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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자유로운 어릿광대, 여든 박정자 ‘노래처럼 말해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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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2020-02-09 13:23:59
16일까지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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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 박정자 '노래처럼 말해줘' (사진 = 뮤직웰 제공) 2020.02.09 realpaper7@newsis.com
[서울=뉴시스]이재훈 기자 = 유장하게 굽이치는 강물처럼 새겨진 주름은 박정자(78)의 58년 연기 비밀인지도 몰랐다. 한국 연극의 역사를 지질시대에 비유해도, 지층 속에 있는 그녀의 연대는 감히 분석할 수 없다. 지질시대는 동물의 화석으로 시대를 구분하는데 그녀의 연기는 화석화되지 않았으니까.
 
박정자는 여전히 무대 위에서 젊은 배우 이상으로 생명력을 발휘하는 노장이 우리 연극계에 얼마나 귀한 선물인지를 알려주는 표본이다.

6일 오후 서울 서초동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에서 막을 올린 연극 '노래처럼 말해줘'는 박정자의 목소리와 몸짓 그리고 그녀의 연기 경력으로 그려낸 '연극판 산수화'였다.

산수화는 자연의 경치를 주제로 그린 동양화를 가리킨다. 박정자 배우론을 담은 그녀 버전의 '연극판 산수화'는 우리 연극사의 정경이 주제다.

‘박정자보다 박정자를 더 잘 안다’는 평을 듣는 남성 잡지 GQ 출신의 이충걸 작가가 극본을 쓰고 오랜 기간 공연계에 기획자 등으로 몸을 담아온 이유리 서울예대 교수(한국뮤지컬협회 이사장)가 연출한 이 연극은 박정자 개인의 이야기였지만 결국 우리 연극계 단면을 잘라 보는 작품이기도 했다.

박정자는 1962년 이화여대 문리대 연극반 시절 '페드라'로 데뷔했다. 고대 그리스 비극인 에우리피데스의 '히폴리투스'에서 소재를 따온 작품. 줄스 다신 감독의 동명의 영화도 같은 해 개봉(국내에서는 1967년 개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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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 박정자 '노래처럼 말해줘' (사진 = 뮤직웰 제공) 2020.02.09 realpaper7@newsis.com
 
박정자는 사랑의 금기를 다룬 '페드라'에서 주인공 왕비가 아닌 그녀를 졸졸 따라다니는 시녀 역을 맡았다. 하지만 이후 연극계에서 금기를 깨는 것은 박정자의 몫이었다.

'노래처럼 말해줘'는 영화 '페드라'의 파국적 결말인 '절벽 자동차 질주 장면'을 상영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파국의 주제곡으로 기억되는 바흐의 토카타 선율을 따라부르는 남자 주인공의 목소리에 박정자의 음성이 겹쳐진다. 그리고 허대욱 음악감독 피아노 연주에 맞춰 '페드라'의 삽입곡 '사랑의 테마'를 직접 부르는 박정자.

금기를 다룬 이 영화가 박정자의 연극론을 다룬 작품의 처음을 장식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녀의 연극계 행보는 평범함과 거리를 둬왔기 때문이다.

현재 대학로 키워드 중 하나는 '젠더 프리'다. 배역의 성별에 상관없이 배우를 캐스팅하는 흐름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그런데 약 20년 전 이미 박정자는 젠더 프리 캐스팅의 주인공이었다. 연극 '에쿠우스'의 정신과 의사 '다이사트' 역을 맡은 최초의 여자 배우였다.

이날 허 음악감독이 피아노 건반이 아닌 줄을 뜯어 재현한 폭풍우 소리에 맞춰 셰익스피어의 '리어왕' 속 리어왕을 잠깐 연기하는 모습만으로도 그녀의 '젠더프리'는 증명됐다. 벼락 같은 카리스마가 날이 서 있었다. 지난해 대학로 '젠더 프리' 대표작 중 하나인 '오펀스'에 출연한 정경순이 객석에서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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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 박정자 '노래처럼 말해줘' (사진 = 뮤직웰 제공) 2020.02.09 realpaper7@newsis.com

연주를 하는 허 음악감독을 제외하고 박정자만 등장하는 사실상 1인극인 이 작품의 개막을 위해 대학로 전체가 예술의전당으로 잠시 옮겨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손숙, 김성녀, 윤석화 등 걸출한 거장 배우들과 손진책·한태숙 같은 거목 연출가, 이번 연극 의상을 맡은 진태옥을 비롯 루비나, 이상봉, 김영진 등 스타 패션 디자이너까지 모두 자유소극장을 가득 채웠다. '영화계의 대부'인 김동호 강릉국제영화제 조직위원장, 문체부 장관을 지낸 정병국 의원 등도 눈에 띄었다.

