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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75주년] ⑯남과 북, 문맹퇴치 운동 나서다

등록 2020.04.18 06: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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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주민의 80%가 한글 못 읽어

해방직후부터 급선무 사업으로 인식

남은 영어, 북은 러시아어 교육 강조


해방정국 3년의 역사적 경험은 오늘날 한반도가 당면한 문제를 풀어나가는데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해 준다. 과거의 실패를 성찰해야 현재의 과제를 파악할 수 있고, 미래를 내다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문제의식으로 광복 75주년을 맞아 새롭게 발굴된 사진과 문서를 중심으로 해방 직후 격동의 3년간을 매주 재조명해 본다. [편집자 주]

16. 남과 북의 문맹 퇴치 운동과 외국어 교육

일제강점기 한국인의 문맹(文盲)은 심각한 수준이었다. 글을 읽고 쓰지 못하는 문맹인은 ‘까막눈’이라고 불렸다. 1920년대 신문 기사를 보면 “고상한 학문과 해박한 지식은 그만두고라도 조선 글로 편지 한 장 쓰지 못하고 심지어 상점 간판과 정거장 이름 하나 몰라보는 사람이 열의 아홉”이라고 표현할 정도였다.

당시 통계에 따르면 2000만 한국인 중 80%에 가까운 1600만 정도가 문맹자였다. 문맹자는 일제의 한국인 우민화 정책으로 갈수록 늘었다.

이에 위기의식을 느낀 청년 지식인을 중심으로 조선어를 가르치는 야학이 전국적으로 세워졌다. 야학이 민족주의 색채를 강하게 보이자 일제는 이를 탄압하여 금지했다. 이후 문맹 퇴치 운동은 언론사를 중심으로 전개됐다.

조선일보가 ‘아는 것이 힘, 배워야 산다’라는 표어를 내걸고 방학하는 동안 고향에 가는 중등 이상의 남녀 학생을 동원하여 전국 각지에서 문맹 퇴치를 위한 ‘문자 보급 운동’을 펼쳤다.

동아일보는 계몽운동의 일환으로 ‘브나로드(Vnarod, 러시아어로 ‘민중 속으로’라는 뜻)운동’을 전개했다. 조선어학회는 문자 보급 운동에 사용될 교재를 만들고, 학회 회원들이 솔선하여 전국을 순회하면서 한글 강습회를 열었다.

그러자 조선총독부는 이러한 운동이 확산하는 것을 막기 위해 대규모 순회 강습이나 문맹 퇴치 운동을 금지한다는 명령을 내렸다. 1938년부터는 ‘조선말’을 금지하고 일본어를 국어로 배우게 했다.

일제의 민족말살정책 속에서도 우리 말과 글을 배우고 지키고자 한 노력은 계속 이어지지만 해방 직후 우리나라의 12세 이상 문맹률은 여전히 80% 정도에 달했다. 새로운 국가 건설을 위해서는 문맹 퇴치가 급선무였다.
 
1945년 9월 건국준비위원회는 시정방침을 발표하면서 처음으로 “일반 대중의 문맹 퇴치”를 중요 과제로 제시했다. 다음 해 1월 중순 미군정청에서 개최된 성인교육심의회(成人敎育審議會)는 사흘 동안 논의 끝에 각 면(面) 단위로 겨울의 농한기를 이용해 38도 이남의 4만여 부락에서 공민(公民)·국문(國文)·국사(國史)를 가르치는 강습회를 개최하기로 했다.

행정기관의 힘만으로는 이른 시일 안에 성공할 수 없다고 보고, 문맹 퇴치 운동을 전 국민적 운동으로 전개하자는 취지였다.

비슷한 시기에 열린 전국부녀총동맹 결성대회에서도 ‘우리나라 말과 글을 배우자’는 문맹 퇴치가 주요 안건으로 상정됐다. 농민 대상으로 국어보급과 문맹 퇴치 등을 목적으로 한 주간지 <새한>도 창간됐다.

1946년 여름에는 방학을 이용해 학생들로 조직된 농어촌계몽대가 발족하여 1500여 명의 학생들이 방방곡곡으로 파견됐다. 이러한 노력으로 1946년 4월부터 1년 동안 문맹률이 40%대로 떨어졌다. 경기도의 경우 13세 이상의 문맹률이 68%에서 22.5%로 떨어진 것으로 조사됐다.

1948년 제헌선거를 앞두고 문교부는 다시 대대적인 문맹 퇴치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1950년 초까지 여전히 문맹률은 전 인구의 25% 수준이 유지돼,  13세 이상 인구 중  480만 명이 문맹에서 벗어나질 못했다.

