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사권조정안]굴곡진 역사…盧정부가 시동, 文정부서 마침표
미군정 때 검찰 수사·기소권…경찰 영장청구는 가능
박정희 정권 때 헌법 조항으로…현재 구조 고착돼
신군부 집권기 경찰 호기였지만 여론 조성엔 실패
2003년부터 본격 논의…노골적 검경 갈등 비화도
2011년 한 차례 수사권 조정…경찰에 '개시·진행권'
법조비리·국정농단 사태로 조정 필요 공감대 확산
문재인 대통령 강한 검찰 개혁 의지로 결국 수술
【태안=뉴시스】전진환 기자 = 문재인 대통령이 15일 오후 충남 태안군 유류피해극복기념관 개관식에 참석해 전시된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사진을 보고 있다. 2017.09.15. [email protected]
그간 형사 사법체계에서는 검찰에 수사지휘와 종결 권한, 영장청구권, 기소권 등 수사에서 소추에 이르는 전 과정의 책임과 권한을 뒀다. 경찰은 수사를 개시할 권한을 갖고 검사의 지휘를 받아 수사를 진행한 뒤 사건을 송치했다.
경찰은 오랜 기간 검찰에 부여된 권한이 과도하다는 명목을 내세워 수사권 구조 조정을 요구해왔다. 수사권 조정은 대선 등 주요 정국 변화는 물론 권력 기관 개편 논의에는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단골 주제로 자리매김 해왔다.
◇해방 직후부터 지속된 검경 수사권 구조 갈등
검찰과 경찰의 수사권 구조를 둘러싼 갈등의 시발점은 해방 직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1945년 일제가 태평양 전쟁에서 패한 이후 남한을 장악한 미군정은 경찰에 수사권, 검찰에 기소권을 두는 자국 체계를 도입하려 했다. 하지만 당시 경찰 대부분이 일제 강점기 순사들로 구성됐다는 점과 독자적 수사 역량에 대한 지적, 검찰과 검찰 출신 변호사들의 반발 등으로 인해 구 일본 형사소송법의 체계를 본떠 검사에게만 수사권을 뒀다.
이후 1954년 2월 형사소송법을 제정하는 과정에서 다시 경찰에 독자적 수사권을 부여하는 논의가 있었으나, '경찰 파쇼화' 우려가 제기되면서 무산됐다. 1960년 4·19 혁명 직후 허정 과도정부에서 경찰에 1차적인 수사권을 부여하는 방안을 제시했으나 반발이 강해 원점으로 돌아갔다.
실제로 당대 경찰은 6·25 전쟁 이후 준군사조직화된 상태였으며, 정보와 보안 등 사회 유지 측면이 강하고 상대적으로 '봉사' 개념은 약했던 것으로 평가된다. 다만 당시 형사소송법에서는 "검사 또는 사법경찰관은 판사의 영장을 받아 피의자를 구속할 수 있다"라고 규정, 검찰 뿐만 아니라 경찰도 영장을 청구할 수 있었다.
◇정권따라 유불리 바뀌어…신군부 집권기엔 실기
검찰로 무게 중심이 확고하게 넘어간 현재의 수사권 구조는 박정희 정권 때 구축됐다. 박정희 정권은 1962년 제5차 헌법 개정에서 체포·구속·압수·수색·검증 영장청구권을 검사에게 준다는 형사소송법 조항을 헌법 조항으로 바꿨고, 이후 수사권 조정 주장이 부각될 여지가 축소됐다.
이때부터 검경의 상하 관계가 뚜렷하게 자리 잡기 시작한 것으로 볼 수 있는데, 당시 20대였던 이건개 검사가 최연소 서울경찰청장으로 임명되는 등의 조치가 대표적인 단면이다. 하지만 정보·보안·치안 측면이 강조되면서 경찰이 관여한 공안이나 대공 수사의 경우 사실상 검찰 입김이 크게 작용하지 않는 경우도 많았다.
신군부 집권 기간은 경찰이 독립적인 수사 권한을 확보할 호기로 여겨졌다. 공안 정국이 지속되면서 '경찰 공화국'으로 불릴 정도로 경찰의 위세가 커졌으며, 정부에서 조직 내 엘리트를 양성할 수 있는 경찰대학을 설립해주면서 '역량 논란'을 불식할 수 있는 체계도 조성됐다.
