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대로 한글]이윤재·최현배·신현모…말글 지키다
일본제국은 대동아 전쟁을 일으키고 식민통치를 더욱 강화한다. 일제는 배달겨레 정신이 강한 사람을 사상범으로 분류하고, 그들을 탄압하기 위하여 1941년 ‘조선사상범 예방 구금령’을 공표하여 민족 운동이나 민족 계몽 운동을 하는 한국인을 마음대로 구속할 수 있도록 하였다.
우리 겨레를 없애려고 학교에서 우리 말글을 배우고 쓰지 못하게 했다. 배달겨레말을 못 쓰게 해야 우리 겨레 얼이 사라지고 완전한 일본인으로 만들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른바 ‘내선일체’ 정책을 펴면서 우리 조선사람들을 전쟁터로 보내 목숨까지 빼앗았다.
이런 분위기에서 일제는 1942년에 배달겨레말 사전을 만드는 조선어학회 회원들과 그 지원자들을 일본에 반역하는 사상범으로 잡아다 감옥에 가둔 것이다.
일제는 애국선열들을 감옥에 가두고 “물 먹이기, 공중에 달고 치기, 비행기태우기, 메어차기, 난장질하기, 불로 지지기, 개처럼 사지로 서기, 얼굴에 먹으로 악마 그리기, 동지끼리 서로 빰치게 하기” 들과 같은 온갖 모욕과 고문에 한징, 이윤재 두 분은 감옥에서 돌아가셨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연합국에 항복해서 그 때까지 감옥에 있던 이극로, 최현배, 정인승, 이희승 선생도 풀려나게 되었다. 그 때 출옥 광경을 목격한 이근엽(전 연세대 교수)님의 증언에 따르면 한 분은 들것에 실려 나오고, 한 분은 다리에 상처가 있어 쩔뚝거리고 나왔는데 그 모습이 너무 처참하였다고 한다. (한글새소식 제463호 16쪽)
치안유지법으로 검거한 이들에 대한 재판은 함흥지방재판소에서 9회에 걸쳐 진행되어 1945년 1월에 최종 선고가 이루어졌다. 유죄가 선고된 자에게는 “고유 언어는 민족의식을 양성하는 것이므로 조선어학회의 사전편찬은 조선민족정신을 유지하는 민족운동의 형태이다”라는 결정문이 내려졌다. 몇 분이 항고했으나 1945년 3월 15일 기각되었다.
일본 강점기 때에 수많은 지식인들이 일본제국에 무릎을 꿇고 그 앞잡이가 되었으나 조선어학회 회원들은 끝까지 겨레 얼과 말을 지키고 빛내려고 애썼다. 이런 분들이 있었기에 우리가 광복 뒤 이렇게 잘 사는 나라를 만들 수 있었고, 세계를 이끌 꿈을 꿀 수 있게 된 것이다. 이 일은 나라 안팎의 어떤 광복 운동보다도 귀중한 광복운동이고 독립운동이었다.
그 때 이 분들이 목숨까지 바치며 우리 말글을 지키고 갈고 닦지 안했다면 광복 뒤에 중국 한문이나, 아니면 일본 말글로 말글살이를 하거나 미국의 영어 나라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우리 말글로 말글살이를 할 수 있게 된 것은 이 분들 은덕이다. 이 분들 덕택으로 대한민국을 세운 뒤에 우리 말글로 교육하고 말글살이를 해서 50여 년 만에 우리 문화가 꽃피어서 한류라는 이름으로 온 세계에 뻗어 나가고 있으니 고맙고 은혜로운 일이다. 그런데 그 업적과 정신을 알리고 이어서 나라를 일으키려는 노력을 안 하니 부끄러운 일이다.
◇이윤재(李允宰)
1888년(고종 25)∼1943년. 항일독립투사․국어학자․사학가. 호는 환산(桓山)․한뫼. 경상남도 김해 출신. 김해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김해 합성학교(合成學校), 계성학교(啓聖學校), 마산의 창신학교(昌信學校)․의신여학교(義信女學校)에서 교편을 잡다가 평안북도 영변의 숭덕학교(崇德學校)교사로 재직중 3·1운동에 관련되어 평양 감옥에서 3년간 옥고를 치렀다. 1921년 중국에 건너가 북경대학 사학과에서 수업한 뒤 1924년 귀국하여 정주의 오산학교(五山學校)를 거쳐 협성(協成)․경신(儆新)․동덕(同德)․배재(培材)․중앙(中央) 등의 학교에서 교편. 1927년 계명구락부(啓明俱樂部)의 조선어사전 편찬위원이 되었고, 민족정신의 보전․계승을 위한 잡지 ‘한빛’을 편집, 발행. 1929년 조선어연구회․조선어사전편찬위원회의 집행위원, 1930년 한글맞춤법통일안의 제정위원이 되어 국어통일운동의 중진으로 활동. 1931년 연희전문학교에서 강의를 맡았으며, 이해부터 4년간 여름마다 동아일보사․조선일보사 등에서 벌인 하기한글강습회 강연차 지방을 순회. 1932년에는 조선어학회의 기관지 ‘한글’의 편집 및 발행 책임을 맡았으며, 1934년에는 진단학회(震檀學會)의 창립에 참여. 이듬해 감리교신학교에서 강의, 조선어표준어사정위원회의 사정위원이 되고, 1936년 조선어사전편찬위원회의 편찬전임집필위원. 1937년 수양동우회사건(修養同友會事件)에 관련되어 서대문 감옥에서 약 1년반 옥고를 치른 뒤, 1939년 대동출판사(大同出版社)에 근무. 1941년 기독신문사 주필로 일하면서 한글보급과 우리말사전 편찬에 주력하다가, 1942년 조선어학회사건으로 동지들과 함께 홍원경찰서에 붙잡혀 함흥형무소에서 복역 중 1943년에 옥사. 1947년 유고 ‘표준한글사전’을 사위 김병제가 간행했다. 이는 조선어학회에서 발표한 「한글맞춤법통일안」과 「사정한 조선어표준말모음」을 기준삼아 처음으로 엮은 것이다.
◇한징(韓澄)
1887년(고종 24)∼1944년. 한글학자․독립운동가. 호는 효창(曉蒼). 서울 출신. 1922년부터 시대일보(時代日報)․중외일보(中外日報)․조선중앙일보(朝鮮中央日報)의 기자로 근무하며 민족언론창달에 노력하였고, 1923년에 대종교(大倧敎)에 입교하였다. 1930년 일제의 조선어말살정책에 항의하여 조선어학회에 가입하였으며, 이윤재(李允宰) 등과 함께 조선어사전을 편찬하기로 하고 조선어사전편찬전임위원이 되었다. 사전을 편찬하기 위하여는 무엇보다 선행되어야 하는 사업이 한글의 맞춤법통일과 표준어의 제정이었다. 그리하여 1933년 10월 「한글맞춤법」을 제정, 공포하고 곧이어 표준어제정에 들어갔다. 이때 조선표준어사정위원회 위원이 되어 사정심사에 참여하였고, 16명의 수정위원 또는 제안설명위원이 되어 표준어제정에 노력하였다. 그 뒤 사전편찬에 참여하여 활동하던 중 1942년 10월 조선어학회사건으로 붙잡혀 홍원경찰서에서 일본경찰의 악독한 고문과 심문을 받다가 1944년 2월 이윤재와 같이 옥사하였다.