당시 <경향신문>(1950년 2월 5일 자)은 “국회의원 입후보자의 이름은 물론이고 자기 성명 3자까지 쓸 줄을 몰라 가지가지의 부호로 투표자의 성명을 표하게 되는 웃지 못할 난센스를 연출하게 되니 이러한 서글픈 문맹 행렬은 하루바삐 없애버려야 할 것”을 강조하기도 했다.

휴전 이후 ‘없어지는 눈뜬장님, 자라나는 민주 대한’이라는 구호를 앞세워 ‘전국문맹퇴치 5차년 계획(1954∼1958년)’을 추진했고, 1960∼70년대까지도 가정의례, 식생활, 주거생활, 보건위생, 가족계획 등 생활 전반의 개선과 동시에 문맹 퇴치 활동이 계속 이어졌다.

[서울=뉴시스] 1945년 10월 하순, 미군이 촬영한 부산 지역 학생들의 영어 수업 모습. 해방 후 38선 이남 학교에서는 한글과 영어 교육이 시작됐고, 문맹 퇴치를 위한 성인교육이 병행됐다. (사진=미국 국립문서기록청) 2020.04.19. photo@newsis.com (* 위 사진은 재배포, 재판매, DB 및 활용을 금지합니다)

[서울=뉴시스] 1945년 10월 하순, 미군이 촬영한 부산 지역 학생들의 영어 수업 모습. 해방 후 38선 이남 학교에서는 한글과 영어 교육이 시작됐고, 문맹 퇴치를 위한 성인교육이 병행됐다. (사진=미국 국립문서기록청) 2020.04.19. [email protected] (* 위 사진은 재배포, 재판매, DB 및 활용을 금지합니다)


한편, 해방 직후부터 ‘우리 말 배우기’와 함께 외국어 교육도 실시됐다. 미군정이 조직한 ‘한국교육위원회’의 건의로 9월 24일부터 일선 학교에서 우리의 말과 글 중심의 국어와 국사 교육이 시작됐고, 이와 함께 중등학교부터 영어 교육이 시행된 것이다.

북한지역도 비슷한 상황이었다. 해방되자 북한지역에서도 주민들의 자발적인 운동으로 문맹 퇴치 운동이 벌어졌다. 학교 명칭부터 성인학교, 성인특수학교, 야학회 등으로 다양했다. 문맹퇴치사업은 1946년 2월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가 출범하면서 체계화되어, 교육국 안에 성인교육부를 설치하고 각 도·시·군 인민위원회 교육부에 문맹퇴치사업 전담 부서들을 두도록 했다.

5월에는 ‘성인교육지도요강’를 발표하고, 농촌학교, 야간학교, 야학회, 성인학교, 한글강습소 등 다양한 학교 명칭을 ‘성인학교’로 통일했다. 이때까지는 문맹퇴치사업이 주로 교원과 지식인, 문화인 등이 문맹인에게 글을 가르치는 ‘문화 계몽적 성격’이 강했다.

그러나 1946년 11월 첫 인민위원회 선거를 치르면서 북한은 문맹 퇴치의 필요성을 더욱 절감했고, 그해 12월부터 1949년 3월까지 국가적 차원의 전 군중적 대중운동으로 강력하게 추진했다. 만 12세 이상 50세 미만의 남녀 문맹자들은 의무적으로 ‘성인학교’에 입학해 매일 2시간 이상 교육을 받아야 했고, 수료자에게는 수료 증서가 배부됐다.

또한 전국적으로 ‘문맹퇴치지도위원회’와 ‘문맹퇴치검열위원회’까지 조직됐다. 이 시기에 문맹 퇴치 교육 대상자 파악을 위한 호별 방문 조사가 치밀하게 이뤄졌고, 이를 통해 북한지역의 문맹자 수(12세~50세)는 약 231만 명으로 파악됐다.

[서울=뉴시스] 1946년 여름 12세 이상 50세 미만의 남녀 문맹자를 대상으로 개설된 ‘성인학교’에서 한글을 배우는 주민들의 표정이 진지하다. (사진=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04.19. photo@newsis.com

[서울=뉴시스] 1946년 여름 12세 이상 50세 미만의 남녀 문맹자를 대상으로 개설된 ‘성인학교’에서 한글을 배우는 주민들의 표정이 진지하다. (사진=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04.19. [email protected]

[서울=뉴시스] 1946년 여름 12세 이상 50세 미만의 남녀 문맹자를 대상으로 개설된 ‘성인학교’에서 여성들이 한글을 배우고 있다. 아이를 안고 공부하는 여성의 모습이 이채롭다. (사진=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04.19. photo@newsis.com

[서울=뉴시스] 1946년 여름 12세 이상 50세 미만의 남녀 문맹자를 대상으로 개설된 ‘성인학교’에서 여성들이 한글을 배우고 있다. 아이를 안고 공부하는 여성의 모습이 이채롭다. (사진=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04.19. [email protected]


1946년 12월부터 1947년 11월까지 문맹 퇴치 대상이 주로 농촌의 농민과 여성이었다면 1947년도 12월부터 1949년 3월까지 문맹 퇴치 운동은 대상과 범위가 더욱 확대되었고, ‘사회주의 경쟁 운동’ 방식이 도입되어 대중운동으로 성격 변화가 이뤄졌다.

