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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백년과 여성]항일에 남여가 따로 있나…'대한여자독립선언서'

등록 2019.02.25 06: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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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 미국에 사는 도산의 장녀 수산 자택서 발견

가로 49cm, 세로 31cm 크기…총35행, 1393글자 담겨

"독립운동서 남녀는 대등하다…독립위해 분발하자"

"1919년 4월 간도·노령서 반포…작성 양력2월 추정"

작성자 8인 북간도서 애국부인회으로 활동했을 것

글씨체와 문구, 세련된 이름으로 볼때 新여성 추측

학자들 "3·1 독립선언서 버금가…사료적 가치 높아"

【서울=뉴시스】홍찬선 기자 = 1919년 2월에 작성된 것으로 추측되는 대한독립여자선언서. 이 선언서는 1983년 미국에 사는 도산(島山) 안창호(安昌浩) 선생의 장녀 수산(繡山)의 자택에서 가로 49cm, 세로 31cm 크기로 발견됐다. 2019.02.25.(자료=독립기념관 제공)photo@newsis.com

【서울=뉴시스】홍찬선 기자 = 1919년 2월에 작성된 것으로 추측되는 대한독립여자선언서. 이 선언서는 1983년 미국에 사는 도산(島山) 안창호(安昌浩) 선생의 장녀 수산(繡山)의 자택에서 가로 49cm, 세로 31cm 크기로 발견됐다. 2019.02.25.(자료=독립기념관 제공)[email protected]

【서울=뉴시스】홍찬선 기자 = "지식이 몽매(蒙昧)하고 신세가 연약한 아녀자의 무리이나 국민 됨은 일반이오 양심은 한가지라…동포여 때는 두번 이르지 아니하고 일은 지나면 못하니 속히 분발할지어다 동포시여 대한독립만만세."

3·1운동 100주기를 맞아 일제에 나라를 빼앗긴 억울함과 그들의 잔혹함에 맞서 대한독립을 외쳤던 '대한여자독립선언서(大韓獨立女子宣言書)'가 재조명되고 있다.·

1차세계대전 종식과 3·1운동 전 후 국제사회에 반포된 독립선언서와 청원서 및 격문류는 대략 100여종은 넘을 것으로 추산된다. 이 중 여성들에 의해 선포된 것만도 10여종에 달하며 대표적인 선언서는 '대한여자독립선언서'가 꼽힌다.

대한여자독립선언서는 1983년 미국에 사는 도산(島山) 안창호(安昌浩) 선생의 장녀 수산(繡山)의 자택에서 가로 49cm, 세로 31cm 크기로 발견됐다.

한 해 전인 1982년 일본 정부의 비밀문서에서 일본어로 번역된 '대한독립여자선언서'가 발견된 바는 있으나 순 한글로 된 여성독립선언서 원본이 발견된 것은 이것이 처음이다.

수산은 아버지 도산의 유품을 독립기념관에 기증하기 위해 정리하던 중 선언문을 발견한 것으로 전해졌다. 발견 당시 보존 상태도 비교적 양호했다.

한지로 된 선언서에는 가는 붓으로 쓴 것으로 보이는 35행, 1393자(서명 제외)가 선명하게 쓰여 있었다.

선언서에는 일제에 나라를 빼앗긴 우리 동포의 억울함과 일제의 만행에 고통받는 설움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또한 연약한 여자 몸으로 독립운동의 뜻은 있으나 행동으로는 참여하지 못하는 것을 안타까워하면서도 독립운동에 있어서는 여성과 남성은 서로 대등하다는 뜻을 내비치고 있다. 선언서 말미에는 대한동포들이여 독립을 위해 분발하자는 내용도 담겨 있다.

당시 일제 강점기 역사 인식을 비춰볼 때 당시 여성들은 역사의 주역인 남자의 보조여야 한다는 사상보다 대한독립에는 남녀 구분이 없다는 것을 일깨워 주기 위한 표현으로 해석된다. 

특히 선언서 마지막에는 기원 사천이백오십이년 이월 일로 명시돼 있는 것으로 볼 때 이는 민족대표 33인이 반포한 3·1 독립선언서 이전인 1919년 2월에 작성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정확한 시기가 양력인지 음력인지는 밝혀진바 없다.

이에 대해 이명화 도산학회 회장은 "조선총독부에서 발견된 내부 문건을 보면 이 대한여자독립선언서는 1919년 4월8일 간도(현 중국 길림성 훈춘)와 같은달 14일 노령(러시아 시베리아 지역)에 배포 됐다는 내용의 보고서가 있다"며 "이는 4월보다 이전인 양력 2월에 작성된 것으로 보여진다"고 말했다.

이 선언서에는 이를 작성한 것으로 보이는 여성 8명의 이름이 서명돼 있다. 서명인은 김인종·김숙경·김오경·고순경·김숙원·최영자·박봉희·이정숙 등이다.

당시 여성들은 누구의 어머니 또는 누구의 처로 대부분 불렸지만 이들은 자신의 이름을 공개적으로 남겼다.

