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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상금 올린다고 위상 오르나, 시의원 한마디에 흔들리는 청주고인쇄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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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2021-04-11 12:08:04
시, 전국 유일 고인쇄박물관 명칭 변경 논란
현대적 의미 변경 땐 근현대인쇄전시관 혼돈
공모 전 운영위원회 패스…시의원이 전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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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 고인쇄박물관 *재판매 및 DB 금지

[청주=뉴시스] 임선우 기자 =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직지'를 기념하기 위해 지어진 충북 청주고인쇄박물관의 위상이 흔들리고 있다.

난데없이 전국 유일의 고인쇄박물관 명칭을 변경하고자 시민 공모를 진행한 데 이어 직지 위상을 고려한답시며 공모전 상금을 100만원에서 300만원으로 올리기까지 했다.

시의원들의 말 한마디에 갈팡질팡하는 청주시 행정의 현주소다.

11일 시에 따르면 3월22일부터 4월23일까지 진행 중이던 '청주고인쇄박물관 명칭 변경 공모'가 4월8일~5월7일로 갑자기 변경됐다.

당선작 포상금을 30만~100만원에서 50만~300만원으로 올리기 위해서다. 최근 청주시의원이 다른 공모전 시상금을 비교하며 "고인쇄박물관의 위상이 이보다 못하다는 것이냐"고 지적한 데 따른 '발 빠른' 조치다.

시는 이번 공모에 앞서 학계 전문가로 구성된 운영위원회도 열지 않았다. 수년 전부터 간헐적으로 명칭 변경에 대한 의견이 있었으나 공모전을 진행하게 된 결정적 배경은 지난해 말 시의회 행정사무감사에서의 소관 상임위원회 요구였다.

이를 곧바로 받아들인 청주시는 "박물관의 높아진 위상을 반영하고, 14세기 직지와 금속활자 인쇄술이 21세기 미디어 혁명을 이끈 인터넷과 반도체의 전신으로 그 맥을 이어왔다는 가치까지 포함하는 새로운 명칭으로 거듭나기 위해 명칭을 공모한다"는 공고문을 냈다.

공모 내용으로는 '직지를 포함한 인쇄술 발달의 가치(대중에게 무제한의 지식 보급이 가능하게 됐으며, 현재의 미디어 혁신이 이뤄진 발판이 됐음)와 앞으로 박물관이 나아가야 할 방향까지 담은 명칭'이라고 기술했다.

문구로만 봤을 땐 도무지 무슨 의도인지 이해하기 어렵다. 직지와 반도체의 연관성, 그 중심에 고인쇄박물관이 있다는 발상도 해괴하다.

담당 부서는 "고인쇄박물관 명칭 중 '옛 고(古)' 자가 지니는 의미 탓에 외연적 확장에 한계가 있다"며 "2007년 청주고인쇄박물관 주변이 '직지문화특구'로 지정돼 근현대인쇄전시관과 금속활자전수교육관이 들어서는 등 보다 미래지향적 가치로 나아갈 필요가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이는 직지와 고인쇄 자체가 지니는 본연의 가치를 간과한 1차원적 발상이 아닐 수 없다.

1377년 고려 우왕 3년 청주 흥덕사(소실)에서 간행한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약칭 직지)은 현존하는 세계 최고(最古) 금속활자본이다. 독일 구텐베르크의 '42행 성서'보다 78년, 중국의 '춘추번로'보다 145년이나 빠르다.

직지는 2001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됐다. 지금까지 내려오는 금속활자본(책) 중 가장 오래된 가치를 인정받은 결과다. 직지가 곧 '최고(最古)'이자 '고인쇄'의 대명사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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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고인쇄박물관은 직지 덕분에 건립된 박물관이다. 1985년 청주 운천동 택지개발지에서 흥덕사 유물이 대거 출토된 뒤 1992년 그 일대에 지어졌다. '고인쇄' 박물관이라는 이름도 당시 국내 최고 권위의 서지학자가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국내에 고대~중세 인쇄문화를 아우르는 박물관은 이곳이 유일하다. 신라·고려·조선시대의 목판본, 금속활자본, 목활자본 등의 고서와 흥덕사지 출토유물, 인쇄기구 등 650여점을 보관·전시하는 전무후무한 '고인쇄 전문박물관'이다.

시는 직지와 고인쇄박물관을 토대로 지난 2007년 정부로부터 '직지문화특구' 지정을 받았다. 2013년 금속활자전수교육관을, 2014년 근현대인쇄전시관을 일대에 조성했다. 내년에는 유네스코 국제기록유산센터를 준공한다.

시는 외연적으로 확장하는 직지문화특구를 널리 알리기 위해 고인쇄박물관 명칭을 미래지향적으로 바꾼다는 구상이다.

한 직지 전문가는 "직지문화특구 안에 시대별 인쇄문화를 나눠 고인쇄박물관과 근현대인쇄전시관이 있는 것"이라며 "고인쇄박물관을 현대적 의미로 바꾼다면 근현대인쇄전시관과 중복되는 오류를 범하게 된다"고 지적했다.

한 대학 교수는 "'고인쇄(古印刷)'라는 말에는 직지를 찍어낸 자랑스러운 역사가 담겨있다"며 "박물관 콘텐츠는 그대로이면서 명칭만 미래지향적으로 바꿨다간 고인쇄문화의 가치도 흔들리게 될 것"이라고 꼬집었다.

이에 대해 시 관계자는 "지난해 행정사무감사에서 소관 상임위원회의 명칭 변경 요구가 있었다"며 "일단 시민 의견을 들어보고자 하는 취지"라고 전했다.

29년 만에 명칭 변경이 시도되는 청주고인쇄박물관의 시민 공모전 1등 상금은 100만원에서 300만원으로 올랐다. '직지의 위상'을 지적한 시의원 의견을 전격 수용한 금액이다. 상금을 올리면 직지의 위상이 오르고, 고인쇄박물관이 미래지향적으로 갈 수 있는지 의문이다.

이번 논란은 고인쇄 문화를 옛것으로만 인식하는 데에서 비롯됐다. 상금 액수가 아닌, 코로나19를 핑계로 전문가 운영위원회도 열지 않고 시의원들의 말만 들어 고유의 옛것을 바꾸려는 청주시도 문제다.

추후에 운영위원회가 명칭 변경에 부정적 의견이라도 낸다면 공모전 총상금 490만원은 또 세금 곳간에서 날아가게 된다.

이번 공모전을 추진하는 청주시의 수장은 서울대에서 동양사학을 전공하고, 문화재청에서 근무했던 한범덕 시장이다. 옛것 자체의 가치를 누구보다 잘 아는 역사 전문가다. 그는 취임 후 옛것의 가치를 강조하며 옛 청주역사를 시청 옆에 복원하기도 했다.


◎공감언론 뉴시스 imgiza@news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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