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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름사니, 대명창, 그리고 사랑꾼…'이날치전'[이예슬의 쇼믈리에]

등록 2024.11.16 09:00:00수정 2024.11.16 09: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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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극 '이날치전' 리뷰

[서울=뉴시스] 창극 '이날치전' 공연 모습. (사진=국립극장 제공) photo@newsis.com *재판매 및 DB 금지

[서울=뉴시스] 창극 '이날치전' 공연 모습. (사진=국립극장 제공) [email protected] *재판매 및 DB 금지

[서울=뉴시스] 이예슬 기자 = "태어나보니 양반, 태어나보니 머슴, 태어나보니 첩실, 태어나보니 백정, 태어나보니 무당. 누가 정했나 염병할 신분, 누가 없앨까 염병할 신분, 누가 누가 없애나 염병할 신분." (날치운명가 '태어나보니' 중)

국립창극단 신작 '이날치傳(전)'이 서울 장충동 국립극장 달오름극장에서 공연 중이다. 조선 후기 8명창 이경숙(1820-1892)의 삶을 소재로 한 팩션(faction) 창극이다. 본명보다 널리 알려진 '날치'라는 이름은 날쌔게 줄을 잘 탄다고 해서 붙여졌다. 노비로 태어나 어름사니(줄광대)로 이름을 날리다 수행고수를 거쳐 명창의 반열에 올랐다.

극은 첫 장면부터 관객의 심장을 들었다 놨다 한다. 국가무형유산 줄타기 이수자 남창동이 줄광대 시절 날치 역을 맡아 묘기를 펼친다. 한 치(약 3㎝) 폭의 줄 위에서 백 텀블링까지 선보이자 관객석에서는 박수가 터져나온다.

날치와 주인댁 아가씨 '유연이'는 사랑하는 사이다. 이를 주인마님에게 들켜 사당패에 팔려 연이와 헤어진 것이 날치 인생 천추의 한이자 차별받는 세상에서 사람대접 한 번 받아 보리라 분투하는 계기가 됐다.

이날치가 태어난 조선 후기는 신분제가 유지되고는 있었지만 사대부의 몰락, 경제적 부를 얻은 중인층의 세력 확장 등으로 신분제 사회가 균열되던 시기였다.

[서울=뉴시스] 창극 '이날치전' 공연 모습. (사진=국립극장 제공) photo@newsis.com *재판매 및 DB 금지

[서울=뉴시스] 창극 '이날치전' 공연 모습. (사진=국립극장 제공) [email protected] *재판매 및 DB 금지

날쌔게 줄을 잘 탄다고 장안에 소문이 자자했던 이날치가 소리 광대가 되겠다고 마음 먹은 이유도 소리를 잘하면 벼슬을 준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연이와 맺어지기 위해 스스로 천민이라는 신분의 굴레를 벗어던질 결심을 한 것.

작품에는 춘향가·적벽가·심청가 등 판소리의 주요 눈대목이 두루 녹아 있다. 특히 통인청대사습놀이 장면에서 조선 후기에 손꼽힌 명창들의 소리 특징과 더늠(명창이 자신만의 창법과 개성으로 새롭게 짜거나 다듬은 대목)을 녹여냈다.

'수궁가' 중 '토끼기변'은 송우룡, '춘향가' 중 '천자뒤풀이'는 김세종, '적벽가' 중 '동남풍 비는 대목'은 박만순', '심청가' 중 '심봉사 눈 뜨는 대목'은 박유전의 더늠으로 들을 수 있다. 이들 넷의 실력 겨루기는 마치 음악 오디션 프로그램처럼 연출했다. 또 박만순과 이날치가 광통교 소리대결에서 함께 '적벽가' 중 '불 지르는 대목'을 부르는 모습은 마치 힙합 서바이벌 '쇼미 더 머니'를 방불케 한다.

클라이막스는 흥선대원군 이하응과 그의 형 이최응 앞에서 부른 '심청가' 중 '심청이 물에 빠지는 대목'이다. 쉽게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이최응의 마음을 움직이면 이천냥을 얻고, 그렇지 못하면 목숨을 내놔야 한다. 14일 이날치를 연기한 김수인은 이 대목을 처절하게 부르며 이날치의 한스런 인생을 토해내듯 소리했다.

[서울=뉴시스] 창극 '이날치전' 공연 모습. (사진=국립극장 제공) photo@newsis.com *재판매 및 DB 금지

[서울=뉴시스] 창극 '이날치전' 공연 모습. (사진=국립극장 제공) [email protected] *재판매 및 DB 금지

"초마(치마)폭을 무릅쓰고 뱃전으로 우르르 만경창파 갈매기 격으로 떴다 '물에가 풍'"

목숨을 건진 날치는 말한다. "줄타기 끝이 살판이잖아요. 줄광대가 살판으로 끝나잖아요. 허니 소리광대도 살판으로 끝을 맺어야죠. 죽을판을 살판으로 바꿔 놓아야지요."

이날치는 왕 앞에서 노래하는 '어전광대'가 되고, 무과 선달의 직계까지 제수받지만 떠나기로 결심한다. 연이와 살기 위해서다. 이날치는 이름이 드높은 데 비해 말년 행적에 관해 알려진 사실이 드문데, 창극에서는 이를 사랑을 찾아 떠난 것으로 설정했다.

연이를 데려오면 될 것을 굳이 왜 본인마저 자취를 감추었는가에 대해서는 연이가 머리에 쓴 미사포와 프로그램북을 자세히 보지 않고는 관객들이 알아채기 어려울 듯 하다. 당시는 한참 천주교도에 대한 박해가 심하던 때였다.

[서울=뉴시스] 창극 '이날치전' 공연 모습. (사진=국립극장 제공) photo@newsis.com *재판매 및 DB 금지

[서울=뉴시스] 창극 '이날치전' 공연 모습. (사진=국립극장 제공) [email protected] *재판매 및 DB 금지

공연은 21일까지.

★공연 페어링 : 한산소곡주

'이날치전'은 주요 판소리 눈대목은 물론이고 줄타기, 고법, 탈춤, 버나 등 우리 전통예술을 한 자리에 모은 '버라이어티 쇼'라고 할 수 있다. 이날치의 이름에서 밴드명을 따온 '이날치밴드'의 히트곡 '범 내려온다'를 부르면서는 사자춤도 등장한다.

자칫 볼거리와 들을거리가 많아 과하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있었는데, 여러 재미가 개성을 잃지 않고 조화롭게 섞여 들었다.

[서울=뉴시스] 창극 '이날치전' 공연 모습. (사진=국립극장 제공) photo@newsis.com *재판매 및 DB 금지

[서울=뉴시스] 창극 '이날치전' 공연 모습. (사진=국립극장 제공) [email protected] *재판매 및 DB 금지

비슷한 개성을 가진 술을 생각하니 '한산 소곡주'가 떠올랐다. 한 번 맛보면 맛이 좋아, 술술 넘어가 일어나지 못한다 하여 '앉은뱅이 술'이라는 별칭이 붙은 술이다.

첫 맛은 달고 끝 맛은 구수한데, 산미가 적절해 단 술이라도 질리지 않도록 해준다.


◎공감언론 뉴시스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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