8인의 여성들은 이 시기 간도 지역에서 애국부인회가 조직됨에 따라 이곳에서 활동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이들의 활동기록은 전혀 밝혀진바가 없다.
【서울=뉴시스】홍찬선 기자 = 1919년 2월에 작성된 것으로 추측되는 대한독립여자선언서가 3·1운동 100주기를 맞아 재조명되고 있다. 역사학자들은 이 선언서가 3·1 독립선언서에 버금가는 힘과 생명력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사료적 가치를 높게 평가하고 있다. 미주지역에서 발간한 신한민보 1919년 5월8일자에 게재된 '대한독립녀자선언서' 사설. 2019.02.25.(자료=독립기념관 제공)photo@newsis.com

【서울=뉴시스】홍찬선 기자 = 1919년 2월에 작성된 것으로 추측되는 대한독립여자선언서가 3·1운동 100주기를 맞아 재조명되고 있다. 역사학자들은 이 선언서가 3·1 독립선언서에 버금가는 힘과 생명력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사료적 가치를 높게 평가하고 있다. 미주지역에서 발간한 신한민보 1919년 5월8일자에 게재된 '대한독립녀자선언서' 사설. 2019.02.25.(자료=독립기념관 제공)[email protected]

8인의 여성들이 쓴 선언서의 글씨체와 문구, 세련된 이름으로 볼때 당시에도 우수한 교육을 받은 신(新)여성들로 보여진다. 특히 선언서 내용중 '상제'와 '하나님'을 쓴 것으로 비춰볼때 기독교인일 가능성이 높다.

특히 선언서를 작성한 배경에는 구주 대전란(1차 세계대전)이 종식된 후 국내외 여성도 남자들과 함께 독립만세의 대열을 이뤄야한다는 의식에서 자발적인 여성의 소리로 독립을 선언한 것으로 분석된다.

역사 학자들은 대한여자독립선언서가 지닌 역사적 의의는 3·1 독립선언서에 버금가는 힘과 생명력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사료적 가치를 높게 평가하고 있다.

이에 대해 이명화 회장은 "지금까지 밝혀진 여성들이 작성한 선언서 중 3·1운동 이전에 작성한 것은  '대한독립여자선언서'가 유일하다"면서 "이 선언서를 작성한 8인은 간도지역에서 애국부인회의 이름으로 활동한 것으로 보여진다"고 밝혔다.  이어 "8인의 여인 중 김숙경은 독립운동가 황병길씨의 부인으로 추정된다"고 설명했다.

그런데 이 선언서는 반포 당시 국내와 만주, 노령 등에서 크게 주목받지 못해 독립운동선상에서의 큰 영향력을 갖지 못했다. 당시 국내와 노령, 간도 등의 지역에서는 일제의 감시가 심해 이 선언서를 공개적으로 활용하지는 못했을 것이라는게 역사 학자들의 생각이다.

그러나 일제의 감사가 닿지 않은 미주지역은 달랐다. 당시 이지역에서 활동하던 대한여자애국단은 모든 행사에서 이 선언서를 낭독하면서 여성항일독립운동의 이념으로 삼았다. 애국단은 이 선언서가 3·1 독립선언서와 더불어 여성들의 독립의지를 진작시킨것으로 정의했기 때문이다.

이같은 기록은 당시 미주지역에서 발간한 신한민보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1919년 5월8일자 '대한독립녀자선언서' 사설을 보면 "3월1일 대한독립선언 이전에 미래 우리 대한민족부인동포의 대정신 대자각을 성명하는 선언이오 이선언서를 대표한 여덟분 선생은 우리 부녀 동포의 정신을 선언한 대표자시니라"라며 8인의 여성들을 추켜세우고 있다. 이 후에는 이들이 쓴 선언서 전문을 게재하고 있다.

신한민보는 발간 초부터 노령에서도 많이 읽혔다. 당시 신민회(1907년 국내서 결성된 항일 비밀결사 단체) 관련 민족지도자들이 노령으로 많이 망명하고 있었던 터라 노령과 미주의 민족지도자간에는 서신 연락 등 긴밀한 관계가 이뤄지고 있었던 시기이기도 했다.

대한독립여자선언서를 연구해온 박용옥 전 성신여대 교수는 "1919년 2월 중국 길림에서 대한여자독립선언서가 작성 됐고, 연해주로 보내져 석판인쇄를 한 후 지린성에서 반포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며 "이 독립선언서가 국내는 물론 일본과 미주까지 보내진 것으로 파악된다"고 밝혔다.

박 전 교수는 "대한독립여자선언서는 (당시)국내외 여성도 남성들과 함께 독립만세의 대열을 이뤄야한다는 의식에서 자발적으로 여성의 소리로 독립을 선언한 것이다"라고 분석했다. 다만 "8인의 여성이 누구인지는 어떤 직업들을 가졌는지는 정확히 파악하지는 못했지만, 기독교적 소양이 깊은 신여성인들로 추측 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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