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 백년과 여성]②안경신은 누구…항일 무력투쟁 외골수 '여전사'
최매지 "시종일관 무력 투쟁 앞장서"
평양 폭탄 거사 이후 재판정서도 의연
"조선 사람이 조선 독립운동, 무슨 죄"
"독립, 청원‧협상으론 달성 못해" 증언
【서울=뉴시스】안경신 선생. 2019.2.20(사진=국가보훈처 제공) [email protected]
3·1운동 등 평화적인 방식의 독립운동을 해오면서 무장 투쟁에 대한 신념이 더욱 굳어진 것으로 풀이된다. 3·1운동 이후 대한애국부인회에서 군자금을 전달하는 교통부원 역할을 하며 함께한 동지들의 증언들을 살펴보면 무장 투쟁에 대한 안 선생의 의지를 엿볼 수 있다.
대한애국부인회에서 서기를 맡았던 최매지는 안 선생에 대해 "독립투쟁가가 많이 있고 여성투쟁가도 수없이 있다. 그러나 안경신같이 시종일관 무력적 투쟁에 앞장서서 강렬한 폭음과 함께 살고 죽겠다는 야멸찬 친구는 처음 보았다"고 언급했다.
그러면서 "너무 강폭한 투탄 폭살 투쟁으로 오히려 해를 받는다면 항일투쟁에 가담 활동하지 아니함만 같지 못하게 아니냐고 물으면 그녀는 잔잔한 미소만 띠고 긍정하지 않았다"라고 말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안 선생이 임신한 몸도 개의치 않고 상해 임시정부 산하 대한광복군 총영에 들어가 평양 폭탄 거사에 참여한 이유는 이런 신념에서 비롯됐다. 그는 여성의 몸, 임신한 몸일지라도 자신의 신념에 비춰 해야 할 일이라면 하고, 해야 할 말이라면 하는 성격이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실제로 당시 그는 평양 폭탄 거사 이후 체포돼 아이를 안은 채 재판정에 섰음에도 의연한 모습을 잃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안 선생은 "조선 사람이 조선독립운동을 하여 잘 살겠다고 하는 것이 무슨 죄냐"라며 재판장을 향해 소리를 지르기도 한 것으로 전해진다.
안 선생의 강경 무장 투쟁 노선을 보여주는 증언은 또 있다.
대한애국부인회에서 함께 활동한 한 동지는 "안경신은 비록 몸은 작고 보잘 것 없이 생긴 외모를 가지고 있으나 그녀는 결코 그렇지 않다"며 "외모보다는 내면의 세계가 알차고 강인한 투쟁정신으로 일관되어 있음을 나는 확신한다"고 말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또 "한번은 나에게 ‘오늘의 사태를 해결하는 길은 독립의 청원이나 협상으로는 결코 달성될 수 없다. 협론으로 타결이 안 되는 상황 속에서 우리가 취할 약간의 가장 바람직한 방법은 무엇이 가장 가능할 것인가. 그것은 무력적 응징 외에 또 무엇이 있겠는가?’ 하였던 매몰찬 증언을 나는 극명하게 기억하고 있다"고도 언급했다.
외교적 노력 등 평화적인 방식의 독립운동에 대한 안 선생의 회의적인 시각을 엿볼 수 있다.
"너무 강폭한 투탄 폭살 투쟁으로 오히려 해를 받는다면 항일투쟁에 가담 활동하지 아니함만 같지 못하게 아니냐"는 최매지의 말이 독이 됐을까. 안 선생은 의연한 독립운동가들의 삶이 그렇듯, 강한 신념을 가진 만큼 괴로운 말년을 보내게 된다.
안 선생이 평양 감옥에 수감된 지 3개월도 되지 않아 그의 어머니는 세상을 떠나고, 낳자마자 감옥에서 기르게 된 아들은 영양부족으로 시각장애인이 된다. 평양 폭탄 거사에 함께한 둘도 없는 동지 장덕진은 1924년 상해 프랑스 조계에서 중국인과 시비가 붙어 중상을 당해 사망한다.
당시 안 선생은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어머니는 돌아가셨고 자식은 병신이오니 어느 것이 서럽지 않겠습니까마는 동지 장덕진 씨의 비명을 듣고는 눈물이 앞을 가리어 세상이 모두 원수같이 생각됩니다"라는 말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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