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상사고·문전박대에도 "띵동" 통계조사관들의 '희로애락'
수도권서 활동하는 통계조사관 심층 인터뷰
3명 중 1명, 문전박대…"내일도 모레도 찾아가"
"언니는 영원한 내 둘째 언니"…소중한 인연도
"통계조사 협조, 자녀들 안정적 일자리 기반 돼"
[서울=뉴시스] 최동준 기자 = 통계청 가구조사를 당담하는 조사원들이 지난달 29일 서울 봉천동에서 경제할동인구조사를 하고 있다. 2023.11.29. [email protected]
[세종=뉴시스]임하은 기자 = "마음의 문을 여는 게 우리의 일이에요. 무조건 밀어붙여서도 안 되고, 진심을 보여주고 그 문을 열기를 기다리는 게 가장 중요해요."
체감온도가 0도까지 떨어진 지난달 29일 오전 서울 관악구 봉천역 2번 출구 인근, 아이스크림 프렌차이즈 가게를 끼고 가파른 언덕을 오르면 나오는 동네가 있다. 이곳은 19년 차 베테랑인 한난이(53) 통계조사관이 경제활동인구 통계를 수집하는 업무지다. 골목 진입로에서 우연히 마주친 어르신과 반갑게 인사를 나누는 그의 모습에선 오랜 벗 같은 정이 묻어났다.
국민의 경제 실태를 파악하고, 그에 따른 정책을 수립하기 위해선 통계 자료 확보가 핵심이다. 국민 삶의 현장에서 통계를 수집하는 정예 요원들이 바로 통계조사관이다. 전국에 2000여명의 통계조사원이 있는데, 그 가운데 절반인 1000여명이 공무직(무기계약직) 조사관이다.
뉴시스는 이날 수도권에서 10년 넘게 통계조사관으로 활동한 50대 여성 통계조사관 두 명을 만났다.
3명 중 1명은 문전박대…"내일도 모레도 찾아가야"
11년 차 소정우(56) 조사관이 경활 조사를 담당하는 지역 중 한 곳은 강서구다. 이곳은 전국에서 전세사기 보증금 피해 규모가 가장 큰 지역이기도 하다. 그렇다 보니 소 조사관이 담당한 13가구 중 절반이 전세사기 피해를 입었다. 80살이 넘은 할머니와 어린 손녀 둘이 지내는 가구도 전세사기 피해를 비껴가지 못했다. 하루아침에 수억원의 전셋값을 날린 사람들에게, 통계를 위한 조사 기재를 부탁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라고 소 조사관은 말했다.
"처음에는 아는 척도 안 하셨는데, 두 번 세 번 찾아가 인사드리니 반가워하셨어요. 그 미소를 보고 너무 좋았지만, 바로 조사기입을 요청하기엔 상황이 이른 것 같아 한 템포 더 기다리는 중이에요. 진심을 담아서 기다리는 게 정말 중요하다고 느껴요."
[서울=뉴시스] 최동준 기자 = 통계조사관들이 지난달 29일 서울 봉천동 한 카페에서 뉴시스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2023.11.29. [email protected]
조사관들은 이런 안타까운 가정의 상황들을 마주할 때마다 무거운 마음을 하루에도 수차례 끌어올린다. 오늘 응답을 해주지 않으면 내일이고 모레고, 낮이고 밤이고 계속 그 가구를 방문한다. 이렇게 통계의 정확도를 지키기 위해 애를 쓰는 과정 중 소 조사관은 대상포진을 얻기도 했다.
매달 15일이 낀 일주일간의 경제활동을 조사하는 경활조사와 달리 가계조사는 한 달 동안 매일 가계부를 세밀히 작성해야 하는 수고가 뒤따른다. 가계조사는 이런 특수성 때문에 응답률이 경활조사보다 낮다. 지난해 기준 가계동향조사의 불응률은 34.8%에 달한다. 3명 중 1명이 넘는 응답자들이 조사관들을 문전박대한다는 뜻이다. 응답이 상대적으로 간단한 경활조사의 불응률은 12.1%이다.
"난이 언니는 영원한 저희 둘째 언니"…소중한 인연들도
흔히 '꼽추'라고 불리는 척추후만증을 앓는 중년의 여성 박희선(가명)씨가 노모와 함께 살던 가구는 한 조사관에게 가장 뜻깊은 기억이다. 한 조사관은 그 집에 들를 때면 작은 선물을 늘 챙겼다. 낯선 이의 방문에 박씨는 처음엔 두려워했지만 꾸준히 설득한 끝에 서서히 마음을 열었고 조사에 응했다.
한 조사관은 생일날 한글에 서툰 박씨가 쓴 삐뚤삐뚤한 자필 손편지를 받았다. '메리 크리스마스'로 시작한 편지의 맺음말은 "난이 언니는 영원한 저희 둘째 언니예요" 였다.
한난이 통계조사관이 받은 손편지. (사진 = 한난이 조사관 제공) 2023.12.02. *재판매 및 DB 금지
또 다른 가정에선 연로한 시어머니를 모시고 세 아이를 키우는 씩씩한 며느리 윤지영(가명)씨를 만났다. 윤씨는 늦은 밤 퇴근 후 한 달간 매일 가계부를 기입하면서 스스로 뿌듯함과 보람을 느낀다며 흔쾌리 조사에 응했다.
병원진료비가 가구 지출에서 항상 큰 부분을 차지했던 윤씨네는, 알고보니 그의 남편이 지병을 앓고 있었다. 가계조사가 진행되던 6개월 사이 남편은 세상을 떠났다.
윤씨는 그런 가운데서도 씩씩함을 잃지 않고 홀로 노모와 아이들을 돌봤다. 한 조사관은 그 삶에 감동해 마음을 깊이 나누게 됐고, 윤씨는 가계조사를 쉬는 6개월 동안에도 통계를 작성해 한 조사관에게 건넸다. 한 조사관은 이 사연을 알렸고 윤씨는 통계조사에 기여한 공로로 경제부총리상을 받았다. 한 조사관은 통계조사를 하며 생긴 귀한 이런 인연을 지금까지도 이어가고 있다고 한다.
"낙상사고·폭언에도 오늘도 초인종을 눌러요"
한 조사관과 함께 입사한 19년 차 베테랑이었던 A조사관은 최근 명예퇴직했다. 평소처럼 서울 대치동에서 가구조사를 하다 세입자의 갑작스러운 밀침에 계단 낙상사고를 당할 뻔한 후로, 그에겐 트라우마가 생겼다. 문을 열도록 설득하는 게 조사관의 업무인데, 초인종을 누를 때마다 긴장과 두려움이 그를 엄습했다. 살이 계속 빠졌고 몇 달 후 그는 일을 그만두는 길을 택했다.
[서울=뉴시스] 최동준 기자 = 통계조사관들이 29일 서울 봉천동에서 경제활동인구조사를 하고 있다. 2023.11.29. [email protected]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 부디 문만 열어주세요"
한 조사관은 말한다.
"조사에 협조해 주면 우리 자녀들이 자라 안정적인 고용 상태로 일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되거든요. 통계조사 응답은 내가 당장 번거롭고 불편하지만 내 세대에서 끝나지 않아요. 마치 한 그루씩 심는 꼭 해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한 그루씩 나무를 심으면 그게 숲을 이뤄 울창해지듯, 미래의 우리나라를 위해 함께해주시면 정말 좋겠어요."
[서울=뉴시스] 최동준 기자 = 통계조사관들이 지난달 29일 서울 봉천동에서 경제활동인구조사를 하고 있다. 2023.11.29.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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