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43주년] <하> 역사 속 필연적 갈등…5·18 본질 잊어선 안돼
미흡한 진상규명, 갈등 불씨 튄 주요 원인 지목
유공자 개별 보상 탓에 연대 고리 단절 분석도
"갈등 이후 가해자 처벌 등 논란·문제 해결되길"
[서울=뉴시스] 박태홍 기자 = 광주 금남로 일대에서 시민군과 계엄군 사이에서 유혈 충돌이 벌어진 1980년 5월 21일(부처님오신날) 봉축탑이 서 있는 전남도청 앞 분수대 광장에서 연일 민주항쟁 범시민궐기대회가 열리고 있다. 총탄에 찢기고 부서진 봉축탑이 그날의 혈전을 말해주는 듯하다. 박태홍 뉴시스 편집위원이 1980년 당시 한국일보 사진기자로 재직 중 5·18 광주 참상을 취재하며 기록한 사진을 5·18광주민주화운동 40주년에 즈음해 최초로 공개한다. (사진=한국일보 제공) 2020.05.17. [email protected]
지역 원로와 학계는 단체 간 대립이 5·18 정신계승을 위한 필연적인 과정이라는 설명과 함께 5·18 본질을 잊어선 안된다고 당부했다.
11일 5·18부상자회 등에 따르면 특전사회와 손을 잡은 대표적인 이유로는 더딘 진상규명이 꼽힌다. 최초 발포명령자, 암매장과 성폭행 의혹 등에 대해 그간 제대로 밝혀진 것이 없어서라는 설명이다. 단체는 나아가 문제 해결의 주체가 자신들이라고 못 박으며 진상규명과 선양 사업 등 모든 방면에서 당사자 주의를 공고히 했다.
5월 단체의 주장처럼 실제 진상규명은 5·18진상규명조사위가 출범, 공식 활동을 시작한 2020년이 돼서야 진척을 보이고 있다. 전두환 신군부가 증거를 인멸하거나 5·18이 정치권 내 정쟁의 소재로 소모되며 진상규명이 뒷전으로 밀린 것도 사실이다. 과거 관련 검찰 수사와 재판 과정 또한 사건의 재구성보다 책임자들의 혐의 입증에 집중되면서 5·18 당시를 돌아보려는 노력이 부족했다.
전두환과 노태우 등 핵심 인사를 향한 처벌도 빈약한 수준에 머물러 단체들의 주장에 힘을 실었다. 이들에게는 1997년 재판 당시 1980년 5월 27일 계엄사의 상무충정작전으로 희생된 광주시민 17명에 대한 책임만 인정됐다. 1980년 5월 광주 곳곳에서 자행된 발포와 양민 학살에 대해서는 처벌이 이뤄지지 않았다.
부상자회는 지난 2월 15일 기자회견을 통해 "신군부가 묻어버리고 정치권과 사회가 침묵해 온 사이 진상규명이 더디게 이뤄졌다. 이제라도 주인 의식을 갖고 나설 것"이라고 강조한 바 있다.
[광주=뉴시스] 이영주 기자 = 황일봉 5·18민주화운동 부상자회장이 7일 오전 광주 서구 5·18기념문화센터에서 열린 부상자회의 기자회견에 참석해 국가를 향해 정신적 피해배상 산정 기준을 산업재해보상보험법에서 국가배상법으로 바꿀 것을 촉구하고 있다. 2023.03.07. [email protected]
개별 보상과 관련한 정부 방침이 5월 광주를 갈랐다는 분석도 있다.
앞서 정부는 지난 1990년부터 2017년까지 7차례에 걸쳐 5·18 피해자들에게 보상을 진행했다. 현재까지 5000여 명에 이르는 유공자들이 보상을 받은 것으로 파악된다. 이들은 저마다 5·18 당시 가족을 잃거나 부상을 당하고 구금돼 고초를 겪은 자들이다. 이들의 공적은 자신들의 경험과 부상 정도, 3자의 인우보증 등으로 인정됐다.
그러나 이처럼 선별적으로 이뤄진 보상이 1980년 5월 이후 하나가 됐던 광주를 조각내는 데 일조하고 말았다는 분석도 뒤따른다. 김동춘 성공회대 교수는 정부의 선별 보상 탓에 5·18 피해자들이 갖는 민주화운동 인식이 개별 피해 수준으로 격하됐다고 설명한다.
5·18 직후 광주에서는 5월 유족들의 아픔을 어루만지고자 하는 시민 단체들의 움직임이 있었다. 이들은 망월묘역에서 수 년 동안 몰래 치러져 온 유족회의 추모제를 돕는 수준에서 나아가 1988년 최초로 열린 민간 주도 5·18 전야 행사를 이끌었다.
이 같은 시민 단체와 5·18 단체 사이의 고리가 유공자들에 대한 개별 보상으로 인해 서서히 끊어지면서 연대 의식이 옅어졌다는 것이다. 여기에 최근 5·18 단체들이 공법단체로 격상되면서 구분이 더욱 철저해졌다는 주장이다.
김 교수는 "5·18 피해자들에게 이뤄진 보상은 역사적 정의를 개인의 사적인 문제로 왜소화시켰다"며 "5·18은 광주 전역에서 걸쳐 일어난 만큼 다치거나 구금된 자들만 피해자라고 규정돼선 안된다. 사회적인 피해자들까지 아우르는 등 광주 모두의 문제라고 봐야 마땅하다"고 설명했다.
5·18 원로와 학자는 갈등 봉합을 위해 각 단체들 스스로가 5·18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 지에 대해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고 제언한다.
정수만 초대 5·18유족회장은 "5월 단체가 공법단체로 최근 전환되면서 여러 이권에 접근할 수 있게 됐다. 정신계승과 선양을 위한 수익 사업에 나서는 게 옳지만 변질할 우려가 해소되지 않았다"며 "5월 단체들이 운영 목적을 본질에서 돌아볼 필요가 있다"고 당부했다.
김희송 전남대 인문학연구원 연구교수는 "1993년에는 김영삼 전 대통령이 5·18 참배를 앞두고 '진상규명을 역사에 맡기자'라고 발언한 데 따라 광주 학생들이 참배를 막아섰다. 이에 따라 5·18 단체와 격한 갈등이 있었다"며 "당시 갈등은 진상규명과 책임자처벌 등이 포함된 5·18 문제해결 5대 원칙이 정립되는 성과로 이어졌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이번 갈등 또한 당사자 주의 논란과 가해자 처벌 문제 해결 등을 위해 거쳐 가야 하는 순간 중 하나"라며 "다만 일부 단체가 가해자인 계엄군의 트라우마를 우선시했다는 점에 대해서는 5·18 정신계승 본질에서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고 짚었다.
[광주=뉴시스] 이영주 기자 = 제42주년 5·18민주화운동 기념식 하루를 앞둔 17일 오전 광주 북구 운정동 국립5·18민주묘지에서 고 이정연 열사의 어머니 구선악(82) 여사가 오열하고 있다. 2022.05.17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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