그 중 공연를 하던 박정자의 눈이 손숙에게 머물렀다. 2007년 1월 출연했던 연극 '신의 아그네스'를 이야기하려던 참이었다. 두 사람이 함께 출연한 이 작품의 개막 하루 전날, 박정자는 빙판길에 미끄러져 크게 다쳤다.

입술과 입 안쪽 등을 몇 바늘이나 꿰맸고, 다리도 크게 다쳐 거동 자체가 힘들었다. 하지만 박정자는 의사의 만류에도 개막날 무대에 섰다. 하지만 진통제 등으로 정신이 혼미해 외운 대사를 제대로 읊기조차 힘든 상황. 미리암 수녀 역을 맡았던 박정자는 2막부터 대본을 들고 보면서 공연을 할 수밖에 없었다. 순간 객석은 웅성거렸지만 그녀의 '부상 투혼'에 박수가 쏟아졌다.

최근 공연계에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우한 폐렴)으로 인한 우려가 크지만 관객과의 만남을 저버릴 수가 없어 무대에 오른 것이 수긍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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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 박정자 '노래처럼 말해줘' (사진 = 뮤직웰 제공) 2020.02.09 realpaper7@newsis.com
약 75분간의 공연이 끝난 뒤 기립 박수가 나왔다. 일반 관객들은 물론 후배들도 감동 받기는 마찬가지였다. 국립극단이 4월 올리는 '파우스트'의 타이틀롤인 파우스트 역에 '젠더프리 캐스팅'된 김성녀는 "배우에게 적역은 없다는 말씀이 가장 와 닿아 용기가 난다"고 했다.

갈수록 무엇에 얽매이기보다 자유로운 광대가 되는 박정자가 이날 마지막곡으로 부른 노래는 영화 '조커'에 삽입된 '어릿광대를 보내주오'(Send in the clowns).

"한국사람 중에 박정자 선생님처럼 비브라토(목소리를 떨리게 하는 기교)를 내는 사람은 없어요. 마치 에디트 피아프처럼 노래하신다"고 듣는 이충걸 작가의 말처럼, 박정자의 노래 실력은 알만한 사람은 다 안다.

디즈니 애니메이션 '인어공주'의 한국어 더빙 판에서 문어마녀 '우르술라' 목소리를 맡기도 했던 그녀 아닌가. 정확한 발음에 그로테스크한 정서로, 누군가는 무섭다고 할 정도로 박정자의 목소리는 어두움을 내포하고 있다. 하지만 미묘한 성조에 확신을 주는 그녀의 음성은 대사의 꼭짓점을 만끽하게 해줄 만큼 귀하다.

이날 박정자는 "'아직도'라는 말을 좋아한다"며 활짝 미소 지었다. 내년이면 우리나이로 여든살을 맞지만 "여든의 배우가 할 것은 아직도 많다"며 씩씩했다. 특히 내년에는 자신의 대표작 중 하나인 "'해롤드 & 모드'를 공연할 것"이라고 시원스레 웃었다. 19세 청년 해롤드와 죽음을 앞둔 80세 할머니 모드의 세대를 초월한 순수한 사랑과 우정을 그렸는데 진짜 여든살의 나이에 이 배역을 다시 연기하게 되는 것이다. 

뮤지컬 '레베카'의 정승호 디자이너가 담당한 캔버스 모양의 배경은 박정자라는 다양한 정경을 시시각각 그림으로 담아내는 듯했다. 나이를 잊은 젊음, 자연의 섭리처럼 당연한 듯 연기하는 박정자는 여전히 경이롭다. 16일까지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


◎공감언론 뉴시스 realpaper7@news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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