[서울=뉴시스] 1946년 겨울 ‘성인학교’에서 대학생으로부터 한글을 배우고 있는 주민들. 북한은 만 12세 이상 50세 미만의 남녀 문맹자들은 의무적으로 ‘성인학교’에 입학 시켜 매일 2시간 이상 교육을 받도록 한 후 수료자에게 수료 증서를 발급했다. (사진=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04.19. photo@newsis.com

[서울=뉴시스] 1946년 겨울 ‘성인학교’에서 대학생으로부터 한글을 배우고 있는 주민들. 북한은 만 12세 이상 50세 미만의 남녀 문맹자들은 의무적으로 ‘성인학교’에 입학 시켜 매일 2시간 이상 교육을 받도록 한 후 수료자에게 수료 증서를 발급했다. (사진=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04.19. [email protected]

[서울=뉴시스] 1947년 12월 ‘문맹 퇴치 강원도지도위원회’가 만든 문맹 퇴치 관련 포스터. 북한은 1947년 12월 1일부터 1948년 3월 31일까지를 ‘문맹 퇴치 돌격 기간’으로 설정하고 대대적인 문맹 퇴치 운동을 진행했다. (사진=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04.19. photo@newsis.com

[서울=뉴시스] 1947년 12월 ‘문맹 퇴치 강원도지도위원회’가 만든 문맹 퇴치 관련 포스터. 북한은 1947년 12월 1일부터 1948년 3월 31일까지를 ‘문맹 퇴치 돌격 기간’으로 설정하고 대대적인 문맹 퇴치 운동을 진행했다. (사진=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04.19. [email protected]


문맹 퇴치를 위한 선전과 방법도 다양하게 동원됐다. 초·중등학교 학생들의 조직인 소년단에서는 단원들이 문맹 퇴치 완장을 끼고 다니면서 사람들을 만나면 “문맹 퇴치 합시다”라며 경례하는 것이 일상화됐고, 먼저 문맹을 퇴치한 사람이 문맹자를 책임지고 퇴치하는 ‘1인 책임제’도 실시됐다.

일부 지방에서는 문맹자의 집에 “문맹자 000”이라는 문패를 걸어서 자극을 주어 졸업시험에 합격할 때 이를 떼도록 하는 조처를 하기도 했다.

그리고 북한은 2단계 사업으로 문맹에서 벗어난 사람들이 인민학교 졸업 지식수준으로 끌어올리기 위해 ‘속성성인학교’를 설치하고, 의무적으로 이 학교에 입학해 초급반·중급반·상급반(각 4개월)을 졸업하도록 강제했다. 이 같은 강력한 조치를 통해 북한에서는 전쟁 이전에 대부분의 주민이 문맹에서 탈출하게 됐다.

특히 해방 후 ‘대중적 경쟁 운동’으로 전개된 문맹 퇴치 운동은 북한 주민들의 일상적인 삶이 생산과 정치에 귀속되는 첫 경험으로 작용했고, 1950년대에 ‘천리마운동’으로 이어졌다.

한편, 북한에서도 일찍부터 외국어 교육이 강화됐다. 소련군이 진주했기 때문에 이북지역에서는 영어가 아닌 러시아어가 제1외국어로 지정돼 각급 학교에서 교육되기 시작했다. 남과 북의 분단이 외국어 교육에서도 차이를 발생시킨 것이다.

[서울=뉴시스] 1946년 5월경 정의여고 2학년 김옥숙 학생이 러시아어 단어를 칠판에 쓰고 있다. 소련군이 진주한 후 북한의 각급 학교에서는 러시아어를 제1외국어로 지정하고 가르치기 시작했다. 김옥숙 학생은 전쟁 때 가족과 함께 월남했다. (사진=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04.19. photo@newsis.com

[서울=뉴시스] 1946년 5월경 정의여고 2학년 김옥숙 학생이 러시아어 단어를 칠판에 쓰고 있다. 소련군이 진주한 후 북한의 각급 학교에서는 러시아어를 제1외국어로 지정하고 가르치기 시작했다. 김옥숙 학생은 전쟁 때 가족과 함께 월남했다. (사진=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04.19. [email protected]



정창현 평화경제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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