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 백년과 여성]①서대문형무소 8호실 소녀…독립운동 상징되다
체포후에도 흔들림 없는 독립 정신
"나의 나라를 찾기 위한 정당한 일"
"비폭력 앞세운 평화주의자의 전형"
【서울=뉴시스】 독립운동가 유관순 선생. (독립기념관 제공)
1919년 4월1일(음력 3월1일). 충남 천안시 아우내 장터(병천시장)에 태극기를 품고 모인 시민들 사이로 잠시 침묵이 지나갔다. 선언서의 문장들이 가슴을 뜨겁게 훑고 지나간 뒤에야 비로소 우레와 같은 "대한독립 만세"의 함성이 터져나왔다. 수천명이 흔드는 태극기의 물결에 산천이 진동했다.
어떤 무기나 폭력도 없는 행진이었지만 이는 일제 헌병들을 긴장시키기에 충분했다. 헌병 주재소장은 실탄사격을 준비하고 시위의 현장으로 나섰다. 군중들이 태극기를 들고 주재소로 몰려오자 주재소장은 칼을 휘두르며 살인 진압을 시작했다.
아수라장의 된 일대에 선두에서 군중을 이끌던 주인공은 16세 소녀 유관순. 헌병은 유관순을 총검으로 찌르고 발로 차며 저지했다. 유관순의 아버지 유중권이 이를 저지하기 위해 뒤쫓았다. 유중권에 덤벼든 헌병과 고막을 찢는 총성. 이날 유관순은 아버지와 어머니를 모두 잃고 수색조에 의해 주동자로 체포됐다.
당시 미국 동포신문 '신한민보'에 보도된 유관순에 대한 기사에는 '한 이화여학생의 체포'라는 제목 밑에 '소녀의 양친은 원수에게 피살'이라는 부제가 달렸다. '아우내 독립만세운동'으로 기록된 이날 시위에서는 유관순의 부모를 포함한 19명이 순국했으며 30여명이 큰 부상을 입었다.
유관순은 약 한 달만인 5월9일에 함께 잡혀온 10명과 함께 공주 지방법원에서 제1심 판결을 받았다. 재판에서 유관순은 "제 나라를 찾기 위해 정당한 일을 한 것인데 어째서 군기(軍器)를 사용해 내 민족을 죽이느냐"며 항변했고, 다른 이들 또한 "평화적으로 무기 없이 만세를 부르며 행진하는 사람들에게 무차별 총질을 하느냐"고 대응했다.
일본 재판관들은 이날 유관순을 포함한 시위 주동자 3명에게 징역 7년을 언도했다. 손병희 등 민족대표 33인이 받은 형량이 최고 3년이었음을 고려했을 때 이는 엄청난 중형이다.
【서울=뉴시스】유관순 열사의 수형자기록표(국사편찬위원회 데이터베이스 제공)
3·1운동의 1주년이 다가오자 유관순은 이날을 기념하기 위해 미리부터 함께 지내던 어윤희 여사에게 "여기서 만세를 부르더라도 괜찮겠느냐"고 동의를 구했다. 이후 유관순은 여자감방 전체에 해당 사항을 전달했다.
1920년 3월1일 오후 2시. 유관순이 있는 서대문 형문소 8호 감방에서부터 만세 소리가 울려퍼졌다. 이에 각 감방에서 일제히 호응했으며 3000여명의 수감자들이 벽을 두드려 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수감소를 뒤흔들었다.
부리나케 쫓아온 간수들이 욕을 하며 뺨을 때리는 등 폭력을 가했을 때도 유관순은 담담하게 자신이 주동자라고 밝혔다. 만세를 부르는 방식으로 운동을 계속하며 탄압의 고통을 혼자 짊어지는 자세. 무자비한 폭력과 압제 하에서도 고고하고 단단한 유관순의 비폭력주의 운동 정신은 전혀 흔들림이 없었다.
독립운동에서 보여준 이같은 자세 때문에 일부 학자들은 강인한 내면과 평화주의자적인 측면을 유관순 열사의 특징으로 꼽기도 한다.
유관순연구소장을 지낸 바 있는 박충순 백석대 교수는 "보통 유관순 열사를 생각했을 때 무조건적으로 저항적이고 적극적인 이미지만 생각한다. 하지만 유 열사는 외유내강의 전형"이라며 "비폭력과 헌신을 앞세우고 평화주의자이며 그러면서도 독립운동에 임하는 자세는 누구보다 진하고 굳셌다"고 평가했다.
안성호 충북대 교수는 논문 '여성독립운동가 비교연구' 논문을 통해 "유관순 열사는 지역의 경계를 초월한 인물이며, 시대의 경계를 초월했고, 민중운동의 대열에서 여성의 존재감을 확연히 드러낸 인물"이라고 서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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