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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철이야기⑦]돌아온 이병철 전자산업에 뛰어들다

등록 2013.06.29 06:00:00수정 2016.12.28 07:4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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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정리/우은식 기자 = 1968년 1월 1일. 첫눈이 소복한 날, 이병철 회장은 회사로 돌아왔다.

 두루마기 차림으로 새해맞이 행사장에 모습을 드러낸 그를 중역들은 우레와 같은 박수로 맞았다. 이병철 회장도 스스로가 살아 있음을 느꼈다. 그는 그 자리에서 ‘삼성의 제2 창업’을 선포했다.

 “오늘날과 같은 치열한 기업 풍토에서 옛 것을 고수하는 일은 정체와 퇴보를 의미할 뿐입니다. ‘진보는 가장 중요한 생산이다’라는 미국의 경영 이념은 우리의 기업 현실에도 적용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삼성그룹은 새로운 체제를 정비해 내적 충실을 기하면서 창조적 아이디어를 모을 것입니다. 자금 운영의 방법, 신규 사업의 발굴 등에 전력을 다해 기업의 지속성을 보장하겠습니다.”  

 그의 신년사에 담긴 의지는 삼성그룹 직원들에게 큰 위로와 기대를 안겨주었다. 그가 경영 일선에서 물러난 지 1년 3개월 만의 일이었다.

 이병철 회장은 복귀하자마자 삼성물산의 젊은 인재를 중심으로 개발부를 새로 만들었다. 새로운 사업에 대해서 타당성 조사와 자료를 수집하기 위해서였다. 당시엔 이병철 회장이 예고했던 새로운 사업이 구체적으로 무슨 사업인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얼마 후 그들에게 ‘전자 산업’이라는 미션이 주어졌다. 이병철 회장은 1년여 동안 자연농원에서 칩거했지만 다행히 경영 흐름의 끈을 놓치지 않았고, 복귀를 생각하면서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이 바로 전자 산업이었다.

 직원들은 처음에 전자 산업이라는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당시 흑백 텔레비전은 웬만한 월급을 받는 사람이 사기엔 엄두도 못 낼 정도로 비쌌다.

 또 세계 시장에서 전자 산업은 유럽과 미국의 뒤를 이어 일본이 주름 잡고 있었다. 우리나라에서 이미 손을 댄 기업들도 있었지만 외국산 부품을 들여와서 조립하는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그래서 전자 산업은 뚜렷한 비전이 없는 분야로 여겨지고 있었다. 그런데 이병철 회장은 생각이 달랐다. 기술 혁신과 대량 생산을 해 가격을 낮추고 수요를 높이면 충분히 승산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전자 산업은 내수와 수출 모두 전망이 괜찮은 산업이야. 정부도 전자 공업 개발에 힘쓰겠다고 발표했고.’

 개발부 직원들도 처음에는 미심쩍어했지만 타당성 조사를 마친 후에는 이병철 회장의 생각이 옳았음을 인정했다.

 이병철 회장은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재계의 거물인 이우에 토시오 산요전기 회장을 만났다. 그는 산요 공장을 비롯한 전자 업계를 두루 시찰했다.

 도쿄에 있는 산요전기 단지를 보고 이병철 회장은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그 규모가 132만㎡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곳에서 텔레비전, 에어컨, 냉장고 등의 가전제품이 쏟아져 나와 창고에 차곡차곡 쌓이는 것을 보니, 전자 산업이 머릿속으로만 생각하던 것보다 훨씬 대단하다는 걸 실감했다.

 ‘전자 산업이야말로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산업이요, 부가가치가 99.9%에 이르는 산업이로군.’

 이병철 회장은 국내로 돌아오자마자 삼성 본관으로 직행해 간부 회의를 소집했다.

 “기술 개발 능력을 최단 시간 안에 보유해야 합니다. 전자 공업 단지는 크게 지을 생각입니다. 135만 3000㎡ 이상의 공장 터를 물색하도록 하십시오.”

 “회장님, 직원도 500명에서 600명이면 충분할 텐데, 그렇게 넓은 땅을 어디에 쓰시겠다는 건지요?”

 임원들은 의아해했다.

 “도쿄에 있는 산요전기 공장은 132만㎡요. 그렇다면 우리는 그들보다 1평(3.3㎡)이라도 더 큰 단지를 지어야 합니다. 지금은 135만 3000㎡가 너무 크게 보일지도 모르지만 머지않아 더 많은 땅을 필요로 할 것입니다.”

