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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73주년]행불인 유족 김필문씨…“아버지는 빨갱이가 아니다”

등록 2021.04.02 08:0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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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산간에 살았단 이유로 아버지 군에 끌려가 불법 재판”

제주4·3행방불명인유족협의회 회장하며 재심 청구 결심

수형인명부 2530명 올랐지만 무죄 판결 400명 채 안 돼

“미군정 책임론·진상규명 등 올바른 역사 정립 위한 과제”

[제주=뉴시스]우장호 기자 = 김필문 전 제주4·3희생자유족행방불명인유족협의회장이 3월29일 제주 시내 한 사무실에서 뉴시스 제주본부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2021.04.01 woo1223@newsis.com

[제주=뉴시스]우장호 기자 = 김필문 전 제주4·3희생자유족행방불명인유족협의회장이 3월29일 제주 시내 한 사무실에서 뉴시스 제주본부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2021.04.01 [email protected]

[제주=뉴시스] 양영전 기자 = “우리 아버지는 빨갱이가 아닙니다.”

지난 2월과 3월, 제주4·3과 관련해 그동안의 역사와 함께 모든 국민이 명념(銘念)할 ‘사건’이 추가됐다. 2월26일 4·3특별법 전부개정안이 국회 문턱을 넘은 것과 3월16일 4·3행방불명수형인에 대한 법원의 무죄 선고가 그것이다. 두 번째 ‘이정표’가 세워지기까지 “불법 군사재판을 받은 수형인들은 무죄다”를 외치며 유족들 앞에 선 이가 있다. 김필문(76) 전 제주4·3행방불명인유족협의회 회장이다.

김 전 회장은 70여년 전 “낫 놓고 기역 자도 몰랐다”는 평범한 농사꾼 아버지가 군인에게 끌려갈 당시 우리 나이로 3살에 불과했다. 할머니와 어머니, 누나 등 3명과 함께 남겨진 김 전 회장은 어린 나이부터 집안에 가장이 돼야만 했다.

얼마 전까지 제주4·3행방불명인유족협의회 회장을 지낸 그는 ‘4·3 희생자 추념일’을 며칠 앞둔 지난달 29일 뉴시스 취재진과 만나 “4·3의 완전한 해결을 위해 아직도 해야 할 일이 많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1948년 당시 약 30만이었던 도민 중 무려 3만여명이 군·경과 서북청년단 등으로 구성된 ‘토벌대’에 죽임을 당한 제주에는 ‘4·3 유족 아닌 사람이 없다’는 말이 있다. 당시 미군정 아래 좌·우 대립 상황에서 토벌대는 이념과 사상이 뭔지 알지도 못했던 무고한 양민들에게 ‘빨갱이’라는 누명을 씌웠다.

그는 “힘없고 똑똑하지 못한 무고한 양민들은 죄다 끌려갔다”고 제주도민의 10분의 1이 처참하게 학살된 4·3을 기억한다. 제주시 영평동에 살던 김 전 회장의 아버지도 그해 11월 35세의 젊은 나이에 군인들에게 잡혀갔고, 곧 대구형무소로 보내졌다.

“당시 무장대가 산으로 올라갔으니 (우리가) 중산간에 살고 있던 게 죄목이지요. 젊고, 똑똑하게 변명하지 못하고, 흔히 말하는 ‘빽’이 없으면 그냥 다 끌려간 거예요. 우리 아버지도 그렇게 잡혀가 불법 군사재판을 받은 거죠.”

[제주=뉴시스]우장호 기자 = 김필문 전 제주4·3희생자유족행방불명인유족협의회장이 3월29일 제주 시내 한 사무실에서 뉴시스 제주본부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2021.04.01 woo1223@newsis.com

[제주=뉴시스]우장호 기자 = 김필문 전 제주4·3희생자유족행방불명인유족협의회장이 3월29일 제주 시내 한 사무실에서 뉴시스 제주본부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2021.04.01 [email protected]

전국 각지 형무소로 흩어져 수감됐던 이들은 6·25전쟁을 전후해 행방불명됐다.

◇불법 군사재판 수형인…법원 ‘무죄’ 선고

가난한 시절에다 어수선한 시대 상황까지 겹쳐 진학률이 낮았던 시기에도 고등학교까지 나왔지만, 김 전 회장의 출석률은 줄곧 ‘꽝’이었다. 집안에 남자는 자기뿐이라 밭을 임대하고, 소를 빌려 농사를 지어 생업을 이어가야 했기 때문이다. 그는 “중학교 1학년 때 처음 밭을 갈기 시작했다. 이웃에 소를 빌려 밭가는 걸 가르쳐 가며 농사를 지었다”며 “방학이나 휴일엔 무조건 밭에 있었고, 농번기 때는 결석해가며 농사일을 했다”고 회고했다.

이후 회사 생활을 하다 2017년 제주4·3행방불명인유족협의회 회장 대행을 시작으로 2018년 1월부터 2년간 회장으로서 정식 임기를 수행했다. 행불인 수형자 10명에 대한 재심 청구(2019년 6월)를 한 것도 회장 임기를 지내던 때였다. 해를 2번 넘긴 2021년 1월 법원은 이들 10명에 대해 무죄 판결을 내렸다.

당시 불법 군사재판으로 수형인명부에 오른 이는 2530명. 이들에게 쓰인 죄목은 내란죄와 이적죄(국방경비법 위반)다.

김 전 회장은 “재판 과정이 도저히 이해가 안 돼서 재심을 청구해야겠다고 생각했다”며 “4·3행불인 호남·대전·영남·경인·제주 지역위원회에서 (희생자) 2명씩만 우선 추려서 재심 청구를 하게 된 건데, 실제 각 지역위원회에서 파악한 행불인 숫자는 5000명이 넘었었다”고 설명했다.