◇이극로(李克魯)
1893년∼1978년. 국어학자․정치인. 호는 고루. 본관은 전의(全義). 경상남도 의령 출신. 1920년 중국 상해 동제대학(同濟大學) 예과를 마치고 1927년 독일 베를린대학 철학부를 졸업하였다. 1929년 조선어사전(뒷날 조선어학회의 조선말큰사전) 편찬 집행위원, 1930년 한글맞춤법 제정위원, 1935년 조선어 표준어 사정위원, 1936년 조선어사전 편찬 전임위원 및 조선어학회 간사장을 지냈다. 1942년 10월 1일 ‘조선어학회사건’으로 검거되어 징역 6년을 선고받고 함흥형무소에서 복역하다가 1945년 광복을 맞아 풀려났다. 1946년 건민회(建民會) 위원장을 지냈고, 1948년 4월 ‘남북 제정당․사회단체 연석회의’ 참석차 평양에 갔다가 잔류하여 북한에서 활동하였다. 1948년 9월 북한 제1차 내각의 무임소상, 1949년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조국전선) 중앙위원회 의장 및 과학원 후보원사, 1953년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 1962년 과학원 조선어 및 조선문학 연구소장, 1966년 조국전선 중앙위 의장, 1970년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위원장 및 박사, 1972년 양강도 인민위원회 부위원장 등을 지냈다. 한편, 1966년 이후 본격화한 북한의 언어규범화운동인 ‘문화어운동 사업’을 주관하였으며, 논문으로 「조선어조 연구」 등을 남겼다. 월북 전 주요논저로 「조선어 임자씨의 토」(1935)․「조선어 단어성립의 분계선」(1936)․ 「짓말에 대하여」(1937) 등과 ‘실험도해 조선어 음성학’(1947), ‘고투 40년’(1947) 등이 있다.
◇최현배(崔鉉培)
1894년(고종 31)∼1970년. 국어학자․국어운동가․교육자. 호는 외솔. 본관은 경주(慶州).경상남도 울산 출신. 서당에서 한문을 배운 뒤 고향의 일신학교에서 신식 교육을 받고 1910년 상경하여 한성고등학교(漢城高等學校: 뒤에 경성고등보통학교로 개칭됨.)에 공부할 때 주시경에게 한글을 배운다. 일본 히로시마고등사범학교(廣島高等師範學校)문과에 입학하여 1919년 졸업하고, 1922년 4월에 일본 경도제국대학(京都帝國大學)문학부 철학과에 입학, 교육학을 전공하여 「페스탈로치의 교육학설」이라는 논문으로 1925년 졸업, 계속하여 그 대학원에서 수학하였다. 1926년 4월 연희전문학교 교수로 취임하여 1938년 9월 흥업구락부사건으로 파면당할 때까지 재직하였다. 1941년 5월 연희전문학교에 도서관 직원으로 복직하였으나, 그해 10월 조선어학회사건으로 사임, 1945년 광복까지 4년간의 옥고를 치렀다. 1945년 9월부터 1948년 9월까지, 1951년 1월부터 1954년 1월까지 문교부 편수국장에 두 차례 재직하였다. 1954년 연희대학교 교수로 취임하여 문과대학 학장과 부총장을 역임하고 1961년 정년퇴임으로 연세대학교 명예교수로 추대되었다. 1964년 3월부터 2년간 부산 동아대학교 교수로 재직한 일이 있다. 1954년 학술원 회원에 뽑혔고 이어 임명회원․부회장을 맡았다. 1949년 한글학회 이사장에 취임하여 20년간 계속하여 한글학회를 이끌어왔으며, 1949년 한글전용촉진회 위원장, 1957년부터 세종대왕기념사업회 이사․부회장․대표이사 등으로 국어운동의 중심인물로 활동하였다. 지은 책은 조선민족갱생의 도(1926). 우리말본(첫째매, 1929). 중등조선말본(1934). 시골말 캐기 잡책(1936). 중등교육 조선어법(1936). 우리말본(분책, 1937). 한글의 바른길(1937). 한글갈(1940). 글자의 혁명(1947). 중등말본(1948). 우리말 존중의 근본 뜻(1951). 한글의 투쟁(1950). 나라사랑의 길(1958). 한글 바로 적기 공부(1961). 고친 한글갈(1961). 나라 건지는 교육(1963). 한글 가로글씨 독본(1963). 배달말과 한글의 승리(1966). 한글만 쓰기의 주장(유고, 1970)들이 있다.
◇이희승(李熙昇)
1896년∼1989년. 경기도 광주(지금의 경기도 의왕시 포일동) 출생. 1908년 관립 한성외국어학교 영어부에 입학하였으나, 1910년 경술국치로 이 학교가 폐교되어 3 년만에 마치고 1911년 9월까지 경성고등보통학교에서 수학하고 1912년부터 1913년까지 양정의숙(養正義塾)에서 법학을 전공. 1914년 사립 신풍학교(新豊學校) 교원으로 취임하고, 이어 1918년 사립 중앙학교 4년을 졸업. 1923년 전문학교 입학 검정 시험에 합격하여, 1925년 연희전문학교 수물과(數物科)를 졸업하고 이어 1927년 경성제국대학 예과를 수료한 다음, 1930년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조선어학 및 문학과를 졸업. 같은 해 조선어학회에 입회하여 간사(이사)와 간사장(대표간사) 등을 역임하면서 이 회에서 추진하고 있던 ‘한글맞춤법통일안’(1933년 완성)과 ‘표준어사정(標準語查定)’(1937년 완성) 사업에 참여. 한편, 1930년 경성사범학교 교유(敎諭), 1932년 이화여자전문학교 교수직에 취임하여 국어학 및 국문학을 강의하다가, 1942년 10월 1일 조선어학회사건으로 검거되어 함경남도 홍원경찰서와 함흥형무소에서 1945년 8월 17일까지 3년 동안 복역. 광복 후 1946년 10월 22일의 학제개편으로 국립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국어국문학과 교수. 서울대 퇴임 뒤 1965년 9월 대구대학 대학원장에 피임되어 학계에 복귀한 뒤, 1966년부터 1969년까지 성균관대학교 대학원장을 역임하였으며, 1971년부터 1981년까지 단국대학교 부설 동양학연구소 소장직을 맡았다. 한편, 1969년부터 19년 동안 한국어문교육연구회 회장으로서 국한문혼용 운동에 앞장서 한글학회와 맞섰다.
