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화전가' 의상 김영진 "3월에 볼 봄과 여름에 볼 봄은 다르죠"
대표적 한복 디자이너
국립극단 70주년 기념 신작 참여
6일부터 23일까지 명동예술극장
[서울=뉴시스] '화전가' 의상 디자이너 김영진. 2020.08.05. (사진 = 국립극단 제공) [email protected]
김영진이 오는 6일부터 23일까지 명동예술극장에서 초연하는 연극 '화전가' 의상을 맡았다. 국립극단과 손잡고 1945년 해방 직후 만주를 배경으로 한 '1945'로 호평을 들은 극작가 배삼식의 신작이자 국립극단 70주년 기념작이다.
6·25 전쟁 발발 직전인 1950년 4월 어느 화장한 봄날 경북 내륙 반촌이 배경. '김씨'의 환갑을 축하하기 위해 한 집에 모인 9명의 여인들이 환갑잔치 대신 화전놀이를 떠나는 이야기다.
최근 서울 한남동 차이김영진한복에서 만난 김영진은 "제가 연극 의상을 하는 이유는 끊임없이 배울 수 있기 때문인데 이번 '화전가' 역시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제가 살아보지 못한 시대를 경험할 수 있게 하는 예술을 좋아하는데, 박완서 선생님의 소설들이 대표적이죠. '화전가' 희곡을 통해서 그런 희열을 느꼈어요. 큰 사건이 있거나 스펙터클하지는 않아요. 그런데 전쟁을 앞둔 상황에서의 서정적인 행위 의식은 척박한 세상 속 일종의 기도처럼 느껴졌어요. 안녕과 기원을 빌고 스스로를 축복하기 위해 머리부터 발끝까지 예쁜 옷을 차려 입는 상황이 너무 아름답게 느껴졌죠."
전통에 창의성을 더한 옷들로 주목 받는 김영진은 한국 패션계의 맥박을 이어 받는 대표적 인물이다. 전통 맞춤 한복 브랜드 '차이 김영진', 한복을 모티브로 한 기성복 브랜드 '차이킴'의 대표다. 영화 '해어화', 특히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에서 '고애신'(김태리)이 입고 나온 한복을 디자인하고 제작해 일반 대중의 눈도장을 받았다.
한국 패션계의 살아있는 역사라 불리는 진태옥, 1세대 패션 거장 한혜자, 패션 큐레이팅의 선구자인 1세대 스타일리스트 서영희 등 선배들과 함께 뭉쳐다니며 사상, 태도를 전수 받고 있다. 바쁜 가운데도 시간을 쪼개 만나는 4인방 중 귀여움을 담당하는 막내 역을 톡톡히 하고 있다.
[서울=뉴시스] 연극 '화전가' 연습 사진. 2020.08.05. (사진 = 국립극단 제공) [email protected]
탐구력과 유연성은 김영진에게도 적용되는 덕목이다. 이번 '화전가'에서 김씨를 연기하는 배우 예수정을 만나 많은 것을 느끼고 배우고 있다며 함박웃음을 지었다.
"평상시에 연기를 보면서 너무 궁금했던 분이세요. 기대 이상으로 저와 잘 통했어요. 옷에 대한 이해도 잘 하시고요. ('전원일기'의 할머니 역으로 유명한 배우이자 예수정의 모친인) 정애란 선생님의 태를 이어 받으셔서 그런지 한복하고도 참 잘 어울리시죠. 마지막 장면에 굳이 한복 의상을 입지 않으셔도 됐는데, 한복 태가 너무 예뻐서 한 벌 더 만들었어요."
김영진의 의상은 배우에 대한 이해와 함께 인물에 대한 공감도 배어 있다. '화전가'에서 박실이 의상은 영화 '땡볕'(1984)에서 작부 역을 맡았던 배우 이혜영이 한복을 소화한 태에서 영감을 얻기도 했다. "'땡볕' 이전까지는 한복이 천박스럽게 소화되는 경우가 있었는데 이혜영 선생님은 정말 섹시하게 소화하셨어요. 박실이가 서울에서 럭셔리한 것을 경험해 거기에 맞는 콘셉트를 설정했죠."
김영진은 옷을 만들기 전 배우들의 신체 치수를 허투루 재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다. 의상이 캐릭터와 배우에게 딱 맞아 다시 손보는 일이 일절 없다.
배우들이 바쁜 연습실에 찾아가 허둥지둥 치수를 재고 싶지 않아, 배우들을 자신의 아틀리에로 초대해 천천히 치수를 측정한다. 그렇게 그들의 삶을 자연스레 조금씩 함께 나누다보면, 옷에 디자이너의 세심함과 배우의 삶이 자연스럽게 묻어나게 된다.
