보다 기업가치 제고 계획에 따라 기업들이 적극적인 주주환원 등 실질적으로 밸류업 활동을 이행하는 지가 밸류업 구성 종목에 반영되고, 중요한 요소로 고려돼야 한다.
밸류업 지수의 궁극적 목표는 기업이 투자자들과 지속 소통하며 신뢰를 제고해 자본시장을 '레벨업'하는 것이다. 기업들은 주주환원 강화와 함께 경쟁력 제고와 체질 개선으로 스스로 가치를 올리기 위해 노력하고, 거래소는 공정하고 투명한 지수와 일관된 정책 지원으로 상장사의 자발적 참여를 유도해야 한다. 장기적으로는 밸류업 프로그램이 투자자들에게 신뢰받고 새로운 동력을 확보할 수 있는 국내 증시 도약의 촉매제가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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