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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기 '아침이슬'·'상록수'·'공장의 불빛'…노래가 아닌 시대였다

등록 2024.07.22 17:58:59수정 2024.07.24 13:2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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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포크·싱어송라이터의 시작점

[서울=뉴시스] 김민기. (사진 = 학전 제공) 2024.07.22. photo@newsis.com *재판매 및 DB 금지

[서울=뉴시스] 김민기. (사진 = 학전 제공) 2024.07.22. [email protected] *재판매 및 DB 금지

[서울=뉴시스]이재훈 기자 = "나 이제 가노라 저 거친 광야에 / 서러움 모두 버리고 나 이제 가노라"('아침이슬' 中)

위암 투병 끝에 21일 별세한 '포크 대부' 김민기(73)의 가수 활동은 짧지만 굵었다. 그의 선율과 가사는 거친 광야 같은 우리 삶 속에서 노래를 넘어 시대가 됐다.

김민기는 1969년 서울대 회화과에 입학했다. 아르바이트를 하며 그림물감 값을 조달하던 그에게 고교동창 김영세가 찾아왔다. 김영세는 레인콤의 아이리버 MP3 플레이어를 디자인해 유명한 그 이노 디자인 전 대표다.

두 사람은 '도깨비 두 마리'라는 뜻의 포크듀오 '도비두'를 결성했다. 대학가는 물론 시내 음악다방에서 노래생활을 시작했다. 특히 두 사람은 1970년 명동에서 문을 연 서울YWCA 청개구리의 집 창단멤버가 됐다. 한국 포크의 메카로 통하는 곳이다. 

그 해 여름 가수 양희은은 도비두의 노래를 들었다. 그리고 김민기는 고교동창 임문일의 소개로 재동초교 1년 후배인 서강대 재학생 양희은과 만나 명곡들을 빚어낸다.

김민기는 양희은의 노래 기타 반주를 맡았다. 나아가 1971년 9월 '아침이슬' '그날' 등이 수록된 양희은의 1집에서 작사·작곡을 맡았다. 그 해 10월엔 '아침이슬'을 비롯 '친구', 한대수가 쓴 '바람과 나' 등이 실린 자신의 데뷔 음반을 내놓았다.

시대를 담은 시적인 노랫말, 담백한 멜로디, 철학적인 메시지 등으로 인해 김민기는 한국 포크 음악 그리고 싱어송라이터의 시작으로 통한다. "대한민국 싱어송라이터의 정전(正傳). 노랫말과 선율, 음성은 물론이고 메시지와 향후 행보까지 총합해 삶 자체를 커다란 흐름의 음악으로 만들어낸, 강물과 같았던 예인"(임희윤 음악 평론가)라는 평이 나오는 이유다.
[서울=뉴시스] 김민기. (사진 = 학전 제공) 2024.07.22. photo@newsis.com *재판매 및 DB 금지

[서울=뉴시스] 김민기. (사진 = 학전 제공) 2024.07.22. [email protected] *재판매 및 DB 금지

김민기가 '한국 포크'의 문을 열었다는 전제는 논문으로도 증명된다. 박기영 씨가 쓴 단국대 석사 논문 '이식 그리고 독립 : 한국 모던포크 음악의 성립과정'(1968~1975)에서 '한국 모던포크 음악 성립기의 창작곡 대 번안곡 비율의 변화 추이'를 살펴보면 1971년에 35.1%에 머물고 있던 창작곡의 비율이 1972년에는 62.4%로 급증했는데, 이후 계속해서 급격한 상승세를 보였다. 그리고 1971년과 1972년의 사이엔 김민기의 앨범이 존재하고 있다고 논문은 썼다.

하지만 '아침이슬'은 김 대표에겐 한동안 족쇄와도 같았다. 초창기엔 건전가요로 지정됐다. 널리 장려되던 시절을 보냈다. 하지만 불과 2년 뒤, 1972년 '10월 유신'이 있고 금지곡이 됐다. 불온하다는, 말도 안 되는 이유였다. 1년 전 '건전가요 서울시문화상'을 받았던 곡이었다.