[제주=뉴시스]우장호 기자 = 제주 4·3 73주년 추념일을 이틀 앞둔 1일 오후 제주시 봉개동 4·3평화공원 내 행방불명인 묘지에 비가 내리고 있다. 4·3특별법 전부 개정안이 공포된 이후 처음 치러지는 의미를 담아 올해 추념식의 주제는 '돔박꼿이 활짝 피엇수다'(동백꽃이 활짝 피었습니다)로 정해졌다. 2021.04.01 woo1223@newsis.com

[제주=뉴시스]우장호 기자 = 제주 4·3 73주년 추념일을 이틀 앞둔 1일 오후 제주시 봉개동 4·3평화공원 내 행방불명인 묘지에 비가 내리고 있다. 4·3특별법 전부 개정안이 공포된 이후 처음 치러지는 의미를 담아 올해 추념식의 주제는 '돔박꼿이 활짝 피엇수다'(동백꽃이 활짝 피었습니다)로 정해졌다. 2021.04.01 [email protected]

“재심 판결 당시 사법부가 ‘정의’를 찾아준 것에 관해서도 고마웠지만, 특히 죄를 묻는 검사가 ‘그동안 유족들이 얼마나 응어리진 마음으로 살고 계셨겠나, 남은 인생은 부디 마음 편하게 사시라’고 말한 것에 너무 감격했어요.”

10명에 대한 무죄 판결 2개월여 뒤인 지난달 16일 법원은 행불인 수형자 331명에 대한 추가 재심에서도 전원 무죄를 선고했다.

◇4·3특별법 전부 개정안 국회 통과…“아직도 과제가 많아”

김 전 회장은 아버지가 6·25 전쟁 발발 이후 현재 대구 달성군에 들어서 있는 가창댐 인근에서 죽임을 당했다고 전해 들었다. 2년마다 학살터를 방문해 아버지 이름을 목 놓아 부른다는 그는 아버지 얘기를 전하며 눈시울을 붉혔다.

“당시 대구형무소에 수감된 재소자들이 일명 가창골, 경산 코발트 광산 등지에서 대규모로 학살됐다. 유골도 찾지 못해 가슴에 묻어 두고 평생을 살아왔어요.”

제주시 봉개동 제주4·3평화공원에는 김 전 회장의 아버지와 같이 4·3 당시 행방불명된 이들의 표석 4000여개가 세워져 있다. 다른 행불인 후손들처럼 김 전 회장도 아버지의 유해만이라도 찾을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어디선가 마음 편히 눈 감지 못하고 있을 영혼들을 위해 정부가 올바른 진상규명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는 게 그의 주문이다.

[제주=뉴시스]우장호 기자 = 제주 4·3 73주년 추념일을 이틀 앞둔 1일 오후 제주시 봉개동 제주4·3평화공원 내에 아무것도 적혀있지 않은 '백비'가 놓여있다. 백비란 어떤 까닭이 있어 아직 글을 새기지 못한 비석을 말한다. 2021.04.01 woo1223@newsis.com

[제주=뉴시스]우장호 기자 = 제주 4·3 73주년 추념일을 이틀 앞둔 1일 오후 제주시 봉개동 제주4·3평화공원 내에 아무것도 적혀있지 않은 '백비'가 놓여있다. 백비란 어떤 까닭이 있어 아직 글을 새기지 못한 비석을 말한다. 2021.04.01 [email protected]

“해방 이후 남한은 미국의 통치 아래 있었어요. 4·3 당시 제주에선 반쪽짜리 정부가 아닌 남한과 북한이 함께하는 통일 정부를 만들려는 움직임이 있었던 겁니다. 미군정 하에서 이를 탄압하는 과정 중에 민간인이 무고하게 죽어간 건데, 미국의 책임론에 대해선 아직도 논의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어요. 배·보상도 중요하지만, 올바른 역사를 정립하려면 이를 포함해 진실한 진상규명이 필요한 거죠.”

지난 2월26일 4·3특별법 전부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했다. 희생자에 대한 배·보상, 수형인 명예회복, 추가 진상조사 등의 내용이 담겼는데, 이와 관련해서도 김 전 회장은 아쉬운 점을 드러냈다. 그는 “정부가 배·보상과 관련해 보상 규모, 방안 등에 대해 용역을 거쳐 지급하겠다는 건데, 법령에는 배·보상이 아니라 ‘위자료’라고 명시돼 있다”며 “국가 폭력에 의한 희생인데 배·보상이 아니라 위로를 한다는 뜻 아니냐”고 꼬집었다.

실제로 해당 문구를 두고 당시에도 논란이 있었다. 사전적 의미로 보면, 배상(賠償)은 ‘남의 권리를 침해한 사람이 그 손해를 물어주는 것’이고, 보상(補償)은 ‘남에게 끼친 손해를 갚는 것’인데, 위자료(慰藉料)에는 ‘위로하고 도와준다’는 의미가 강하게 내포돼 있어서다. 특히 정부가 이미 4·3을 ‘국가공권력에 의해 민간인이 희생당한 사건’으로 규정했기 때문에 의미가 퇴색했다는 지적이었다.

“생각해보면 배·보상을 해주고, 명예를 회복해준다고 해서 죽은 사람이 돌아오는 건 아니에요. 산 자로서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최대한 해나가는 것인데, 정책 결정 과정에서 희생자와 그 유가족들의 마음을 세심하게 헤아려 주기를 바라는 거죠.”

그는 인터뷰 끝 무렵 이렇게 말했다.

“우리 아버지는 빨갱이가 아닙니다. 불법 군사재판을 받은 수형인 모두 빨갱이가 아닙니다.”


◎공감언론 뉴시스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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