◇김윤경(金允經)
1894년∼1969년. 호는 한결. 경기도 광주 출신. 14세 때까지 고향에서 한학을 수학하다가 신학문을 닦기 위해 상경하여 우산학교(牛山學校)에 입학하였으나, 그 뒤 의법학교(懿法學校)로 전학하여 1910년 고등과를 수료하고 다시 청년학원(靑年學院)으로 옮겨 1913년에 졸업. 청년학원에서 주시경(周時經)의 한글(국어학)을 교육받고 크게 감화를 받았다. 1913년부터 마산 창신학교(昌信學校) 고등과 교사로 있으면서 국어․역사․수학을 가르치다가, 1917년 연희전문학교(延禧專門學校) 문과에 들어갔다. 이때 연희전문학교 학생청년회가 주동이 되어 서울시내 고등보통학교․전문학교 학생 1천여 명이 조선학생의 친목과 단결을 위해 조직한 조선학생대회(朝鮮學生大會)의 회장을 맡는 등 학생운동에 앞장섰다. 1921년 조선어연구회(朝鮮語硏究會)와 1922년 수양동맹회(修養同盟會)의 창립회원. 1922년부터는 배화여학교(培花女學校) 교사로 있으면서 국어․역사를 가르쳤다. 이때 학교에서 일본유학비를 받아 동경(東京)의 릿쿄대학(立敎大學) 문학부 사학과(동양사)를 1929년 졸업. 귀국하여 다시 배화여학교에 근무. 1937년 6월 수양동우회사건으로 투옥되어 이듬해 7월에 보석으로 출옥, 1938년 1월에 ‘조선문자급어학사’가 출판. 수양동우회사건으로 5년간 실직하였다가 1942년 성신가정여학교(誠信家政女學校) 교사가 되었으나, 그해 10월에 조선어학회사건으로 또다시 홍원경찰서(洪原警察署)에 검거. 광복 후 조선어학회 상무간사와 국어부활강사로 활약하는 한편, 연희전문학교 접수위원, 연희전문학교 이사의 일을 맡았고, 그해 10월 연희전문학교 교수로 취임한 이래 문학부장과 총장(대리)을 역임. 1948년에는 ‘나라말본’ ‘중등말본’을 펴냈고, 1949년에는 조선문자급어학사가 4대 명저(四大名著)의 하나로 표창받았다. 문교부 교과용도서활자개량위원, 연희대학교 대학원장, 국어심의회 위원, 교육용도서편찬심의위원회 위원 등을 지냈다. ‘고등 나라말본’ ‘중등 나라말본’을 펴냈고, 1963년에는 한양대학교 문리과대학 교수로 취임하고, ‘새로 지은 국어학사’를 펴냈다.
◇정인승(鄭寅承)
1897년∼1986년. 국어학자. 호는 건재(健齋). 전라북도 장수 출신. 1925년 3월 연희전문학교(延禧專門學校) 문과를 졸업하였으며, 1962년 중앙대학교와 1975년 연세대학교에서 명예문학박사 학위. 1925년 4월부터 1935년 8월까지 전라북도 고창고등보통학교 교사로 근무. 1936년 9월부터 1957년 10월까지 한글학회 ‘큰사전’(전 6권) 편찬을 주재하여 완간. 사전 편찬중이던 1942년 10월 1일 이른바 조선어학회사건으로 붙잡혀 2년의 실형선고를 받고 함흥형무소에서 복역하다, 광복으로 1945년 8월 17일 출옥. 그뒤 1952년 4월부터 1954년 4월까지 전북대학교 교수 및 총장직무대리, 1952년 4월부터 1961년 3월까지 중앙대학교 교수로 근무하였으며 교무처장을 역임. 1961년 2월부터 그해 9월까지 전북대학교 총장, 1964년 3월부터 1984년 8월까지 건국대학교 교수 및 대우교수로 재직. 1966∼1981년까지 학술원 회원(국어학), 1981∼1986년까지 학술원 원로회원, 1974∼1986년까지 한글학회 명예이사(학술) 저서로는 ‘표준중등말본’(1949, 어문각), ‘표준중등말본’(1956, 신구문화사), ‘표준고등말본’(1956, 신구문화사) 등 9권이 있으며, 국어학관계의 논문으로 「사전편찬에 관한 전반적인 문제」(한글 36, 1936), 「모음상대법칙과 자음가세법칙」(한글 60, 1938) 등 10여 편이 있다.
◇이병기(李秉岐)
1891년(고종 28)∼1968년. 국문학자․시조시인. 호는 가람(嘉藍). 전라북도 익산 출신. 변호사 이채(李採)의 큰아들이다. 1898년부터 고향의 사숙에서 한학을 공부하다가 당대 중국의 사상가 량치챠오(梁啓超)의 음빙실문집(飲氷室文集)을 읽고 신학문에 뜻을 두었다고 한다. 1910년 전주공립보통학교를 거쳐, 1913년 관립한성사범학교를 졸업. 재학 중인 1912년 조선어강습원에서 주시경(周時經)으로부터 조선어문법을 배웠다. 1913년부터 남양(南陽)․전주제2․여산(礪山) 등의 공립보통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이때부터 국어국문학 및 국사에 관한 문헌을 수집하는 한편, 시조를 중심으로 시가문학을 연구, 창작하였다. 1921년 권덕규(權悳奎)․임경재(任暻宰) 등과 함께 조선어문연구회를 발기, 조직하여 간사의 일을 보았다. 1922년부터 동광고등보통학교․휘문고등보통학교에서 교편을 잡으면서 시조에 뜻을 두고, 1926년 ‘시조회(時調會)’를 발기하였고, 1928년 이를 ‘가요연구회(歌謠硏究會)’로 개칭하여 조직을 확장하면서 시조 혁신을 제창하는 논문들을 발표. 1930년 조선어철자법 제정위원이 되었고, 연희전문학교․보성전문학교의 강사를 겸하면서 조선문학을 강의하다가 1942년 조선어학회사건으로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한때 귀향하였다가 광복이 되자 상경하여 군정청 편수관을 지냈으며, 1946년부터 서울대학교 교수 및 각 대학 강사로 동분서주하였다. 6·25를 만나 1951년부터 전라북도 전시연합대학 교수, 전북대학교 문리대학장을 지내다 1956년 정년퇴임하였다. 1960년 학술원 임명회원이 되었다.
◇권덕규(權悳奎)
1890년(고종 27)∼1950년. 국어학자. 호는 김포 출신. 1913년 서울 휘문의숙(徽文義塾)을 졸업하고 모교와 중앙학교․중동학교에서 국어 및 국사를 가르쳤다. 주시경(周時經)의 뒤를 잇는 몇 학자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1921년 12월 3일 조선어연구회(朝鮮語硏究會)창립에 참여. 조선어큰사전 편찬에 참여하였으며, 1932년 12월 「한글맞춤법통일안」의 원안을 작성하였다. 또한, 한글 지에 「정음(正音)이전의 조선글」을 비롯하여 신문․잡지 등에 수많은 논문․논술․수상 등을 발표하였으며, 한글순회강습 등에 온 힘을 기울였다. 그는 호주가로도 유명하여 많은 일화를 남기기도 했다. 저서로는 조선어문경위(朝鮮語文經緯)(1923), 조선유기(朝鮮留記)(1924) 및 을지문덕(乙支文德)(1948) 등이 있다.