1987년 시청 앞에서 열린 이한열 열사 노제 때 '아침이슬'을 100만명이 함께 부르는 모습을 본 김민기가 "아, 이제 내 노래가 아니구나"라고 생각했다는 일화도 유명하다.

양희은이 불러 유명해진 '상록수'(1979)도 김민기의 손에서 태어났다. 그가 대학을 그만두고 부평 봉제공장에 다니던 시절에 지은 노래다. 뒤늦게 합동결혼식을 올린 동료들을 위해서였다. 서러운 현실에 손 맞잡고 나가자는 노래였는데, 젊은층의 의식화를 조장한다며 유신정권 시대 금지곡이 됐다. 민주화 이후엔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곡이 됐다. 1998년 정부 수립 50주년 기념 TV캠페인 주제곡으로 사용된 것이다.

1978년 겨울 이화여대 방송반 스튜디오에서 녹음된, 국내 민중가요 불법음반의 효시로 통하는 노래굿 '공장의 불빛'도 김민기와 시대를 대표하는 곡이다. 김민기가 작사, 작곡한 이 노래굿은 당시 동일방직 노조탄압에 대한 저항이었다.

단호한 노랫말들은 울분에 휩싸였던 노동자·학생들의 목소리를 대변하며 은밀히 퍼져나갔다. 김창남 성공회대 교수(한국대중음악상 전 선정위원장) 등이 이 노래굿 중 남성 합창에 참여, '돈벌어'라는 목소리를 보탰다. 서정적인 멜로디나 가사가 아닌 '공장의 불빛' 같은 것도 노래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이 당대 젊은이들에게 충격을 안겼다.
[서울=뉴시스] 김민기. (사진 = 학전 제공) 2024.07.22. photo@newsis.com *재판매 및 DB 금지

[서울=뉴시스] 김민기. (사진 = 학전 제공) 2024.07.22. [email protected] *재판매 및 DB 금지

노래 형식만큼 충격적으로 받아들였던 건 카세트 테이프 활용이었다. 당시 카세트 테이프는 노동자를 비롯해 모든 이에게 퍼지고 있던 '민주적 매체'였다. 80년대 초 독재정권 당시 지하로 숨어들었지만, 널리 퍼졌던 이유다.

물론 '아름다운 사람', '바다', '백구' 같은 아름다운 노래들도 김민기 노래의 한켠에 자리한다.

김민기는 1993년 총 네 장으로 된 '김민기 전집'을 발매했다. '아침이슬' '상록수' '친구' '봉우리' '날개만 있다면' 등 김민기가 그간 발표한 곡들이 총망라됐다.

노래 부르는 걸 지극히 부끄러워하는 데다 무엇보다 자신의 이름을 드러내는 걸 싫어하는 김민기의 성향을 아는 이들에겐 이례적인 음반이기도 했다. 하지만 1991년 문을 연 학전 운영 자금을 위해 그가 이 음반 제작을 수락했다는 건 잘 알려진 일화다. 김민기 전집은 현재 온라인 상에서 고가에 재판매되고 있지만 사실 함부로 값어치를 매길 순 없다.

이후 김민기는 '지하철 1호선' 등 뮤지컬 그리고 어린이·청소년극 연출·제작에 매진했다. 앞것이 아닌 뒷것을 자처하며 함부로 나서지 않았다. 특히 김민기는 자신을 시대의 상징 또는 문화예술계 우상화하는 작업을 지극히 불편해했다. 

김민기와 학전 뮤지션, 배우들의 아지트였던 학림다방 이충열 대표는 '학전, 어게인 콘서트' 당시 "김민기 대표님은 당신의 LP를 틀면 혼을 냈다"고 기억하기도 했다.


◎공감언론 뉴시스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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