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현주 아트클럽] 만화 '세일러 문' 추상화로 변신 시킨 윤향로 작가
이태원 P21갤러리서 ‘Surflatpictor’ 개인전
【서울=뉴시스】 박현주 기자 = 11일 서울 이태원 경리단길에 위치한 P21갤러리에서 개인전을 여는 윤향로 작가가 작품을 설명하고 있다.
【서울=뉴시스】 박현주 미술전문기자 = 최근 출판가에 90년대 인기만화였던 '곰돌이 푸’가 베스트셀러 1위를 휘어잡고 있다. 월트 디즈니 캐릭터 '곰돌이 푸'의 대사와 행복 메시지를 엮은 '곰돌이 푸, 행복한 일은 매일 있어' 책이다. 90년대 일요일 아침을 함께한 디즈니 만화동산 '곰돌이 푸'를 보고 자란 세대가 현재 30~40대로 소비문화를 이끄는 주역인 덕분이다. 책은 만화의 추억과 힐링의 공감대를 높여 인기를 끌고 있다는 분석이다.
미술시장은 이미 '만화 세대'가 점령했다. '만화같은 그림'은 팝아트의 또다른 줄기로 뻗어나와 젊은 작가들의 전유물처럼 자리잡있다. 2000년대 후반에는 진짜 '만화 캐릭터'같은 그림이 캔버스에 들어왔다. '눈 큰 그림' 마리킴의 작품과 한국화로 그려낸 손동현의 슈퍼맨·베트맨·울버린이 신선한 충격을 선사하며 인기를 끌었다.
급변하는 세상, 그래서 순수회화속 '캐릭터 그림'은 벌써 식상해졌다.
90년대생들의 캐릭터 그림 이후 잠잠했던 미술시장에 10여년만에 진정한 '만화 세대' 작가가 등장했다.
86년생. 4살때부터 미술학원을 다니며 그림을 그렸고 예고, 미대를 나와 화가가 됐다. 어릴적 TV만 틀면 나왔던 만화는 아이를 지배했다. 홍익대 서양화과를 졸업하고 한국에술종합학교 평면조형전공으로 석사 졸업했지만, 화가로 데뷔 시킨건 만화였다.
다섯번째 개인전을 서울 이태원 P21에서 여는 윤향로(32)작가다.
만화나 애니메이션이 작업의 바탕이다. 어릴적 강렬하게 접했던 만화의 이미지를 발췌해 컴퓨터 프로그램으로 변형한 후 캔버스 위에 회화로 그려낸다.
하지만 작품은 전혀 만화같지 않다. 만화의 흔적은 찾아볼수 없는 추상화로 변신했다.
"일본의 유명 미소녀 만화 주인공이 변신하거나 악당과 전투할때 에너지 혹은 아우라가 발산되는 장면들이에요."
11일 P21 전시장에서 만난 윤향로 작가는 "만화 주인공보다는 그걸 제외한 장면을 화면 캡처해 추상적인 이미지로 옮긴 것"이라며 "다양한 표면 질감으로 평면성이 어떻게 드러나는지에 관심있다"고 했다.
이번 전시에 선보인 추상회화 ‘Surflatpictor’시리즈는 만화라는 빼대로 보면 이해가 쉽다. 짙푸른 색감이 압도적인 'Screenshot' 그림의 경우 만화 '달의 요정 세일러 문'이 배경이다.
소녀들을 홀리며 유행어가 된 '정의의 이름으로 널 용서하지 않겠어'라며 변신하는 순간 빛나는 아우라를 캡처한 것. 요즘 말로 '포텐 터지는' 그 장면을 옮겨온 것이다.
세일러문 부터 밍키등 소녀 변신 만화에 빠졌던 작가는 만화 오타쿠는 아니라고 했다. 변신 만화보다 '달의 아이'로 유명한 시즈미 레이코를 좋아한다면서 "소녀 변신 만화 계보도 만들어볼까하는 생각도 해봤다"며 유명 만화 제목을 줄줄이 뀄다.
【서울=뉴시스】 박현주 기자 = 서울 이태원 P21 전시장에서 윤향로의 개인전 'Suflatpictor'전이 6월 10일까지 열린다. 만화의 한 장면을 떠와 에어브러쉬로 그려낸 추상화전이다.
만화의 한 장면을 추상화로 변신 시킨 윤향로의 작업은 "대중문화의 이미지들을 어떤 방식으로 추상회화로 만들수 있을까"라는 고민에서 시작됐다.