하지만 경찰의 수사권 독립 추진 정황이 사전에 검찰에 포착된 데다, 시기적으로도 경찰 비리가 잇따라 터지면서 국민적 지지를 받지 못한 채 무산됐다. 군사정권 시기에 발생했던 부천경찰서 성고문, 박종철 고문치사 등은 경찰 권한 비대화의 부작용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으로 지금까지도 회자되고 있다.
민주화 이후에는 야당을 중심으로 경찰의 선거 개입 방지를 위한 중립성 요구와 함께 자치경찰제·수사권 독립 주장이 제기됐다. 1996년 국민회의는 제15대 총선에서 '경찰 수사의 독자성 확보'를 제시하고 1997년 국민회의·자민련은 동일한 내용을 대선 공약으로 내세웠다.
◇노무현 정부, 수사권 조정 본격 '시동'…민간도 활발히 논의
일각에서는 1998년 이후 수사권 조정 논의 자체에 대한 공감대가 일정 부분 형성되기 시작한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수사권 구조에 관한 문제 제기와 논의가 학계 등 민간 차원으로 확산된 까닭이다.
역대 정권 중 수사권 조정이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한 건 참여정부가 들어서면서부터였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당선 이후인 2003년 수사권조정협의회와 공청회 등을 거쳐 검경 사이에 논의가 활발하게 이뤄졌다. 다만 핵심 쟁점인 수사권 배분과 검경 관계에서 이견을 좁히지 못해 무산됐다.
이후 검경 갈등은 노골화됐다. 허준영 전 경찰청장은 사실상 검찰과의 전면전을 선포했으며, 조현오 전 청장은 본청에 범죄정보과를 만들어 검사 비리를 수집하고 내사를 벌이는 등 유리한 국면을 만들기 위한 시도를 한 것으로 알려졌다. 경찰이 집단으로 검찰의 수사지휘를 거부한 일도 있었다.
논의 끝에 지난 2011년 수사권 구조 조정이 한 차례 이뤄졌다. 형사소송법이 개정되면서 경찰에 수사개시권과 진행권이 인정됐다. 당시 김준규 전 검찰총장은 수사권 조정에 반발해 사퇴했다. 하지만 경찰은 검찰의 수사 지휘에 대한 불만을 표출하거나 수사 진행상 영장청구 권한이 필요하다는 등의 주장을 내놓으면서 권한을 더 요구해왔다.
◇법조 비리·국정농단 계기 정부 의지 담겨
이번 수사권 구조 조정은 지난 2016년 법조계 비리가 빌미가 됐다고 보는 시선이 많다. 전현직 검사들의 비리 의혹과 국정농단 사태가 연이어 불거지면서 검찰을 청산해야할 '적폐'라고 지목하는 이들도 나타났으며, 검찰 개혁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확산하는 등 수사권 조정을 위한 사회적 분위기가 강하게 형성됐다.
특히 문재인 대통령이 검찰 개혁에 대한 강력한 의지를 보였다는 점이 수사권 조정으로 직결됐다. 노무현 정부 핵심 관계자였던 문 대통령이 검찰과의 갈등을 지켜봤다는 점과 보수 정권 득세 이후 이뤄진 검찰 수사를 바라보면서 느낀 문제의식 등이 단기간에 조정을 현실화하는데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경찰들 사이에서는 일부 독립적 권한을 확보한 것은 사실이지만, 환영할 만한 결과라고까지 보기는 어렵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핵심 요구였던 완전한 수사 독립에 이르지는 못했으며, 조정에 따른 변화가 체감할 만한 수준은 아니라는 언급등이 주로 제기된다. 일부 경찰은 "실무적으로 바뀌는 것은 거의 없는 조치다" "자치경찰제로 인해 잃는 것이 더 많다"라는 등의 견해를 보였다.
반면 수사 독립성에 관한 명확한 근거가 제시됐고, 수사 부문에 집중된 권력기구가 제안되는 등 의미 있는 지점도 많다고 보는 경찰들도 많다. 아울러 모든 송치 사건을 전부 다뤄야 했던 부담을 다소 덜어낼 수 있다는 측면에서 이번 조치가 검찰에서도 일정 부분 양보가 가능한 합리적 조정이었던 것으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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