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 백년과 여성]②김마리아는 누구…교사의 삶 버리고 항일영웅으로
유복한 가정…안창호 등 애국지사 보며 성장
2·8독립선언서 국내 반입하고 애국부인회장
동지의 밀고로 日 경찰 끌려가…극심한 고문
【L.A(미국)=뉴시스】김운영 편집위원 = 2.8 동경독립선언 100주년 기념식이 3.1절 100주년 LA범동포준비위원회 주최로 8일(금) 오전11시 LA한인회관에서 열렸다. 화면에 김마리아 사진. 2019.02.09. [email protected]
김마리아는 모든 것을 바친 조국을 떠나 11년 동안 중국과 미국에서 살다가 광복 1년 전인 1944년 눈을 감았다. 정부는 그에게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3등급)을 추서했다.
김마리아는 황해도에서 집안의 세 자매 중 막내로 자랐다. 그의 가문은 세간의 존경을 받는 학식 있는 집안이었다. 아버지 김윤방은 개신교 신자로서 마을에 교회와 학교를 세워 교육에 힘쓰던 인사였다.
김마리아는 경제적으로 부족함이 없는 가정 형편에서 남성과 다를 바 없는 양질의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동아일보의 1920년 6월6일 '병상에 누운 김마리아' 기사에 따르면 그의 어머니는 사망 전 "삼형제 중에 위로 둘은 못하더라도 마리아는 기어코 외국까지 유학을 시키라"는 유언을 남겼다.
【서울=뉴시스】남빛나라 기자 = 김마리아, 안창호, 차경신. (제공 = 국가보훈처)
1905년 어머니 사망 후 김마리아는 1906년 서울로 이주했다. 삼촌 김필순의 집에서 지내며 1906년 6월 연동여학교(정신여학교의 전신)에 입학했다. 당시 안창호, 김규식, 이동휘 등 애국지사들이 드나들며 조국의 앞날을 논하던 김필순의 집에서 성장기를 보낸 것이다.
18세를 맞은 1910년 김마리아는 정신여학교를 수석졸업했다. 그해 8월 "한국 전부에 관한 일체의 통치권을 완전히 또 영구히 일제에게 넘긴다"고 명시한 한일합병조약이 통과됐다. 경술년에 당한 나라의 수치란 의미로 조선인들은 '경술국치(庚戌國恥)'라고 불렀다.
김마리아는 1912년 가을 1년간의 일본 히로시마 고등여학교 유학을 거쳐 1913년 정신여학교 수학 교사로 부임한다. 이후 1915년 일본 동경여자학원 본과(당시 고등여학교)에 입학했다. 당시 조선여자 유학생 친목회(동경여자유학생친목회)에 가입했는데, 김필례와 나혜석 등 쟁쟁한 인사들이 조직한 조선 여자들의 모임이었다.
1919년 2월8일 김마리아의 일생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극적인 장면이 펼쳐진다. 동경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서 열린 재일 유학생들의 2·8독립선언에서 김마리아는 눈물을 흘리며 연설했다. 또 일본 경찰의 눈을 피해 2·8독립선언서를 옷 속에 숨겨 국내로 들여와 알렸다.
대한민국애국부인회(애국부인회) 회장으로서 조직 활동에 투신한 것도 빼놓을 수 없다. 같은 해 10월 정신여학교 숙소에서 여성계 대표 18명이 모여 그를 애국부인회 회장으로 선출했다. 그가 회장직을 맡으면서 침체됐던 애국부인회 활동이 활발해졌다. 하지만 그의 정신여학교 동기인 오현주의 밀고로 김마리아는 1919년 11월28일 일본 경찰에 끌려가 말로 다 할 수 없는 고문을 받았다.
【서울=뉴시스】김마리아는 대한민국애국부인회 활동 중 조직원의 배신으로 일본 경찰에 붙잡혀 대구지방법원과 복심법원에서 3년형을 받았다. 당시 판결문. (제공 = 국가보훈처)
"경성을 중심으로 조선 각지의 기독교 신자로 조직된 대한독립애국부인회는 올해 4월 설립했다. 이후 청년외교단이라 칭하는 비밀결사와 연락하며 독립사상의 선전, 불온문서 배포, 회원 모집 및 운동비 징발 등에 종사했다. 회원은 백 수십 명을 상회하며 6000원을 독립운동 자금으로서 임시정부에 제공하는 등 은밀히 활동했다."
1949년 4월14일자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의 오현주 피의자신문조서를 보면 그는 아래와 같이 당시를 회상하고 있다.
"나는 김마리아 사건 발생 이래 30년간을 불안과 불만 속에서 살아왔다. 유근수의 유혹에 빠져 본의 아닌 일을 저질러 많은 동지를 희생케 했다."
얼마나 가혹한 고문을 받았던지 김마리아는 1920년 5월22일 병보석으로 석방됐다. 외부인과 접촉하지 않는단 조건이 붙었다. 출감 당시 김마리아는 뼈만 남은 몸에 얼굴은 부어서 차마 눈 뜨고 보기 힘들 정도의 상태였다. 동아일보의 1920년 6월6일자 기사는 그의 큰형님 김함라의 아래와 같은 발언을 전했다.
"총감부에서 어떻게 몹시 맞았든지 가뜩이나 쇠약한 신경이 아주 말할 수 없이 쇠약할 뿐 아니라 귀와 코에 고름이 들었으므로 그것을 치료하는 중에 채 치료도 다 하지 못하고 작년 9월에 대구로 잡혀 왔으니 마리아의 병으로 말하자면 한두달 치료로는 나을 수가 없다. (중략) 건강하던 사람이 작년에 총감부에서 몹시 고문을 당한 후에 이렇게 폐인지경에 이른 것은 참으로 분하고 원통하다. 거꾸로 매달고는 죽든지 살든지 함부로 쳤다고 한다."
감옥 안에서 일본 경찰의 지시에 따라 나체로 여기저기를 뛰어다녔다는 기록도 남아있다.
【서울=뉴시스】1929년 10월 26일자 중외일보 <그들의 소식, 요즘은 어떻게 지내십니까? 감옥을 벗어나 이역으로 또 다시 학창생활에, 금의환향은 언제나 할려나? 떠드는 천지를 수놓던 김마리아양 >기사. 왼쪽 인물 사진은 김마리아. (제공=국사편찬위원회)
조국이 아니라고 발 뻗고 편안한 시간을 보낸 것은 물론 아니었다. 김마리아는 1923년 상해 국민대표회의에서 대한애국부인회 대표로 참가해 임시정부 개조론을 설파했다. 당시 임시정부를 개조하자는 개조파와 해체 후 새로운 조직을 만들자는 창조파의 대립이 팽팽했다. 그는 안창호와 함께 개조파에 속했다.
개조파와 창조파가 합의점을 찾지 못하면서 통합은 무산됐다. 그는 1923년 실망한 마음을 안고 다시 미국 로스앤젤레스로 떠났다. 그는 시카고대학에서 사회학 석사학위를 따내면서도 미국 유학생들과 여성 독립운동 단체인 근화회(槿花會)를 조직해 활동했다.
1932년 꿈에 그리던 조국으로 귀국했지만 일제의 삼엄한 감시로 인해 원산의 마르다 윌슨신학교에 부임하여 신학을 강의했다.
이후 고문 후유증으로 평양기독병원에서 입원 치료를 받다가 1944년 3월13일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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