◇장지영(張志暎)
1887년(고종 24)∼1976년. 국어학자․교육자․언론인.호는 열운(洌雲). 서울 출신. 1903년 4월 관립 한성외국어학교(漢城外國語學校) 한어과(漢語科)에 입학, 1906년 6월에 졸업하고 모교에서 부교관. 1908년 7월부터 1911년 6월 사이에 주시경(周時經)의 문하(사저)에서 국어학을 연구, 1908년 9월 사립 정리사(精理舍, 數理專門)에 입학, 1911년 3월에 졸업. 그뒤 곧 교육계에 종사하기 시작하여 평안북도 정주의 오산학교(五山學校, 1911.7.∼1912.5.) 교사(국어․수학), 서울의 상동청년학원(尙洞靑年學院, 1912.9.∼1914.8.) 교사(국어․수학)겸 학감, 경신중학교(儆新中學校) 교사(국어․수학)겸 교무주임. 1912년경에 유지들과 ‘물산장려회’를 조직하여 무명을 손수 짜서 옷을 지어 입는 운동을 벌였으며, 1913년경에는 독립운동단체의 하나인 청년비밀결사대 ‘흰얼모(白英社)’를 조직하여 국내는 물론 상해 임시정부와 연락을 통하여 독립운동에 헌신. 1920년 대동단(大同團)당수 전협(全協)의 부탁으로 의친왕(義親王)을 상해로 모셔가서 왕정을 세우려는 계획을 온 국민에게 알리기 위한 독립선언문을 기초. 1921년 12월, 휘문의숙(徽文義塾)에서 임경재(任暻宰)․최두선(崔斗善)․이규방(李奎昉)․권덕규(權悳奎)․이승규(李昇圭)․신명균(申明均) 등과 더불어 국어․국문을 체계 있게 연구하기 위하여 한글학회의 전신인 ‘조선어연구회’를 조직. 1926년 10월부터 1931년 7월 사이에는 조선일보 기자 겸 지방부장․문화부장․편집인으로 근무하면서 문맹퇴치와 한글보급운동을 맹렬히 펴 큰 성과. 1927년 1월 신석우(申錫雨)․조병옥(趙炳玉)․안재홍(安在鴻) 등과 ‘신간회(新幹會)’를 조직하고 조사부 간사. 조선총독부 언문철자법 심의위원(1928.5.∼1930), 조선어학회 ‘한글맞춤법통일안’ 제정위원(1930.12.∼1933.10.), 서울 양정중학교(養正中學校) 교사(국어․중국어, 1931.7.∼1942.7.), 조선어학회 조선어표준어사정위원회 위원(1936.1.∼1937.8.) 등으로 활약. 1942년 10월, 조선어학회사건으로 홍원과 함흥에서 옥고를 치렀다. 그 뒤 미군정청 문교부 편수국 부국장(1945.10.∼1948.8.), 조선어학회 제6대 이사장(1946.2.∼1949.9.), 세종중등국어교사양성소 소장(1948.9.∼1951)을 지냈다. 1948년 9월 연희대학교 교수로 부임하고, 이화여자대학교 교수대우도 겸하여 근무.
◇이만규(李萬珪)
1882년(고종 19)∼1978년. 교육가. 강원도 원주 출신. 경성의전을 2기로 졸업하고 송도중학교 교원으로 지내다가 1938년 일본경찰에 잡혀 교단을 떠나게 되자 조선교육사 저술에 몰두하였다. 1943년부터 여운형(呂運亨)의 건국동맹에 참가하였으며, 1946년 6월 그동안 다년간 역임하던 배화여학교 교장직을 그만두자 책의 출판을 제의받고 마침내 한국인 손으로 쓰여진 최초의 조선교육사를 출간하였다. 이밖에 여운형선생투쟁사가 있다. 1947년 5월 이후에는 근로인민당 중앙위원회 상임위원을 지냈으며, 1948년 4월 남북협상 이후 북한에 체류, 8월에는 최고인민회의 제1기대의원이 되었다. 1949년 6월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중앙위원에 선임되었으며, 1956년 5월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확대회의 호소문안을 작성하였다. 이듬해 2월 조국문자개혁연구위원장직을 맡았으며, 8월에는 다시 최고인민회의 제2기대의원이 되었다. 1961년 5월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위원 겸 상무위원을 지냈다. 이듬해 10월에는 최고인민회의 제3기대의원에 선임되었으며, 1965년 2월 조국통일사 사장직에 올랐다.
◇윤병호(尹炳浩)
1888년(고종 25)∼미상. 일제 강점기 애국계몽운동가. 본적은 경상남도 부산(釜山)이다. 1909년(융희 3) 그는 서상일(徐相日)․이원식(李元植)․안희제(安熙濟)․김동삼(金東三)․배천택(裵天澤)․이시열(李時說)․박중화(朴重華) 등 약 80여 명과 함께 일제침탈에 대한 국권회복을 목적으로 신민회(新民會) 계열의 대동청년당(大東靑年黨)을 창설하였다. 대동청년당은 비밀결사 형태의 청년단체로서 이후 활발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3·1운동 이후 상해 임시 정부에 독립운동 자금을 대주었던 부산 백산상회(白山商會)의 지배인이 되어 활동하였고, 안희제와 더불어 청년들의 민족의식을 고취시키고자 기미육영회(己未育英會)를 조직하였다. 기미육영회는 민족청년의 인재 양성을 목적으로 외국 유학을 지원하였으며, 이곳에서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배출되었다. 1929년에는 조선어연구회(朝鮮語硏究會)의 조선어사전편찬회(朝鮮語辭典編纂會)에 가입하여 사전의 편찬 작업을 도왔으나, 일제의 한국어말살정책의 일환으로 발생한 조선어학회사건(朝鮮語學會事件) 당시 2차로 검거되었다. 윤병호(尹炳浩)는 함경남도 홍원과 함흥의 경찰서에서 모진 고문을 당했으며, 1943년 기소유예로 석방되기까지 약 2년 동안 옥고를 치렀다. 또한 이 사건으로 400자 원고지 3만 2천여 장의 사전 원고가 압수되는 등 조선어연구회의 노력은 큰 타격을 입었다. 그 외에도 원주잠사주식회사(原州蠶絲株式會社) 사장․경상남도 농림국장․제3대 국회의원(선거구 경상남도 남해, 무소속)․제3대 국회 절량농가(絶量農家) 구호대책위원회위원장 등을 두루 역임하였다.
◇이우식(李祐植)
1891년(고종 28)∼1966년. 민족운동가․애국지사. 호는 남저(南樗). 경상남도 의령 출신. 일본에 건너가 동경(東京) 세이소쿠영어학교(正則英語學校)와 도요대학(東洋大學)철학과를 졸업하였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구여순(具汝淳)․최정학(崔正學) 등 동지들과 모의하고 의령읍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시위운동을 주동한 다음 상해로 망명하였다. 1920년 귀국하여 안희제(安熙濟)․김효석(金孝錫) 등과 함께 백산무역주식회사(白山貿易株式會社)를 설립, 경영하면서 비밀리에 임시정부의 독립운동자금을 조달하였다. 1926년 서울에서 시대일보사(時代日報社), 1927년 중외일보사(中外日報社)를 설립, 사장으로 일하면서 민족의식고취에 노력하였다. 1929년 10월 조선어연구회의 조선어사전편찬회에 가입하여 재정을 지원하였다. 조선어학회 기관지인 한글의 편집비를 지원하였으며, 1935년부터는 이인(李仁)․김양수(金良洙)․장현식(張鉉植) 등과 조선어사전편찬의 촉진을 위한 비밀후원회를 조직하여 거액의 재정지원을 하였다. 1942년 1월 이극로(李克魯)․이윤재(李允宰) 등과 인재양성을 목적으로 조선양사원(朝鮮養士院)을 조직하려다 실패. 1942년 10월 조선어학회사건으로 구속되어 함경남도 홍원경찰서와 함흥경찰서에서 잔혹한 고문을 받고, 1945년 1월 징역 2년에 집행유예 4년의 선고를 받아 석방되었으나, 2년 2개월의 옥고. 광복 후 조선어학회의 재정이사로 선임. 1963년에 한글공로상을 받았고 1977년에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김도연(金度演)
1894년∼1967년. 정치가. 경기도 김포 출신. 1913년 일본 긴죠중학교(錦城中學校)를 마치고 1919년 게이오대학(慶應大學) 이재학부를 수료. 1927년 미국으로 건너가서 컬럼비아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하였고, 1931년 아메리칸대학 대학원에서 경제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32년 귀국하여 연희전문학교 강사를 지냈고, 1934년 조선흥업주식회사를 창립, 사장에 취임했으나 1942년 조선어학회사건에 연루되어 함흥형무소에서 2년간 옥고를 치렀다. 광복 후 한국민주당의 8인총무의 한 사람으로 정계에 투신하여 1946년 2월 미군정하에서 남조선민주의원 의원에 위촉되고, 다시 그해 12월에는 남조선과도정부 입법의원에 당선되어 한국민주당의 핵심인물의 한 사람으로 활약. 1948년 제헌국회에 한민당 소속으로 출마하여 당선, 국회의 초대재정경제분과위원장에 선출, 이어서 8월 정부수립과 함께 초대재무부장관으로 1950년까지 재직. 1954년 민주국민당 최고위원에 취임. 3대민의원의원에 당선, 1955년에 민주당이 결성되면서 고문으로 추대, 1958년에 민주당 공천으로 4대민의원 당선, 1959년에는 민주당 중앙위원회 부의장. 4월의거 후 1960년 5대민의원에 당선된 뒤 민의원 부의장. 1963년 11월 6대국회의원선거 때에는 범국민정당을 표방한 자유민주당의 전국구후보 1번으로 당선되었으나, 1965년 8월 한일조약비준에 반대하여 의원직을 사퇴. 같은해 윤보선(尹潽善)이 민중당을 이탈하여 신한당(新韓黨)을 창당 참여하여 신한당 정무위원이 되었다. 저서로 자서전인 나의 인생백서와 한국농촌경제 등이 있다.
