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 백년과 여성]③"권기옥, 독립운동 새지평…해방후엔 공군 창설"
진영통합·공군 창설에 앞장…역사서 한국연감 출판도
말년에는 장학사업 힘써…"모든 젊은이가 다 내 자식"
【서울=뉴시스】권기옥. 2019.02.22 (제공=권기옥 유족 권현 광복회 이사장)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한 이후에는 충칭으로 거처를 옮겨 육군참모학교에서 영어와 일본어, 일본군 식별법 등을 가르쳤다.
1943년에는 독립운동 진영 통합을 위해 충칭 임시정부 직할로 한국애국부인회를 만들기도 했다. 전열을 다듬고 여성들의 참여를 독려하기 위해 조선민족혁명당 계열의 부인들과 한국독립당 계열의 부인들을 한 데 모았고 사교부장으로 역할을 다했다.
권기옥이 다시 비행의 꿈을 불태운 것도 같은 해다. 중국 공군에서 함께 활동하던 한국인 비행사 최용덕 등과 함께 공군설계위원회를 조직하고 광복군 비행대를 구상하기 시작하면서다.
1945년 3월 임시정부 군무부에 계획안이 제출됐다. 미국과 중국에서 비행기를 지원 받아 한국인 비행사들이 직접 일본과의 전투에 참여하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이마저도 일본이 예상보다 일찍 항복하는 바람에 물거품이 됐다.
【서울=뉴시스】 1924년 7월 첫 단독비행에 성공한 후 도산 안창호 선생에게 보낸 사진. 2019.02.22 (제공=권기옥 유족 권현 광복회 이사장)
김영주 전 공군사관학교 박물관장은 2007년 발표한 논문 '한국 최초의 여류 비행사 권기옥’에서 "권기옥이라는 그물코를 들어 올리면 한국독립운동사라는 그물 전체가 따라 올라온다"고 했다.
"평양 출신인 권기옥은 좌와 우, 개신교와 무장투쟁단체, 아나키스트, 임정과 민혁당 계열, 중국과 미국을 아우르는 지점에 있었다. 권기옥을 통해서 남북이 분단되기 전 (…) 대부분의 독립운동가들이 상해나 남경의 한 골목에서 어깨를 맞대고 살았던 시절을 복원해낸다. 독립운동사에서의 분단을 극복해내는 디딤돌로 삼는다."
권기옥은 이후 역사가 바로서야 나라가 바로선다는 뜻으로 '한국연감’을 발간하는 출판 사업을 시작해 한국 최초·유일의 여성 출판인이 됐다.
말년에는 '비행사 할머니’로 불리며 교육사업에 힘썼다. 권기옥의 아들인 권현 광복회 이사는 "본인을 위해 쓰는 돈이 거의 없었다"고 어머니를 기억했다. "80살을 넘어서였나, 그런 말씀을 하셨어요. '내가 조금만 더 젊었다면 달나라에 가고 싶다. 젊은이들이 이런 도전을 할 수 있는 큰 꿈을 키워야 한다’고."
1975년에는 대한민국의 모든 젊은이가 내 자식이라며 전재산을 장학 사업에 기부하기도 했다. 당초 자신의 뒤를 이을 공군사관학교 여생도들을 위한 장학금으로 쓰길 바랐던 것으로 전해졌다. 공사는 학비를 내지 않는 탓에 이는 서울대학교 학생 150여명의 학비와 생활비로 쓰였다.
【서울=뉴시스】한국연감 출판 사업에 뛰어든 이후 권기옥의 모습. 2019.02.22 (제공=권기옥 유족 권현 광복회 이사장)
"독립운동에는 하나의 방향만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권기옥 선생의 활동을 통해 알 수 있죠. 후방이 아닌 전방에 있는, 길을 개척하는 여성 독립운동가의 모습을 정확히 보여주는 분입니다."
정부는 권기옥의 공로를 인정해 1968년 대통령 표창, 1977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국민장을 수여했다. 사망 후 국립묘지 애국지사묘에 안장했고, 국가보훈처는 2003년 8월 권기옥을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
▲참고자료: 정혜주 '날개옷을 찾아서'(2015), 윤선자 '한국독립운동과 권기옥의 비상'(2014), 김영주 '한국최초의 여류비행사 권기옥'(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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