 이병철 회장의 설득으로 임직원들은 수원의 매탄동에 148만 5000㎡의 땅을 공장 터로 매입했다. 원래 계획했던 것보다 13만 2000㎡나 넓은 규모였다.

 그러자 사회 여론은 삼성이 부동산 투기에 뛰어들었다고 비판하기 시작했다. 당시 국내에서 큰 공장이라고 해봤자 수만 ㎡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들끓는 여론에도 불구하고 이병철 회장의 의지는 굳건했다.

 ‘누가 무어라 하든지 내 길을 가겠어.’

 이병철 회장은 1969년 12월 삼성이 50퍼센트의 자본을 출자하고, 일본 산요전기가 40%, 스미토모상사가 10%를 출자하여 ‘삼성산요전기’를 설립했다. 이렇게 삼성은 1958년 금성사(현 엘지전자)가 설립된 지 10여 년 만에 후발주자로 전자 업계에 뛰어들었다.

 금성사는 첫 국산 라디오 ‘A-501’을 히트시키면서 국내 가전 시장을 거의 독점하고 있었다. 삼성이 전자 산업을 시작하면 가장 큰 라이벌이 되는 셈이었다. 그런데 이병철 회장은 한 가지가 마음에 걸렸다. 바로 금성의 창업주 구인회 회장이였다. 구인회 회장은 이병철 회장과는 어려서부터 함께 자란 죽마고우이자 ‘동양방송’을 공동 설립하고, 사돈까지 맺은 막역한 사이였다.

 ‘내가 아무리 절친한 친구라 해도 구 회장으로서는 달가울 리 없겠지?’

 고민은 되었지만 회사의 운명을 건 사업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아무 말 않고 일을 벌이는 것도 내키지 않았다.

 1968년 봄, 안양골프장(현 안양베네스트GC). 이병철 회장은 구인회 회장과 골프 약속을 잡았다. 장남과 함께였다. 그는 늘 하던대로 약속 시간보다 일찍 골프장에 도착해서 준비했다.

 “어이, 사돈!”

 멀찍이서 구인회 회장이 반갑게 손을 흔들며 인사를 건넸다. 이병철 회장의 마음이 무거워졌다.

 “오늘도 일찍 나왔구만. 그러니 잔디 위의 칸트라고 하는 게 아닌가.”

 구인회 회장은 오랜 지기에게 농담을 던지며 필드로 향했다.

 “날 좋다. 오늘은 어쩐지 공이 잘 맞을 것 같네.”

 라운딩은 평소와 다름없이 진행되었다. 골프는 이병철 회장이 가장 즐기는 운동으로 한국에 제대로 된 골프장이 생기기 전부터 골프를 배웠다. 해외 바이어들과도 골프 회동을 즐겼다.

 “골프를 해보면 그 사람 됨됨이를 알 수 있어.”

 이병철 회장의 지론이었다. 때문에 이병철 회장은 경영 전선을 떠나 있는 동안 안양 골프장을 지었고, 나무 한 그루까지도 직접 골라 심고 가꾸었다. 라운딩 중간에 잠시 쉬는 시간, 사방의 푸르른 잔디와 나무들을 바라보는 것이 이병철 회장의 낙이었다.

 그러나 경영에 복귀하고 나니 예전만큼 자연에 푹 빠져들 수가 없었다. 다시 목표를 향해 달려가야 할 때였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오늘은 더욱 여유가 없었다. 종종 결단의 장소로도 이용하던 골프장, 오늘도 그는 어렵지만 꼭 필요한 결단을 내려야 했다.

 “구 회장! 우리도 앞으로 전자 산업을 할까 하네.”

 이병철 회장은 어렵게 말을 꺼냈지만 최대한 가볍게 지나가는 듯이 이야기하려 애썼다. 구인회 회장의 표정이 단번에 굳었다. 그의 눈빛은 ‘다른 사람도 아닌 자네가 그럴 수 있나?’라고 책망하는 듯했다. 구인회 회장은 벌떡 일어서서 그 길로 자리를 떠났다. 옆에 있던 장남이 어쩔 줄 몰라 하며 이병철 회장을 살폈다.

 “붙잡지 않으십니까?”