◇김양수(金良洙)
1896년∼1971년. 조선어학회 회원. 서울 출신. 1925년 미국 하와이에서 열린 태평양회의에 서재필(徐載弼)․김활란(金活蘭)․신흥우(申興雨) 등과 함께 참석, 성명을 통하여 총독정치의 진상을 폭로하였다. 1926, 1927년에는 미국 뉴욕에서 삼일신보(三一申報)의 주필로 교포들의 독립정신 고취에 주력하였다. 1931년에는 영국에 건너갔다가 중국을 거쳐 귀국하였다. 이때 중국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인들을 만났으며, 특히 김두봉(金枓奉)과는 한글운동에 관하여 의견을 나누었다. 1935년 조선어학회에 참여, 사전편찬사업의 재정적 뒷받침을 담당하였다. 1942년 10월 조선어학회사건에 연루되어 1945년 1월 징역 2년에 집행유예 4년을 선고받았다. 광복 후 1960년에는 원자력원장을 역임하였다. 1977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1903년∼1974년. 정치가. 호는 월파(月坡). 전라남도 고흥 출신. 1921년 보성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23년 일본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정경학부를 졸업. 1925년 미국 오하이오주 웰스리언대학을 거쳐, 1927년 컬럼비아대학에서 정치사회학부를 수료. 귀국 후 전라남도 벌교읍에서 남선무역주식회사를 설립하여 운영, 1935년 송명학교(松明學校)를 설립하여 교장. 재임중 1942년 조선어학회사건으로 1년을 복역. 광복 후 관계에 진출하여 1946년 6월 광주시장, 같은해 10월 전라남도지사가 되었다. 1948년 조선전업사장. 1950년 제2대민의원의원에 당선, 정계에 진출하였다. 1952년 거창양민학살사건의 국회조사단장으로 활동하던 중, 그해 4월 자기를 암살하려던 대위 서창선(徐昌善) 살해사건으로 복역, 8년째 되던 해 4·19의거로 출옥. 1960년 제5대민의원의원에 당선되고, 민의원부의장에 피선. 1961년 제15차UN총회 한국대표로 참석. 그해 5월 남북교류를 주장하다가 입건되었으나, 혁명검찰에서 기소유예로 풀려났다. 1963년 자민당 최고위원을 거쳐 민중당 최고위원을 지냈고, 그해 제6대민의원의원에도 당선. 1965년 한일협정을 반대하는 정치투쟁으로 의원직을 사퇴. 1966년 혁신계 인사들과 함께 민주사회당을 창당, 대표최고위원이 되었다. 제7대국회의원에 당선. 1971년 신민당과 공당으로서의 합당을 이루지 못하고 개별 입당하였으며, 그해 개인적으로 통일문제연구소를 개설. 1973년 정계를 떠났다.
◇이인(李仁)
1896년∼1979년. 변호사․정치인. 호는 애산(愛山). 대구 출생. 할아버지는 성리학자였으며, 아버지는 한말 애국계몽운동단체였던 자강회(自彊會)와 대한협회의 중심인물이었다. 대구의 달동의숙(達東義塾)과 경북실업보습학교(慶北實業補習學校)를 졸업. 1912년 일본에 가서 세이소쿠중학교(正則中學校)와 메이지대학(明治大學)법학부를 졸업하고, 다시 대학원과정인 일본대학 고등전공과(高等專攻科)에서 수학. 대학을 마치고 일시 귀국하였으나,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변호사의 꿈을 안고 재차 일본으로 건너가, 1922년 일본변호사시험에 합격. 서울에서 변호사업을 개업한 뒤 처음 변론을 맡은 사건이 의열단사건(義烈團事件)이었다. 당시 몇 안 되는 우리나라 변호사 중 허헌(許憲)․김병로(金炳魯) 등과 함께 이 사건을 변론하였는데, 이를 계기로 항일독립투쟁사에 남을만한 굵직굵직한 사건에는 거의 빠짐없이 관여. 수원고농사건(水原高農事件) 변호 때에는 법정불온변론문제로 변호사정직처분을 받기도 하였으며, 언론탄압반대연설회 등으로 여러 차례 유치장신세를 지다가 마침내 조선어학회사건 때에는 투옥되어 4년 가까이 옥고 치름. 그가 맡았던 큰 사건 중에는 의열단사건․광주학생사건․안창호사건․수양동우회사건, 각종 필화 및 설화사건, 수원고농사건, 6·10만세사건․경성제대학생사건․만보산사건(萬寶山事件) 등이 있다. 광복이 되자 군정청이 임명하는 수석대원관(首席大院官), 검찰총장직을 맡았고, 그 자리에 있으면서 건국 후의 헌법과 정부조직법의 모체가 된 법안을 초안, 제헌국회의 헌법기초위원회에 참고자료로 제출. 정부수립과 함께 초대법무장관, 이승만(李承晩)대통령과 뜻이 맞지 않자 물러났다. 그뒤 5‧16 때까지 민의원과 참의원을 지냈으며, 민주공화당정권 때에는 야당의 원로정치인으로 야당통합을 위하여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유언을 통하여 살던 집을 포함한 전 재산을 한글학회에 기증.