작업은 IT세대 작가답게 디지털 가공을 거쳐 나온다. 이미지 파일을 자르고 조정하고, 변형하는 도구의 기능과 작업 과정에서 발생하는 효과를 탐구한다.
선정된 애니메이션 화면을 컴퓨터의 '화면 캡처' 기능을 통해 독립된 개체로 만든다. 이후 디지털 편집 소프트웨어인 포토샵으로 '확대 크롭' 해 본래의 모습을 알아볼 수 없게 된 이미지를 회화로 옮긴다. 이렇게 만들어낸 형상은 붓이 아닌 에어브러시로 캔버스 위에 그려져 디지털 이미지가 가지고 있는 표면에 가깝게 매끈하게 표현된다. 이미지의 에너지 입자를 가져와 추상회화로 내놓는 방식이다.
작가는 이 과정을 "이미지를 추적해 나가는 여정"이라며 컴퓨터의 알고리즘이 유추해 만들어내는 가상의 이미지에 주목한다고 했다.
이전엔 영상과 프린트 작업도 했다. DC코믹 커버 이미지를 그린 작업으로 윤향로 이름을 알렸다. 등장인물들이 제거된 상황에서 남는게 무엇인가. 어떤 풍경이 남아있을까. 사건의 주체들이 빠져나갔을때 어떤 모습일까가 궁금해서 그린 그림이지만 만화 덕후들은 단박에 그 장면을 알아보는 그림이다.
【서울=뉴시스】 박현주 기자 = 윤향로 작가를 대중에 인식시킨 '마블 시리즈' 작품도 전시됐다. 슈퍼맨등 만화의 한 장면을 차용한 그림으로 영웅(사람)은 없고, 그 흔적과 풍경만을 그려낸 작품이다. '만화 덕후'들이라면 한눈에 알아보는 장면들이다.
윤향로의 이번 개인전 타이틀 ‘Surflatpictor’은 작가가 지어냈다. 초-납작함, 과다한 평평함으로 해석될 수 있는 ‘surflat’과 ‘pictor’의 합성어다. 디지털 이미지의 생산과 편집 방식, 회화 평면의 공간적 확장이 서로 교차하는 지점을 넌지시 암시한다.
이번 전시에서는 작가가 사용하는 이미지 변주 방식인 콘텐트 어웨어 기능 자체를 거울의 반사를 이용했다.
P21 갤러리 공간에 거울을 설치해 3차원적인 효과를 연출했다. 거울 옆에 설치된 작품은 유리에 UV 인쇄하여 스크린 위 얇고 투명한 이미지를 구현했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마주한 커다란 거울에,나 자신과 그림이 함께 들어간 듯한 착시를 선사한다.
P21갤러리는 좁은 공간이지만 그 공간에 맞게 작품을 제작하고 작품을 설치할수 있어 젊은 작가들이 다양한 실험욕구를 자극하는 전시장이다.
【서울=뉴시스】 박현주 기자 = P21전시장은 좁지만 독특한 공간 연출로 작품 설치의 묘미가 있다. 윤향로 작가는 전시장 한쪽 벽면에 대형 거울을 설치해 작품과 작품을 반사하며 감상자가 작품속으로 들어온 듯한 3차원적인 느낌을 선사한다.
다양한 매체 실험후 2~3년전부터 회화를 집중적으로 작업하고 있다는 작가는 "나는 이미지를 정리하고 수집하는 사람"이라고 정의했다.
"소비됐던 이미지를 수집하는 사람"이라는 그는 "이번에 선보인 작품의 바탕이 된 세일러문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해 가장 많이 팔린, 당시 유명했던 만화들의 콘텐츠를 가져와서 비트는 작업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소설가 알랭드 보통에 따르면 '미술은 경험을 보존하는 방식'이다. 화가는 무엇을 기념해야 하고, 무엇을 생략해야하는지를 아는 사람들이다.
90년대 만화를 보고 자란 화가는 삭제된 현실(이미지)을 복구하는 능력자가 됐다. 결국 "예술이라는 것은 자기 인식을 누적시켜 타인에게 그 결실을 전달하는 훌륭한 수단"이다.
만화 이미지를 세련되게 추상회화로 옮겨낸 작가는 "많이 보는게 힘이 된다"며 "앞으로 좋은 작품을 많이하는 것"이 바람이라고 했다. 전시 기화가 잘 주어지지않는 젊은작가들의 곤궁한 현실을 반영하는 말이다. 작품은 호응을 먹고 큰다. 그림도 보는 만큼 안다. 많이 보고, 많이 봐야 느낀다. 예술을 이해하는 능력을 쌓기 위해 필요한 덕목이다. 전시는 6월 10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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