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페이스북
  • 트위터
  • 유튜브

[신간] 폭군과 명군 사이

등록 2022.09.28 14:26:00

  • 이메일 보내기
  • 프린터
  • PDF
[서울=뉴시스] 세조, 폭군과 명군 사이 (사진=푸른역사 제공) 2022.09,28. photo@newsis.com  *재판매 및 DB 금지

[서울=뉴시스] 세조, 폭군과 명군 사이 (사진=푸른역사 제공) 2022.09,28. [email protected]   *재판매 및 DB 금지


[서울=뉴시스]이수지 기자 = 역사에서 조선 7대 임금 세조는 엇갈린 평가를 받고 있다. 조카를 왕위를 빼앗아 왕좌에 오르기까지와 국왕으로서의 능력과 치적이 극명하게 대비된다.

세조는 무에 뛰어났고, 공법 제정이나 한글 창제에도 관여했을 만큼 나랏일에도 능했다. 왕 서거 후 형 문종의 비호가 아니었으면 탄핵돼 곤장을 맞을 뻔했을 지경에 이른다. 단종 대 들어 아우 안평에게 반역을 재촉하는 김종서 등 권신의 전횡과 견제에 대해 칼을 뽑아든 것은 어쩌면 당연했다.

친동생 둘이 죽임을 당하고 조카가 스스로 목을 매도록 했으며 성삼문 등을 처형되는 등 정통성을 부정하는 이들에 대해서는 망설임 없이 단죄했다.

한편 각 고을이 스스로 싸우고 지키는 진관체제 확립, 국가 운영의 만세성법인 경국대전과 단군부터 한국사 정통을 세우는 동국통감 편찬, 검약을 기치로 국가 세출의 표준화를 도모한 횡간 제정 등 조선의 토대를 굳건히 했다.

한명회 등 공신을 지방에 파견하는 체찰사제 운영, 호패법과 군역제도 정비, 백정 중 제비를 뽑은 사람은 억울함을 고할 수 있는 탐주의 시행도 세조의 치적이다.

여진 정벌을 독자적으로 단행하거나 환구단에서 정례적으로 천제를 거행하는 등 조선의 위의를 과시하기도 했다.

책 '세조, 폭군과 명군 사이'(푸른역사)는 세조실록을 바탕으로 ‘찬탈’ 원죄를 딛고 부국강병을 이룬 문제적 군주가 된 세조의 이유를 톺아본다.

저자는 이 책에서 계유정난을 계기로 왕의 아들에서 아버지 세종의 예치를 넘어서는 초월적 절대 군주로 자리매김하려는 욕망을 실현하려고 처절하게 몸부림쳤던 정치가 세조를 보여준다.


◎공감언론 뉴시스 [email protected]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