 이병철 회장은 이미 예상했던 일이었다. 지금 붙잡은들 무엇 하겠는가. 사활을 건 사업을 놓고 두 회사가 사이좋게 경쟁할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구 회장은 그릇이 큰 사람이니, 언젠가는 나를 이해할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병철 회장이 본격적으로 전자 산업에 진출하자 구인회 회장과의 관계는 최악의 사태로 치달았다. 작별 인사도 없이 헤어진 두 사람은 동양방송(현 KBS2)의 동업 관계도 끊고 말았다. 이런 최악의 상황에도 이병철 회장은 결코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아니 굽힐 수가 없었다.

 ‘기업 경영이 아이들 소꿉장난인가. 개인적인 감정에 휘둘려서는 안 돼.’

 "삼성이 일본 업체를 끌어들여 국내에 막 움트기 시작한 전자 산업의 싹을 제거하려 한다.”  “삼성이 민족 자본을 말살하려는 매판 행위를 하고 있다!”

 삼성이 일본 산요전기와 합작을 통해 삼성전자 설립을 준비하자 기존 59개 전자 업체들로 구성된 한국전자공업협동조합도 대대적으로 반대하고 나섰다. 삼성의 합작 투자는 전자 산업 발전이 아니라 단순 조립에 지나지 않으므로 절대 허용해서는 안 된다는 게 핵심이었다.

 삼성은 텔레비전과 라디오 생산량 중 15%만 국내에서 팔고 나머지는 모두 수출할 방침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15%도 허용하지 말아야 한다는 게 기존 업체들의 주장이었다. 가뜩이나 좁은 시장을 후발업체인 삼성에게 내줄 수 없다는 생각이 강했다.

 그런데 다행히도 정부가 숨통을 열어주었다. 정부는 전자 산업을 육성하기 위해 ‘생산 물량 전부를 해외에 수출한다’라는 조건을 달아 삼성의 전자 산업 진출을 허가했다.

 삼성과 금성!

 전자 업계에 있어서 두 맞수의 피할 수 없는 경쟁의 역사는 이렇게 시작했다.

 삼성이 각고의 노력으로 전자 산업에 뛰어들었지만 라디오, 세탁기, 텔레비전 등 생활 가전 분야에서 삼성은 만년 2위였다. 특히 흑백텔레비전 시장에서는 금성이 압도적으로 우세했다.

 이병철 회장은 자존심이 상했다. 언제나 일등 제품을 만들고자 했던 그였다. 그 뿐 아니었다. 삼성이 초기에 만든 선풍기는 조악했다.

 “이것 보세요. 선풍기 바꿔주세요. 아니, 아예 돈으로 다시 내줘요!”

 선풍기는 손으로 들어 올리면 목이 자주 부러지는 사태가 발생했고, 고객들의 항의가 빗발쳤다. 하는 수 없이 삼성전자는 선진국의 유명 제조업체가 생산한 제품을 사들여 부품을 뜯어내고 다시 조립을 해가며 기술을 연구했다. 그러나 기술은 쉽게 따라할 수 없었다.

 냉장고는 금성의 상대가 안됐다. 삼성이 고전한 가장 큰 이유는 ‘원천 기술’을 확보하기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삼성이 삼성산요전기 공장을 건설할 무렵 이우에 사토시 산요전기 회장이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그러자 믿었던 산요전기의 태도는 돌변했다.

 “공장 규모를 3분의 1로 줄입시다.”  “부품 공장을 먼저 짓는 것이 좋겠습니다.”

 터무니없는 요구가 계속 이어졌다. 그들은 기술 전수와 냉장고 공장 건설을 빨리 추진하겠다는 이병철 회장의 제의도 무시했다.

 “회장님, 산요전기 측에 나가 있는 연수생들의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무슨 소린가요?”

 “주요 부품의 설계 도면이나 가방은 서류 가방에 넣어 가지고 다니면서 절대로 볼 수 없게 한답니다. 혹시 기술을 빼갈까봐 텔렉스실(텔렉스 : 전화의 자동 교환과 인쇄 전신의 기술을 이용한 기록 통신 방식) 문은 꼭 잠그고 다니고, 생산과정에서 문제가 생겨도 우리 기술자들은 모두 밖으로 내보내고 자기들끼리 해결한답니다.”

 이병철 회장은 화가 났다. 그들의 무례한 태도에 상처 입었을 직원들을 생각하니 피가 거꾸로 솟는 듯했다. 그러나 말은 냉정하게 했다.

 “그게 다 모르니까 당하는 수모입니다. 그럴수록 참고 기술을 익혀야 합니다.”

 이병철 회장은 보란 듯이 텔레비전을 만들어 전자 산업 후발주자의 약점을 보완하려 했지만 산요전기는 합작 투자를 한 지 2년이 지나도록 텔레비전 공장 하나 제대로 건설하려고 하지 않았다.

