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현주 아트클럽]27세 요절한 '낙서화가 최고봉' 바스키아
아버지 같은 앤디워홀 사망 후유증
1년후 1988년 약물중독으로 짧은 생 마감
뉴욕 화단 혜성처럼 등장 8년간 회화등 3000점 남겨
1982년작 회화 '무제' 1380억 낙찰...세계 최고 그림값 기록
롯데뮤지엄서 회고전...EXO 찬열-세훈, 오디오 가이드
회화 조각 드로잉 세라믹 사진등 150 여점 소개
앤디워홀과 협업한 작품 5점도 공개
[서울=뉴시스] Untitled (Yellow Tar and Feathers), 1982, Acrylic, oil stick, crayon, paper collage, andfeathers on joined wood panels, 245.1×229.2cm. 사진=롯데뮤지엄 제공. 2020.10.07. [email protected]
'낙서'를 '작품'으로 승화시킨 대표 화가 장 미쉘 바스키아(1960~1988)가 다시 부활했다.
“나는 전설”이라고 했던 그의 말처럼 바스키아는 '현대미술 전설'이 됐다.
1988년, 만 27세라는 젊은 나이에 요절했지만 바스키아는 동시대에도 시각예술뿐만 아니라 패션 문화 아이콘으로 사랑받고 있다.
1980년대 초 미국 뉴욕 화단에 혜성처럼 나타난 바스키아는 생을 마감하기까지 8년동안 약 3000여 점의 작품을 남겼다.
왕관·저작권 기호©...낙서같은 그림 약 1380억원, 미국작가 최고 낙찰가
어릴적 그의 어머니는 바스키아를 데리고 뉴욕의 주요 미술관을 함께 다녔다. 그때 다빈치(Leonardo da Vinci)부터 피카소(Pablo Picasso)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명화룰 감상하며 미술사에 입문했다. 그의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해부학적인 인체 모습과 내장 기관들, 강조된 팔과 다리의 형태는 7세 때 당했던 사고와 연관된다.
바스키아는 1968년 교통사고로 팔이 부러지고 내장을 심하게 다쳐 병원에 입원했다. 비장을 떼어내는 큰 수술로 장기간 병원에 머물렀던 바스키아는 어머니가 선물한 해부학 입문서 '그레이의 해부학 Gray’s Anatomy'을 보면서 해부학적 형상에 관심을 보였다.
이후 바스키아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해부학 드로잉을 보면서 사고를 발전시켰고 이러한 지식은 그의 내면에 자리한 삶과 죽음에 대한 사유와 연결되면서 뼈와 해골, 신체 기관이 그대로 노출되는 독창적인 도상으로 나타난다.
바스키아 그림은 SAMO, 왕관, 저작권 기호©, 슈퍼맨에서 나온 알파벳 ‘S’, 공증인(Notary)을 의미하는 ‘NOTA’ 가 그려져있는게 특징이다.
위대함을 나타내는 도상들과 그가 존경했던 아프리카계 미국인 운동선수와 음악가들의 이미지를 결합해 새로운 방식의 초상화를 그려냈다.
한마디로 규정할 수 없는 바스키아의 예술세계는 쓰고 지우기를 반복하는 텍스트와 자유로운 드로잉이 만들어내는 이질적인 것들의 충돌에서 시작된다.
바스키아는 화면에 텍스트를 쓴 후 그 위에 선을 긋거나 덧칠을 해서 글자를 지워나간다. 가려진 문구들을 읽어내기 위해 더욱 집중해서 보게 만드는 바스키아의 지우기 전략은 그의 작품 전반에 걸쳐 나타난다.
무의식적으로 포착된 단어들과 이미지들을 나열해 익살스럽고 부조리한 의미를 생성시키는 그의 작품은 알파벳과 단어, 문장과 드로잉을 자유롭게 조합해 회화의 영역을 확장했다.
언어 체계가 가진 사회적 약속의 틀을 깨는 바스키아의 텍스트와 자유로운 드로잉은 사회적 편견과 억압에 대한 저항의 에너지로 점철되어 있다.
고상함과 저급함을 뒤섞고 시간의 흐름과 공간, 인과관계를 뒤엎는 퍼즐같은 작품은 20세기 시각문화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는 극찬을 받고 있다.
[서울=뉴시스] 장 미쉘 바스키아(1960~1988) Photo © Dmitri Kasterine. All Rights Reserved. Artwork © Estate of Jean-Michel Basquiat. Licensed by Artestar, New York’. 1960년 뉴욕 브루클린에서, 아이티공화국 출신의 아버지와 푸에르토리코 계 미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프랑스어가 모국어였던 아버지와 스페인어 를 쓰는 어머니 밑에서 성장한 바스키아는 영어와 프랑스어, 스페인어를 완벽하게 구사할 수 있었고, 이것은 그의 작품 속에 다양한 언어를 표현하는 초석이 된다.