◇김법린(金法麟)
1899년∼1964년. 승려․항일독립운동가․정치가․학자. 필명은 철아(鐵啞), 호는 범산(梵山). 경상북도 영천 출신. 14세에 출가하여 1915년에 동래 범어사(梵魚寺)에서 비구계를 받았다. 3·1운동 때 영남의 불교계 독립만세운동에 참가하였고, 1920년에는 불교중앙학림(佛敎中央學林)을 졸업하였으며, 이듬해 프랑스로 건너가서 1926년에 파리대학 철학과를 졸업. 1928년에는 백성욱(白性郁)․김상호(金尙昊) 등과 함께 불교청년회의 중흥을 도모하였고, 1929년 1월에는 조선불교선교양종승려대회를 개최하였으며, 1930년 5월에는 한용운(韓龍雲)의 뜻을 이어 일제에 대항하는 비밀결사조직인 만당(卍黨)을 결성. 또한, 1930년에 일본 고마자와대학(駒澤大學)에서 불교를 연구하였으며, 1931년에는 동경에서 조선청년동맹을 조직하여 독립운동. 1933년부터는 다솔사(多率寺)․해인사․범어사 등의 사찰을 다니면서 불교의 교학을 강의하는 한편 독립정신의 고취에 힘을 기울였다. 1938년에 만당사건으로 진주에서 검거되어 옥고를 치렀으며, 1942년에는 조선어학회사건으로 함흥에서 투옥되었다. 그러나 감옥에서 풀려나와 다시 독립운동에 가담하여 불교계에 독립정신을 고취시키는 데 큰 구실을 하였다. 1945년 겨울 불교중앙총무위원직을 맡았을 때에는 미군정장관 하지를 만나 일본인 승려들이 머물렀던 사찰을 종단에서 인수할 수 있게끔 협의하는 등 여러 면에서 불교혁신운동을 벌였으며, 동국학원(東國學院)의 이사장 1952년에는 문교부장관에 임명되었고, 1953년에는 유네스코한국위원회위원장이 되었으며, 제3대 민의원으로 피선. 1959년에는 원자력원장, 1963년에는 동국대학교총장이 되어 학교발전에 힘을 기울였다.
◇이은상(李殷相)
1903년∼1982년. 시조작가․사학자. 본관은 전주(全州). 호는 노산(鷺山), 필명은 이남천(南川)․강산유인(江山遊人)․두우성(斗牛星). 경상남도 마산 출신. 이승규(李承奎)의 둘째아들이다. 1918년 아버지가 설립한 마산 창신학교(昌信學校)고등과를 졸업하고, 1923년 연희전문학교 문과에서 수업하다가 1925∼1927년에 일본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사학부에서 청강. 1931․1932년 이화여자전문학교 교수를 비롯하여, 동아일보사 기자, 신가정(新家庭) 편집인, 조선일보사 출판국 주간 등을 역임. 1942년 조선어학회사건에 연루되어 홍원경찰서와 함흥형무소에 구금되었다가 이듬해 기소유예로 석방. 1945년 사상범 예비검속으로 광양경찰서에 유치중 광복과 함께 풀려났다. 광복 후 이충무공기념사업회 이사장․안중근의사숭모회장․민족문화협회장․독립운동사편찬위원장․세종대왕기념사업회 이사․문화보호협회 이사 등을 역임. 1932년에 나온 그의 첫 개인 시조집인 노산시조집(鷺山時調集)은 향수․감상․무상․자연예찬 등의 특질로 집약된다. 이 중 「고향생각」․「가고파」․「성불사의 밤」 등 많은 가곡이 불리어지고 있다. 이러한 작품들은 시조집 노산시조선집(1958)을 비롯하여, 특히 푸른 하늘의 뜻은(1970)과 마지막 작품집인 기원(祈願)에서 절정을 이루었다. 시문집으로 노산문선(鷺山文選)․노산시문선 등과 수필집으로 무상(無常), 사화집으로 조선사화집(朝鮮史話集)과 기행문집 등이 있고, 전기로는 탐라기행한라산(耽羅紀行漢拏山)․피어린 육백리․이충무공일대기(李忠武公一代記) 등 100여권의 저서. 5·16 혁명공약 다듬어주고 박정희 대통령 문화 특보로 한글전용 정책 펴도록 함.
◇안재홍(安在鴻)
1891년(고종 28)∼1965년. 정치가․사학자. 민세(民世). 경기도 평택 출신. 1907년에 단발을 하고 상경하여 황성기독교청년회(皇城基督敎靑年會) 중학부에 들어갔다. 이때 이상재(李商在)․남궁 억(南宮檍)․윤치호(尹致昊) 등과 교분을 가졌다. 1910년 일본 동경으로 건너가 조선인기독교청년회에 계속 관여하여, 조선인유학생학우회를 조직, 활동하면서 1911∼1914년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정경학부를 졸업. 1915년 귀국하여 주로 언론계에 종사하다가, 1916년 상해로 망명하여, 이회영(李會榮)․신채호(申采浩) 등이 조직한 동제사(同濟社)에서 활약. 그 뒤 귀국하여 1915년부터 1917년까지 중앙고등보통학교 교감직을 역임하고, 그해부터 조선 중앙기독교청년회 교육부 간사. 1919년 3·1운동 만세시위를 지도하는 한편, 비밀결사인 대한민국청년외교단에 가담하여 상해임시정부의 연통부(聯統府)역할을 수행하다가 일본경찰에 붙잡혀 3년간 옥고. 1923년 시대일보(時代日報) 창간에 참여하여 이사와 논설위원을 지내고, 1924년 조선일보 주필을 거쳐 부사장(1929∼1931)․사장(1931∼1932)을 역임하여 10년 동안 언론인생활을 하였다. 이 동안에도 1925년에는 조선기자대회 부의장을 역임하고, 조선사정연구회․태평양문제연구회에 참여하였으며, 1927년 신간회 총무간사로 활약하다가 잡혀 8개월 동안 투옥. 그해 재만주동포옹호동맹(在滿洲同胞擁護同盟)위원장, 1929년 생활개선운동․귀향학생문자보급운동을 벌이면서 광주학생사건 진상보고를 위한 민중대회를 주관. 1932년에는 만주동포조난문제협의회의 조사․선전부 책임을 맡기도 하였다. 조선일보 시절에 겪은 일들은 글로 옮겨져 사설 980편, 시평 470편이 게재되었다. 이후 여유당전집(與猶堂全集)의 간행 등 조선실학연구에 몰두. 1936년 임시정부와의 긴밀한 활동이 탄로나 2년간 복역하였으며, 1942년에는 조선어학회사건으로 다시 2년간의 옥고. 8·15광복과 동시에 생겨난 조선건국준비위원회의 부위원장이 되었으나, 이 위원회가 공산주의자들에게 좌우되자 그해 9월 독자적으로 국민당(國民黨)을 결성, 당수가 되었다. 그뒤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 중앙위원․신탁통치반대 국민총동원위원회 부위원장으로 활동하였고, 1946년 한성일보사(漢城日報社)창립 사장․비상국민회의 의원․민주의원 의원․좌우합작위원회 의원으로 활약. 1947년 입법의원 의원이 되고, 미군정청 민정장관(民政長官)이 되어 한인체계에 의한 행정기반을 굳혔다. 정부수립 후 평택군에서 무소속으로 제2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으나, 1950년 9월 21일 납북되어 1965년 3월 1일 죽은 것으로 전해진다.
◇정열모(鄭烈模)
1895-1967. 국어문법학자. 충북 보은 출생, 조선어강습원 고등과 제 2회 수석 졸업. 1915년 경성 제일고등보통학교 교원 양성소(제2종생) 졸업. 1925년 일본 와세대 대학 일본어과 졸업. 1925년 서울 중등학교 교원. 1932년 김천 고등보통학교 교원. 1942년 조선어 학회 수난으로 검거됨. 광복 후 1946년 국학전문학교 교장. 숙명여대 교수. 1946년 홍익대학 초대 학장. 한글문화사 대표. 한글 학회 이사(1949) 등을 지냄. 1913년 조선어문회(朝鮮語文會)의 조선어강습원(朝鮮語講習院)에서 최현배(崔鉉培) 등과 어문연구를 하였다. 1927년 자신이 한글을 간행하고 「조선어문법론」(한글 1-3∼2-2, 1927∼1928) 및 「새로 읽은 향가」(한글 12-2, 1947) 등의 논문을 썼으며, 신편고등문법(한글문화사, 19 46), 초급국어문법독본(고려서적, 1948), 고급국어문법독본(고려서적, 1948) 등의 저서를 남겼다. 8·15 이후 홍기문(洪起文) 등과 월북.