 한 술 더 떠서 100% 수출 조건으로는 합작은 물론 기술 제휴도 할 수 없다고 나왔다. 결국 부품 납품권도 산요전기에서 장악했다. 한국의 값싼 임금만을 이용하려는 속셈이었다.

 국내에서 조립한 제품에는 산요전기 상표를 붙여야 했고, 정부의 배려로 조금이나마 국내에서 팔게 된 제품에도 삼성의 상표를 붙일 수 없었다.

 이병철 회장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그는 텔레비전 생산 시설을 직접 들여오기로 했다. 또 일본에서 수입하던 브라운관 유리도 국내에서 생산할 계획을 세웠다. 1972년 텔레비전 공장 건설이 끝나자 중대 발표를 했다.

 “산요전기의 투자분을 모두 인수하겠습니다.”

 이병철 회장은 산요전기와의 합작을 깨끗이 청산하기로 했다.

 1972년 11월, 이병철의 끈질긴 노력은 빛을 발했다. 삼성이 만들었다고 당당히 밝힌 텔레비전이 미국에 수출되어 ‘엉클 샘’이라는 애칭까지 얻으며 불티나게 팔린 것이었다.

 1973년 말, 삼성 텔레비전의 국내 시판이 허용되자 적자를 흑자로 전환시킬 수 있었다.

 ‘그래, 핵심은 기술이다!’

 이병철은 첨단 기술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절감했다.

 흑자 전환에 성공한 삼성전자는 잔치 분위기에 휩싸였다. 이병철 회장도 기분이 좋았다. 그러나 100% 만족할 수는 없었다. 하루라도 빨리 시장의 전세를 역전시키고 싶었다. 이병철 회장은 내친 김에 제일 먼저 컬러텔레비전을 시장에 선보일 수 있도록 기술 개발을 추진했다.

 라이벌 업체들이 흑백텔레비전 시판에 열을 올리고 있는 틈을 이용해 컬러텔레비전 개발을 했다. 덕분에 1974년 선발 업체들을 따돌리고 국산 컬러텔레비전 1호를 생산해내는 데 성공했다. 이병철은 드디어 뒤집기 한판승에 대한 자신감이 생겼다.

 그런데….

 “컬러텔레비전 방송이 또 미뤄졌습니다.”

 “또? 대체 언제까지 미루겠다는 겁니까. 정부에서 이번에는 뭐라고 말했습니까?”

 “아직은 때가 아니라는 말만 합니다.”

 “때가 아니긴! 컬러텔레비전 방송에 대한 정부의 규제와 간섭이 없다면 한국 전자 산업은 적어도 3년 내지 5년은 앞섰을 거요.”

 컬러텔레비전을 개발하면 무얼 하겠는가. 수익을 보려면 컬러텔레비전 방송을 시작해야 하는데, 정부가 걸림돌이었다. 정부는 계속 흑백텔레비전 방송을 고수했다.

 “우리 농촌에는 흑백텔레비전도 못 보는 가정이 아직 너무 많습니다. 우리가 좀 더 잘살게 된 뒤 컬러텔레비전을 시판해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이견은 당연했다. 정부는 정치적인 지지 기반인 농민들을 생각할 수밖에 없었고, 이병철은 후발주자로서 선발주자를 따라잡을 방법을 먼저 생각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삼성에게 절호의 기회가 온 것은 1981년!

 드디어 컬러텔레비전 시대가 개막했다. 삼성은 절전형 프리볼트 텔레비전인 ‘이코노빅’을 내놓아 승리의 깃발을 잡았다. 이코노빅은 전력난에 시달리던 당시 상황과 잘 맞아떨어지는 제품이었다. 덕분에 삼성은 1984년 국내 텔레비전 시장에서 처음으로 1위에 올랐다. 맞수인 금성은 이에 더욱 자극을 받아 신기술에 발 빠르게 대응했다.

 삼성과 금성 두 회사의 40년 전쟁은 컬러텔레비전, 액정표시장치(LCD) 텔레비전, 플라스마 디스플레이패널(PDP) 텔레비전 등을 거치며 거의 모든 전자분야로 확대됐다.

 특히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는 디스플레이 분야에서 새로운 경쟁이 시작돼 지금까지 삼성디스플레이와 LG디스플레이 모두 글로벌 1위를 놓고 엎치락뒤치락하고 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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