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 오월 광주는 애국가와 아리랑의 물결이었다
잠시 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시민들의 입에서 일제히 애국가가 흘러나왔다.
애국가를 마친 시민들은 묵념, 학생들에게 보내는 글, 종교인에게 보내는 글, 유족에게 보내는 글을 읽은 뒤 아리랑을 부르며 총과 칼로 무장한 계엄군과 대치했다.
1980년 5월 민주화를 목놓아 외쳤던 광주 시민들이 가장 많이 부른 노래는 무엇이었을까?
정답은 바로 애국가와 아리랑이었다.
정수만 전 5·18유족회장은 12일 당시 기록을 근거로 애국가가 얼마나 많이 불렸는지를 설명했다.
그는 "1980년 5월22일부터 옛 전남도청 앞에서 궐기대회가 열렸다"며 "궐기대회의 모든 식순에 애국가 제창이 포함돼 있었다"고 말했다.
실제 5월23일 오전 10시에 열린 5차 시민궐기대회의 식순에도 애국가는 빠지지 않았다.
애국가와 아리랑은 궐기대회뿐만 아니라 광주 시민들이 거리에 모여 계엄군과 대치하는 매 순간순간 가장 많이 불려진 노래다.
광구 동구청 자료에도 '5월21일 도청 앞에서 계엄군의 발포가 있기 전 애국가가 불리고 있었다'는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또 1980년 5월, 당시 계엄군을 이끌었던 20사단 연대장 이병년 대령은 군 보고서에 '5월21일 시민들이 계엄군의 애국가 제창을 요구해 함께 불렀다'는 의미의 기록을 남기고 있다.
광주시 자료에도 애국가와 아리랑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시 자료는 '5월19일 오후 2시40분, 시민들이 아리랑과 애국가를 제창하며 동구청 앞에서 광주은행까지 시위를 벌였다'는 내용이 담겨져 있다.
전남매일 등 신문기사 곳곳에서도 애국가를 부르는 광주 시민들의 모습은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정 전 회장은 "당시는 민중가요라는 개념도 없고 특별히 부를만한 노래도 없었다"며 "모든 사람들이 알 수 있는 애국가와 아리랑이 가장 많이 불릴 수 밖에 없었고 이 같은 관련 기록만 수백 건에 달한다"고 말했다.
애국가와 아리랑 다음으로 많이 불린 노래는 '우리의 소원은 통일'과 1970년 김민기가 작사·작곡하고 가수 양희은이 부른 '아침이슬'이었다.
송선태 5·18기념재단 상임이사는 "당시 시위에는 중학생부터 노인들까지 다양한 연령대의 시민들이 참여했다"며 "이들이 공통적으로 알고 있는 노래가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었으며 또 독재시절 정치적 연관성이 없는데도 금지곡이 된 '아침이슬'도 많이 불렸다"고 말했다.
'동지들 모여서 함께 나가자'로 시작해 '도청을 향해 출정가를 힘차게 힘차게 부르세'로 마무리되는 일명 '광주출정가'도 많은 시민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당시 시민들이 부른 이 같은 노래들은 금지곡으로 지정됐을 뿐만 아니라 가사 내용이 과격하다는 이유로 일부 보수단체들의 '5·18 폄훼·왜곡' 논리로 이용되고 있다.
'임을 위한 행진곡'이 첫 선을 보이고 대중들에게 불리기 시작한 것은 5·18이 일어난 지 2년이 지난 뒤였다.
소설가 황석영씨와 광주의 문화운동가들이 만든 '임을 위한 행진곡'은 1982년 5·18 민주화운동 당시 시민군 대변인으로 활동하다가 산화한 윤상원 열사와 그의 야학 동료 박기순씨를 추모하며 올린 그들의 영혼 결혼식에서 공식적으로 처음 불렸다.
이후 대학가에 전파되며 '임을 위한 행진곡'은 제2의 애국가와 아리랑으로 불리며 민주화 운동에 힘을 불어넣는 대표곡이 됐다.
'임을 위한 행진곡'과 더불어 1980년대 5월 광주를 대표하는 또 한 곡의 노래가 '오월의 노래'다.
'꽃잎처럼 금남로에 뿌려진 너의 붉은 피'로 시작하며 5월 광주의 비극을 매우 직설적으로 고발한 이 노래는 프랑스의 한 샹송 가수가 부른 '어느 할머니의 죽음'을 번안한 곡으로 알려졌다.
'5월의 노래'는 '임을 위한 행진곡'과 함께 1980년대 내내 저항운동의 가장 중요한 무기 중 하나로 자리잡았다.
송 상임이사는 "5·18이 일어난 지 2년 뒤에 태어났지만 '임을 위한 행진곡'이 가지고 있는 상징성과 의미는 30년간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해 싸워왔던 5·18의 살아있는 역사 자체"라며 "그 전까지 우리나라에 없었던 민중가요의 의미 역시 '임을 위한 행진곡'과 '5월의 노래' 이후 만들어졌다고 볼 수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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