"제 브랜드를 통해 만드는 의상은 저한테 빠져 있어요. 하지만 여러 사람과 커뮤니케이션이 중요하고 객관적인 시선이 필요한 연극 의상은 협력과 소통이 중요하죠. 그런 부분이 너무 좋고, 그것이 연극의 매력인 것 같아요."
[서울=뉴시스] '화전가'에서 예수정이 연기하는 김씨 의상. 2020.08.05. (사진 = 국립극단 제공) [email protected]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의상을 다시 손봐야 했다. "영주 댁(배우 박윤정)이 실제 임신을 해서 의상을 다시 만들어야 했어요. 계절이 바뀌어서 의상이 둔탁하게 느껴져 손 보고 싶은 마음도 굴뚝 같았죠. 3월에 보여주려고 하는 봄과 여름에 보여주는 봄은 다르거든요. 계속 보면 볼수록 손보고 싶어 혼났습니다."
과거 연극배우로도 활약했던 김영진은 '화전가'를 통해 이성열 국립극단 예술감독과 처음 작업하는 것에도 만족감을 드러냈다. 극단 백수광부 등에 몸 담은 이 감독은 젊은 시절부터 재기발랄한 연출로 대학로에 소문이 자자했다.
"제가 어릴 때 작업을 하셨던 것들을 많이 봤어요. 그래서 직접 작업도 해보고 싶었는데 조용히 세밀한 부분을 짚어내시는 연출력이 대단하시더라고요."
김영진은 국립극단과 작업이 처음이다. 직접적인 연이 닿는 인맥도 없었다. 이 감독이 한복을 잘 만드는 디자이너를 원했고 국립극단 김철순 PD가 수소문을 통해 김영진을 추천하면서 작업하게 됐다.
최근 공연계에는 김영진을 가리켜 '국립 디자이너' '국민 디자이너'로 부르는 말이 유행처럼 퍼지고 있다. 국립오페라단 '동백꽃 아가씨', 국립창극단 '심청가'를 작업했고 국립국악관현악단, 국립박물관문화재단과 작업도 앞두고 있기 때문이다. 국립 예술단체와 작업이 연이어 이어지고 있다.
이런 사례는 국립단체가 투명해지고 있다는 것을 증거하는 일이기도 하다. 증명된 디자이너가 계속 일을 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돼있다는 방증이기 때문이다. "저는 연줄도 없고, 비지니스도 잘 못하는 사람이에요. 그런데 저를 계속 찾아주신다는 것은 감사한 일이죠."
[서울=뉴시스] '화전가' 의상 디자이너 김영진. 2020.08.05. (사진 = 국립극단 제공) [email protected]
아날로그적 인간을 자처하는 김영진은 "패션을 한다는 것이 무조건 새로워져야만 하는 건 아니다"라고 말했다. 이런 변화의 시대에 중심축을 잘 잡고 있어야 한다는 얘기다. "20, 30대에는 크레이티브한 것이 필요하다면 50대에는 그 세대에 맞게 해야 할 일이 있죠. 철학과 세계관이 분명히 있어야 합니다. 늙지도 젊지도 않은 50대에 제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고민도 크게 했는데, 긍정적인 방향을 생각하고 있어요."
의상계의 척추뼈인 김영진은 공연계에도 자극을 주며 중심 인물로 자리매김해가고 있다. 그가 있어서 연극계가 다행인지 모르겠다. 그녀의 질문은 연극계의 또 다른 확장성의 시작이 될 수 있으니까.
"갈수록 모든 분야에서 비주얼이 중요하잖아요. 공연에도 연출 외에 의상 디자인, 무대 디자인, 메이크업을 아우를 수 있는 비주얼 감독이 있어야 해요. 연출이 전체적인 그림을 만들고 관념적인 일을 한다면, 비주얼 감독이 미장센 부분을 담당해줘야죠. 생각이 잘 맞는 연출, 배우들을 만나 프로젝트성 극단을 만들고 그런 작업도 해보고 싶은 마음이 있어요."
그러면서 김영진은 뒷광대의 개념을 강조했다. 뒷광대는 '무대미술계의 대모'로 통하는 이병복(1927~2017)이 스스로를 지칭한 표현이다. 무대미술가라는 호칭을 겸손으로 받아낸 표현인 동시에, 광대로 통하는 배우 못지 않게 연극에서 중요한 스태프로서 자존감이 밴 수식이다.
김영진도 "앞광대와 뒷광대가 대등한 입장에서 작업을 할 때 연극이 더 발전할 것"이라면서 "연극계가 힘들어도 비주얼적인 부분에 더 많은 투자를 하고, 뒷광대들도 적극적으로 임해줘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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