◇안호상(安浩相)
1902년(광무 6)∼1999년. 현대 교육자․민족사상연구가. 호는 한뫼. 본관은 순흥(順興), 출생지는 경상남도 의령. 어려서부터 신학문과 민족정신․민족사상 연구에 뜻을 두었다. 1929년 독일 국립 예나(Jena)대학에서 철학박사학위를 받은 후, 영국 옥스퍼드대학과 독일 국립 훔볼트학술재단의 연구과정을 거쳐 귀국. 그러나 일제의 정략적 교란으로 교수직에 임용되지 못하였으며, 연속되는 반일행위로 일급 수배자로 지목되었다. 광복 후 활발한 활동을 보여, 1945년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교수를 시작으로 1948년 초대 문교부장관․대통령특사, 1960년 초대 국회 참의원 등을 역임하였다. 대표 저서로 한백성(일민)주의의 본바탕․민주적 민족론 등이 있다. 대종교 총전교(교주). 한성대학교 재단이사장. 한글 문화단체 모두모임 회장을 지냄. 1986년부터 한글문화단체모두모임 회장으로 한글운동에 앞장을 서다 1993년에 돌아가셨다.
◇정인섭(鄭寅燮)
1905년∼1983년. 시인․평론가․영문학자. 호는 눈솔. 경상남도 울주 출생. 그의 문학활동은 1922년 ‘색동회’의 발기인(馬海松․尹克榮․方定煥․曺佐鎬 등)이 되어 동인지 어린이에 동시․동극․동화 등을 발표. 1926년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재학중 동경 유학생인 김진섭(金晉燮)․김온(金鎾)․이하윤(異河潤)․손우성(孫宇聲) 등과 해외문학연구회를 조직하였으며, 이듬해 1월에 창간된 동인지 해외문학에 화장산인(花藏山人)이라는 필명으로 「포오론」을 발표하고, 같은해 조선의 전래동화․전설 등을 수록한 온돌야화(溫突夜話)(日本書院)를 일문으로 간행. 1929년 와세다대학 영문과를 졸업하고 귀국, 이후 1946년까지 연희전문학교 교수로 있으면서, 한글학회 회원(1930)․극예술연구회 동인(1931)․한국민속학회 회원(1932)․한국음성학회 발기인(1935)․제4회 국제언어학자대회 한국대표(1936) 등 다양한 활동.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피검. 광복 후 1946년 중앙대학 교수를 역임. 영국 런던대학 교수(1950∼1953), 일본 덴리대학(天理大學)교수 및 경도대학원 강사(1953)로 있으면서 1953년 런던대학원을 수료. 1954년 국제펜클럽 한국본부의 창설에 발기인으로 참가, 1956년 서울대학교 대우교수 및 펜클럽한국본부 위원장을 역임, 다음해 중앙대학교 대학원장(1957∼1968), 서울특별시전국사설학원연합회위원장(1958∼1964), 한글기계화연구소 부소장(1962∼1972), 1963년 한국셰익스피어협회 이사로 있으면서 영역한국시선 A Pageant of Korean Poetry를 출간 1964년 미국 4개 대학 교환교수와 1966년 국제연극협회한국본부 위원장. 1969년 외국어대학교 언어연구소장을 역임, 다음해 서울에서 개최된 국제펜대회가 설치한 국제펜클럽 아시아문학번역국 초대회장으로 피선.
◇정태진(丁泰鎭)
1903년∼1952년. 국어학자․독립운동가. 호는 석인(石人). 경기도 파주 출신. 아 1917년 4월 서울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여 1921년 3월 4년제를 졸업. 1925년 3월 연희전문학교(延禧專門學校) 문과를 졸업, 같은 해 함경남도 함흥에 있는 영생고등여학교 교사로 부임. 3년 뒤인 1927년 5월 미국으로 유학하여 우스터대학 철학과를 졸업, 1931년 다시 컬럼비아대학교 대학원에서 교육학과 과정을 마친 다음, 1931년 9월 돌아와 영생고등여학교에서 다시 교편을 잡았다. 1941년 6월 영생고등여학교를 떠나 조선어학회(지금의 한글학회)에서 조선말 큰사전 편찬의 일을 맡아보다가, 1942년 9월에 이른바 조선어학회사건으로 홍원경찰서에 구금되어 징역 2년을 선고받아 함흥감옥에서 옥고. 1945년 8월 광복과 더불어 조선어학회로 돌아와 조선말 큰사전 편찬을 다시 시작하는 한편, 연희대학․중앙대학․홍익대학․동국대학 등에서 국어학 강의. 1950년 6·25사변으로 고향에서 피신하였고, 1·4후퇴 때 부산으로 피난갔다가 1952년 서울로 돌아와 큰사전 속간을 위하여 전념하다가 같은 해 11월 교통사고로 죽었다. 저서로는 한자 안쓰기 문제(어문각, 1946), 중등국어독본(김원표와 공저, 한글사, 1946), 시가집 아름다운 강산(신흥국어연구소, 1946), 고어독본(연학사, 1947), 조선고어방언사전(김병제와 공저, 일성당서점, 1948) 등.
◇김선기(金善琪)
1907년∼1992년. 언어학자. 호는 무돌. 전라북도 군산 출생. 1930년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하고, 1937년 영국 런던대학에서 음성학을 전공하여 문학석사 학위를 받고 귀국. 1938년 연희전문학교 전임강사로 취임, 1939년 조교수, 1940년 교수. 1943년 조선어학회사건으로 함흥형무소에 투옥, 기소유예로 출감했으나, 이 일로 연희전문학교에서 강제 해직. 1946년 연희대학교 영어영문학과에 복직, 1947년에는 동교 문과대학장 서리를 역임. 1950년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언어학과 주임교수로 취임. 1951∼1952년 서울대학교 교무처장 및 학생처장, 전국전시연합대학 교무처장을 역임. 1953년에는 미국 코넬대학 교환교수로 도미하여 1년간 언어학을 연구. 1958년 문교부 차관 취임으로 잠시 학계를 떠났다. 1960년 5월 관직에서 물러나, 농장을 경영하다가, 정계에 입문, 자유민주당 중앙위원회 의장으로 활동 1967년 명지대학 대학원장으로 취임하여 1972년에 정년퇴임하고 명예교수. 주요 학회활동으로는 1930년에 조선어학회 회원이 되어 1931년 학회의 사전편찬원이 되었고, 1932년에는 추가로 뽑은 한글맞춤법통일안 위원에 피선되어 1933년 「한글맞춤법통일안」이 완성될 때까지 위원으로 일하였다. 1948년부터 1970년까지는 한글학회 이사를 역임하였으며, 1965년부터는 세종대왕기념사업회 이사로 봉사하였다. 한편, 1956년에는 한국언어학회를 창립하고 초대회장에 피선되었다.