장 미셀 바스키아는 누구
“나는 흑인 아티스트가 아니다. 단지 아티스트일 뿐이다.”
초기에는 그저 '낙서 같은 그림'으로 치부됐다. 뉴욕거리에 낙서나 하고 돌아다니는 '불량 청소년' 이미지였다.
1978년 고등학교를 자퇴하고 집을 나와 거리 생활을 하던 바스키아는 브루클린과 소호 거리 곳곳에 스프레이로 낙서를 시작한다.
친구 알 디아즈(Al Diaz)와 함께 ‘흔해 빠진 낡은 것(SAMe Old shit)’이라는 뜻을 담은 ‘SAMO© (세이모)’를 만들어 낙서 그림에 사인처럼 박았다.
간결한 문구에 담긴 비판적인 메시지를 담아낸 SAMO©는 당시 미술계에 신선한 충격을 주었고, 백인들로 뒤덮인 소호 지역의 갤러리들은 그들의 색다른 행보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바스키아는 1978년 말부터 친구 알 디아즈와 입장차이로 결별했으나, SAMO©라는 글자는 바스키아의 작품에서 그의 정체성을 대변하는 하나의 상징으로 자리 잡는다.
[서울=뉴시스] Old Cars, 1981, Acrylic, oil stick, and paper collage on canvas, 121.9×120.3cm. 2020.10.07. 사진=롯데뮤지엄 제공. [email protected]
큐레이터의 안목 지원...1982년 '낙서 미술가'→세계적인 작가로
바스키아의 재능을 한눈에 알아본 코르테즈는 그의 작품을 다량으로 구입하는 등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의 소개로 바스키아는 정식 미술판에 발을 디뎠다. 1980년 제니 홀저(Jenny Holzer), 케니 샤프(Kenny Scharf), 키키 스미스(Kiki Smith) 등이 참여한 대규모 그룹전 '더 타임스 스퀘어 쇼 The Times Square Show'와 1981년 뉴욕 PS1의 '뉴욕/뉴 웨이브 New York/New Wave'에 참여하게 되었고, 본격적으로 그의 작품이 미술관에 등장하기 시작했다.
119명의 미술가가 1600점 이상을 출품한 '뉴욕/뉴 웨이브' 전시에서 주목받았다. 바스키아는 자동차, 비행기, 도식적인 해골, 해부학적 인체 형상과 알 수 없는 문자들이 공존하는 15점을 출품, 미술계에 눈도장을 찍었다.
이후 1982년 아니나 노세이 갤러리에서 미국 첫 개인전을 시작으로, 언더그라운드 '낙서 미술가'에서 미국 화단의 떠오르는 신인 아티스트로 급부상한다.
같은 해 래리 가고시안(Larry Gagosian)의 초대로 로스앤젤레스에서 열린 개인전에서 하루 만에 모든 작품이 팔려나갔고, 유럽에서 가장 권위 있는 전시 중 하나인 '카셀 도큐멘타 7'에 작품을 출품하면서 세계적인 명성을 쌓아 나갔다.
[서울=뉴시스] 박민석 기자 = 시민들이 7일 서울 송파구 롯데뮤지엄에서 열린 장 미쉘 바스키아의 '거리, 영웅, 예술'전에서 작품들을 감상하고 있다. 2020.10.07. [email protected]
◇당대 스타 앤디워홀과 만남+죽음...27세 약물과다로 사망
바스키아는 '팝아트 황제' 앤디워홀을 만나면서 예술세계관을 확장한다. 1982년 10월 4일, 앤디 워홀의 운명적인 만남이 시작되었다. 바스키아는 워홀과 인사를 나눈 뒤 작업실로 돌아가 워홀의 초상화를 그리고 바로 다시 가져와 워홀에게 보여주었다.
고고한 예술영역에 얽매어 있지 않은 그림. 이때 바스키아의 천재성을 알아본 워홀은 바스키아와 함께 예술적 교감을 나누며 공동작업을 시작했다.
초창기 갤러리스트 브루노 비쇼프버거(Bruno Bischofberger)의 제안으로 프란체스코 클레멘테(Francesco Clemente)까지 세 명이 함께 시작한 협업 프로젝트는 1984년부터 워홀과 바스키아 둘만의 작업으로 진행됐다.
워홀이 먼저 실크스크린 기법으로 작품을 제작하면 바스키아가 마지막으로 거친 붓질로 글씨를 쓰고 지워 작품을 완성했다.
