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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사료]아웅산테러로 수세 몰린 북, 선심쓰듯 3자회담 제안

등록 2024.07.02 11: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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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일 남북대화 사료집 10권·11권 공개

가까웠던 버마에 단교당하고 고립 위기

"평화로 포장한 회담 제의로 국면 돌파하려 한 듯"

[서울=뉴시스]김진아 기자 = 30주기 버마 아웅산 테러 순국자 추모식이 열린 013년 10월9일 오전 서울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 국가유공자 제1묘역에서 김규현 당시 외교부 1차관(앞줄 오른쪽 첫번째), 조태열 외교부 2차관(앞줄 오른쪽 두번째)과 유가족들이 참배하고 있다. 2024.07.02. bluesoda@newsis.com

[서울=뉴시스]김진아 기자 = 30주기 버마 아웅산 테러 순국자 추모식이 열린 013년 10월9일 오전 서울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 국가유공자 제1묘역에서 김규현  당시 외교부 1차관(앞줄 오른쪽 첫번째), 조태열 외교부 2차관(앞줄 오른쪽 두번째)과 유가족들이 참배하고 있다.  2024.07.02. [email protected]


[서울=뉴시스] 남빛나라 기자 = 통일부가 2일 공개한 남북대화 사료집을 통해 1983년 '버마 암살폭발 사건'(아웅산 묘역 테러 사건)으로 외교적 수세에 몰린 북한이 국면 전환용으로 남북미 3자 회담을 제안했던 당시 상황이 재조명됐다.

통일부는 2일 이 같은 내용을 담은 남북대화 사료집 10권·11권을 공개했다.

아웅산 테러는 1983년 10월9일 버마(현 미얀마) 수도 랑군(양곤)에 있는 아웅산 묘소에서 북한이 당시 전두환 대통령 및 수행단을 겨냥해 일으킨 전례가 드문 참변이다. 서석준 경제부총리, 취재 기자 등 17명이 목숨을 잃고 이기백 합참의장 등 14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사료집을 보면 북한은 사건 나흘 만인 10월13일 조선중앙통신사 성명을 통해 "전○○(남측 사료집 전두환 실명 미표기) 일당은 무엇 때문에 다른 나라에 가서 불벼락을 맞고나서 얼토당토않게 우리를 물고늘어지며 발광하는가"라고 주장했다.

북한 외교부는 11월 성명에서 "전○○ 역도의 각본에 따라 꾸며진 자작극"이라고 우겼다.

정권 지지율 반등 및 내부 결속을 위한 남측의 자작극이란 주장을 고수하던 북한은 두달여 만인 이듬해 1월 남북미 3자회담을 제의했다. 아웅산 테러 하루 전에 제기한 3자회담을 재차 들고나온 것이었다.

이는 사회주의 이념에 기울어 북한과 가까웠던 버마가 테러 사건 이후 북한과 외교관계를 단절하는 등 국제적 고립이 심해지자 마련한 타개책으로 받아들여졌다. 북한의 이 같은 시도는 남한이 남북 쌍방회담을 고수해 결실을 보지 못했다.

리종옥 북한 정무원 총리는 1984년 1월10일 북한 중앙인민위원회 및 최고인민회의 상설회의 연합회의에서 채택한 서울당국에 보내는 편지를 진의종 국무총리 앞으로 보냈다. 

서신은 "우리나라에서 북과 남 사이의 군사적 대치상태를 해소하고 긴장상태를 완화하기 위하여서는 우선 미국과의 사이에 문제를 풀어야 한다"며 "미국이 조선정전협정의 체약일방으로 되여있을뿐 아니라 남조선에 자기의 군대를 주둔시키고 모든 군사통수권을 장악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이어 "우리는 우리와 미국 사이의 이 회담에 우리나라에 조성된 긴장상태와 직접 관련되여 있는 다른 일방인 서울당국도 동등한 자격을 가지고 참가할 수 있을 것이라고 인정한다"고 강조했다.

미국과 회담하는 데 한국을 곁다리로 끼워주겠다며 선심을 쓰듯 제안한 것이다.

서신은 "3자 회담에선 북과 남 사이의 긴장상태를 해소하고 공고한 평화를 보장하기 위한 대책으로서 조선 정전협정의 체약쌍방인 우리와 미국사이에 정전협정을 대신할 평화협정을 체결하는 문제를 토의할 수 있을 것"이라며 "또 북과 남 사이에 불가침 선언을 채택하는 문제를 토의할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아울러 "3자회담에서는 그밖에 미국과 서울당국이 제기하는 문제들도 토의될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우리 정부는 북한의 진정한 사죄 이후 남북한이 마주 앉아야 한다고 밝혔다.

진의종 총리는 다음달 대북 서한에서 아웅산 테러에 대한 납득할 만한 조치 이후에 남북한 당사자 간 직접 대화가 이뤄져야 한다고 밝혔다. '남북한당국 최고책임자회담'이 어렵다면 '남북한 각료급 회담'에라도 응하란 것이 남측 입장이었다.

하지만 북한은 "미군이 남조선을 강점하고 있고 미군사령관이 '국군'에 대한 통수권을 쥐고 있는 조건"(1984년 3월7일 북한 정무원 총리 대남편지)이라며 남북 쌍방회담을 거부했다.

이에 진의종 총리는 대북성명문을 통해 "우리의 국가원수가 엄연히 행사하고 있는 국군통수권에 대하여 왈가왈부 하는 것은 우리의 주권에 대한 모독이며 사실을 왜곡한 망발"이라고 반박했다.

북한은 이듬해 3월 돌연 7월 미국 로스앤젤레스(LA) 하계 올림픽 단일팀 출전을 논의하기 위한 체육회담을 제안했다. 아웅산 테러 책임 소재를 둘러싼 공방이 이어지고 북한이 삐라(대북전단) 살포에 항의하면서 체육회담도 성과 없이 끝났다.

문서공개 예비심사위원인 이호령 한국국방연구원 안보전략센터장은 "(테러 이후) 북한과 유사한 입장을 가진 국가 중 하나인 버마가 단교하고 국제사회에 북한을 믿지 않는 분위기가 형성됐다"며 "이에 따라 북한은 평화로 포장한 3자회담과 이듬해 체육회담을 통해 국면을 돌파하려 한 것 같다"고 설명했다.

이번에 공개된 남북회담 사료집은 1981년 12월~1987년 5월 기간 인도·체육 분야 남북회담 문서 1693쪽이다. 2022년 첫 공개 이후 이번이 다섯번째 사료공개다.


◎공감언론 뉴시스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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