◇이석린(李錫麟)
1914년 2월 24일∼미상.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가. 본적은 서울 도봉구(道峰區)이다. 1936년 조선어학회(朝鮮語學會)에 가입한 후 조선어학회 기관지 한글의 원고 수집과 편집․교정․발송 등을 담당하였다. 1938년 10월 조선어학회 회원이자, 춘천고등보통학교(春川高等普通學敎)에서 농촌계몽활동을 위해 조직한 상록회(常綠會) 지도자였던 신영철(申瑛澈)이 한글에 실은 글이 문제가 되었다. 가택수색을 받던 신영철의 집에서 서로 주고받은 편지글이 발견되어 연루자로 체포되었다. 3개월간 옥고를 치르고, 1939년 불기소 방면되었다. 1939년 4월부터 일제가 학교에서의 국어 수업을 폐지시키고, 각 언론사들을 계속 폐간 시키자, 조선어학회에서 편찬하던 큰사전을 1942년 10월까지 간행시키기 위해 힘쓰던 중, 일제의 조선어학회 해체를 위한 조선어학회 음모 사건에 연루되어 이극로(李克魯)․이중화(李重華)․이윤재 등 11명이 체포될 때 함께 체포되어, 1년여간 옥고를 치르고 1943년 기소유예를 받고 출감하였다. 1997년 정부로부터 공훈을 인정받아 건국훈장 애족장에 추서되었다.
◇장현식(張鉉植)
1896년 9월 17일 지금의 전라북도 김제시 금구면 서도리에서 만석꾼의 아들로 태어났다. 중앙고등보통학교[지금의 중앙고등학교]가 설립될 당시 거액을 기부하였으며, 고려대학교가 설립될 당시에도 재단에 사재를 기부하여 교육을 통해 침체된 민족의 기운을 부흥시키기 위해 노력하였다. 동아일보사가 창간될 당시에는 인쇄 장비를 구입할 수 있도록 거금을 기부하였다. 1919년 4월 비밀결사인 대동단(大同團)이 창단되자 운영 자금을 제공하고, 『대동신문(大同新聞)』의 재정을 담당하였다가 체포되어 1921년 4월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과 집행유예 2년을 선고 받았다. 이후 민족어 보존을 염원하여 『조선어사전(朝鮮語辭典)』 편찬을 위하여 3,000원을 제공하고 지인에게도 권유하여 1,400원을 제공하게 했다는 이유로 재판을 받고 4년간에 걸쳐 옥고를 치르다 8·15 해방과 함께 출옥하였다. 제2대 전라북도지사로 재임 중이던 1950년 한국전쟁 당시 북한군에 납치되어 현재까지 생사를 알지 못한다.
◇이중화(李重華)
1881년(고종 18)∼미상. 국어학자. 서울 출신. 흥화학교(興化學校)영어과 졸업 후, 1904년 이 학교 교사를 지낸 뒤 배재학당에서 교편. 1929년 조선어사전(뒷날 한글학회의 큰사전)편찬집행위원, 1936년 이 사전 전임 집필위원 및 조선어표준말사정위원 1942년 ‘조선어학회사건’으로 검거되고, 광복 후 국학대학장, 1949년 재단법인 한글학회 대표이사를 지내다가 6·25동란 때 납북. 이 때 학회에 부천에 있는 땅 수천 평도 기증했다. 저서로 경성기략(京城記略)․조선의 궁술(弓術) 등이 있다. 1942년 10월 한민족 말살정책의 일환으로 한글 연구자들을 투옥시키기 위해 조작한 ‘조선어학회사건(朝鮮語學會事件)’으로 다시 구속되어 함경남도 홍원경찰서와 함흥경찰서에서 고문과 악형으로 고초를 겪다가 1943년 9월 18일 기소유예로 출감. 정부로부터 공훈을 인정받아 1968년 대통령표창을 받았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에 추서되었다.
◇신현모 申鉉謨 (신윤국 申允局)
1894년 연백~1975년 1월 29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특별재정위원을 역임. 미국 라이더 대학을 졸업.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수감되었었다. 제헌 국회의원 자(字)가 ‘윤국’이므로 일부 문헌은 ‘신윤국’으로 기재. 해관(海觀) 신현모는 조선어학회 사건에 앞서 동우회(현 흥사단) 사건으로도 옥고를 치렀다. 조선어학회 일에 몰두할 당시를 청상(淸爽), 즉 맑고 시원한 시절로 손꼽았다. “1935년 이래 조선어학회와 관계가 생겨 그 기관을 도우려 했다. 이우식, 장현식, 김양수 등과 함께 사전 편찬을 위해 재정지원에 참가하고 1937년부터는 서울 출신 15명, 지방출신 15명 등 30명의 일원이 돼 3년간 회합에 출석해 우리말의 표준어 사정에 참여. 결국, 조선말 큰사전은 해관 등의 비용부담으로 빛을 볼 수 있었다”는 증언이다. 해관은 이윤재 김윤경 이극로 최현배 이희승 한징 정인승 장지영 이중화 등을 “참으로 보배로운 학자들”이라고 추어올리며 “이 청빈한 가운데 민족의 생명인 우리말을 가꾸고 지키는 데 온 정성을 다하는 모습은 진실로 아름다운 광경이었고 내가 작은 힘이나마 보태며 그들과 함께 지내는 시간은 보람이었다”고 술회. 그의 사위 이기인이 1948년 ‘사리갈말 망광’ 엮음.
◇권승욱(權承昱)
1916~1974. 전북 고창고보 건재 정인승 선생 제자로서 1936년에 건재 선생이 불러 한글학회 사전 만들기 일을 함. 1945년 공병우 박사 개인 한글선생. 광복 뒤에 배재학교와 여러 학교 국어 선생을 하면서 한글학회 사전 만드는 일을 도와줌.
◇이강래(李康來)
1885년 11월 16일 충주 탄생 1910년 지금 서울 대대 전신인 관립 공업견습소 도가과 수려 1911년 3년간 만주 연길에서 나철 선생과 러시아 불라디보스톡에서 이상설 선생과 독립운동 한글 가르침. 1915년 일본사범본과에서 공부 요주위 인물로 지목되어 여러 번 경찰서행, 3·1운동 가담. 개성 정화여고, 배화여고 교사. 1927년 조선어연구회 가입, 1932년 한글 창간호 참여, 1933년 한글 계몽운동, 한글맞춤법 참여, 1938년 흥업구락부 구금.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 구금되었다가 기소유예. 광복 뒤 경복 고등학교에서 정년 퇴임.
◇서승효(徐承孝)
1882~1964. 충남 청양군 비봉면 부농 출신 언론인. 1908년 일본 유학을 갔다가 1910년 나라 빼앗기니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로 갔으나 실망하고 신흥군관학교로 가서 교원. 1919년 3.1운동 때 국내로 잠입하여 도움. 조선광문회에서 최남선을 만남. 최남선 소개로 매일신문 이상협기자 만나 교정부 기자가 됨. 1920년 동아일보 창간 때 이상협과 동아일보로 들어가 도안과 편집 맡음. 1924년 이상협과 조선일보로 옮겨 정치면 편집. 신문기자 월급을 모아 독립자금으로 보냄. 1932년 중앙일보 편집부장과 지방부장. 조선일보 지방부장 하다 1939년 조선일보 정년 퇴임.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 구금. 1945년 조선일보 지방부장. 1947년 동아일보 편집 고문. 1954년 자유신문 객원사원. 1964년 이승 떠남.
◇김종철(金鍾哲)
호남 순천 갑부로서 김양수, 서민호, 김도연, 신현모 들과 같이 조선어사전편찬위원으로 학회를 많이 도와주다가 1942년 일제에 검거되어 수난을 당했으나 6·25 전쟁 전에 이 땅을 뜬 것으로 보인다. 그의 형은 제헌 국회의원이었다고 한다.
<사진> 왼쪽부터 정인승, 최현배, 이희승, 이윤재, 정태진
한말글문화협회 대표 http://cafe.daum.net/hanmalg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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