워홀에 의해 창조된 대중문화의 상품 이미지들은 바스키아에 의해 지워지고 채워지면서 새로운 의미로 재탄생했다. 바스키아는 실크스크린 화면에 유화, 아크릴 물감, 스프레이 등을 대담하게 사용하고 여러 단어들을 써 내려가면서 다양한 의미를 생성하는 작품을 완성했다.
이들은 1985년까지 2년간 150여 점이 넘는 작품들을 공동으로 제작하면서 많은 시간을 함께했다.
바스키아는 워홀을 의지하고 존경했으며 워홀에게 바스키아의 젊은 에너지는 새로운 예술적 동력이 되었다.
1987년 아버지와도 같았던 앤디 워홀이 수술 후유증으로 사망하자 바스키아는 큰 충격을 받는다.
바스키아는 삶에 대한 의지를 내려놓았다. 그와 관계를 맺었던 사람들과도 연락을 끊은 채 코트디부아르의 아비장(Abidjan)으로 이주할 결심을 한다. 그러나 바스키아는 이주를 엿새 앞둔 8월 12일 약물 과다로 유명을 달리한다.
‘거리의 이단아’에서 ‘세계 화단의 유망주’로 하루아침에 스타가 된 바스키아의 8년은 불꽃처럼 강렬했다. 그가 남긴 드로잉, 회화와 조각 작품, 3000여점은 그를 '반항하는 청춘의 아이콘'으로 재생하고 있다.
[서울=뉴시스] 박민석 기자 = 시민들이 7일 서울 송파구 롯데뮤지엄에서 열린 장 미쉘 바스키아의 '거리, 영웅, 예술'전에서 작품들을 감상하고 있다. 2020.10.07. [email protected]
◇롯데뮤지엄 '장 미쉘 바스키아•거리, 영웅, 예술'전 8일 개막
'죽어도 죽지 않는 화가'가 된 바스키아는 불안한 코로나 시대, 희망의 메시지를 전한다. 낙서같은 그림은 아이같은 순수함과 해방감을 선사하며 몰입하게 한다.
서울 잠실 롯데뮤지엄에서 바스키아 대규모 회고전이 열렸다. '장 미쉘 바스키아 •거리, 영웅, 예술' 전을 주제로 회화, 조각, 드로잉, 세라믹, 사진 작품 등 150 여점을 선보인다.
뉴욕 거리에서 시작된 SAMO© (세이모)시기를 기록한 사진 작품을 중심으로 바스키아의 초창기 작품뿐만 아니라 앤디 워홀과 함께한 대형 작품도 전시된다.
두 명의 전설적인 천재 화가의 독창적인 작업 방식이 교차하는 협업 작품 5점이 공개됐다. 또한 앤디 워홀 일기에서 발췌한 바스키아와 함께 한 기록들을 통해서 두 거장이 나눈 친밀한 일상의 모습도 만나볼수 있다.
워홀의 기계적인 이미지에 바스키아의 저항적이고 즉흥적인 붓질을 결합해, 대중문화와 물질주의의 양면적 모습을 폭로하는 두 천재 화가의 역동적인 예술세계를 볼 수 있는 좋은 기회다.
아이가 그린듯 낙서같은 그림은 이젠 그림을 넘어 옷, 컵,악세서리, 문구류까지 점령해, '바스키아 예술은 일상'이 됐다.
이번 전시는 삶의 부조리한 가치에 의문을 던지며 삶과 예술의 경계에서 누구보다 긴 여운을 남긴 바스키아의 예술 세계를 직접 경험할 수 있는 최고의 전시다.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확산 방지를 위해 시간별 관람 인원을 제한하여 사전예약제로 진행한다. 오전 10시 30분부터 오후 7시까지 30분 간격으로 입장권을 구매할수 있다.
한편 바스키아 전시의 오디오 가이드는 네이버 오디오클립 앱을 통해 들을 수 있다. K-POP 대표 아티스트 EXO 찬열과 세훈이 보이스 앰버서더로 참여하여, 전시 내용을 더 친근하고 흥미롭게 들려준다. 전시는 2021년 2월7일까지.
[서울=뉴시스] 박민석 기자 = 시민들이 7일 서울 송파구 롯데뮤지엄에서 열린 장 미쉘 바스키아의 '거리, 영웅, 예술'전에서 작품들을 감상하고 있다. 2020.10.07. [email protected]
[서울=뉴시스] 박민석 기자 = 시민들이 7일 서울 송파구 롯데뮤지엄에서 열린 장 미쉘 바스키아의 '거리, 영웅, 예술'전에서 작품들을 감상하고 있다. 2020.10.07. [email protected]
[서울=뉴시스] 박민석 기자 = 시민들이 7일 서울 송파구 롯데뮤지엄에서 열린 장 미쉘 바스키아의 '거리, 영웅, 예술'전에서 작품들을 감상하고 있다. 2020.10.07.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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