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혐오를 혐오한다②]오늘 하루 내가 뱉는 저주, 내가 듣는 저주
흑인 여성 "한국선 혐오가 일상…직업 소개소도 냉대"
페미니즘 동아리 여고생 "메갈X 얼굴 보자" 위협당해
일상적인 혐오 표현들에 전염돼 자기도 모르게 동참
호남 비하 말 내뱉고 스스로 놀라…"내가 왜 그러지"
"퇴근길 전철서 '틀딱충들 왜 이리 많지' 생각하기도"
혐오 일상화는 소수자·약자들에게 자기 검열 강제
'나도 맘충 아닐까' 아이와 나갈 때마다 남들 눈치
그는 뉴시스 기자에게 "한국에서는 혐오가 일상이기 때문에 한 가지 콕 집어 말하기도 어렵다"고 토로했다. "매일 여동생과 함께 대림역에 있는 일자리 소개소에 가요. 하지만 일하기는 쉽지 않아요. 업체들은 우리 인종을 물어본 뒤 아무렇지도 않게 '흑인과는 일하고 싶지 않다'고 말하거든요."
◇교실에서, 카톡에서…사방에서 혐오가 판친다
현재 우리 사회에 가장 일상화된 혐오는 페미니즘을 향해 있다. 장소와 세대를 불문한다. 학교에서도 직장에서도 일상 대화에도 스마트폰 메신저에도 널린 게 페미니즘 혐오다.
지난해 경기도 한 고등학교에 페미니즘 동아리가 만들어졌는데, 당시 일부 남학생들은 "메갈X들 얼굴 좀 보자"며 동아리를 홍보한 여학생들이 있는 교실 문을 열어젖히는 일이 발생했다. 이 동아리 소속 민모(16)양은 "페미니즘에 무지한 남학생들이 '메갈X 쿵쾅쿵쾅' 등의 말로 폭력을 행사하는 일이 많다 보니 여학생들이 동아리에 들거나 의견 말하기를 꺼린다"고 전했다. '메갈'은 국내 페미니즘 커뮤니티의 시초인 '메갈리아'의 줄임말로, 현재 페미니스트를 지칭하는 대명사로 쓰인다.
페미니즘을 공부하는 중·고등학생이 모인 카카오톡 오픈채팅방엔 '여혐(여성혐오)' 공격을 당했다고 토로하는 학생들이 넘쳐난다. 한 학생은 혐오발언을 당한 적 있냐는 기자의 질문에 "'페미질하면 몰카(몰래카메라) 더 찍어버린다'는 말도 하더라. '페미들은 미쳤다'고 하는 애들 정도는 흔하다"고 답했다.
청주청년회 페미니즘소모임 '행동하는 페미니스트'에서 활동 중인 프리랜서 장모(35)씨는 "내가 페미니스트란 이유로 내 파트너(남편)를 불쌍하게 본다. 우리는 서로의 삶을 존중하고 평등해지려고 노력하며 사는데도 '네 남편은 기도 못 펴고 살겠다'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한다"고 했다. 그는 "페미니스트는 성적으로 개방적이지 않냐면서 오히려 더 성희롱을 거리낌 없이 하기도 한다"고 덧붙였다.
【서울=뉴시스】최진석 기자 = 6월9일 오후 서울 종로구 대학로에서 열린 불법촬영 편파수사 규탄시위. [email protected]
일상에 범람하는 혐오 표현에 물드는 건 순식간이다. 야구팬인 최모(30)씨는 얼마 전 직장 동료와 대화 중 '7시 방향'이란 말을 내뱉고 스스로 화들짝 놀랐다. '7시 방향'은 일부 야구 커뮤니티 네티즌이 광주·전라도가 연고지인 기아 타이거즈를 깎아내릴 때 쓰는 말이다. 광주의 위치를 에둘러 지칭하며 비꼬는 의미다. 같은 목적으로 '그짝('그쪽'의 전라도 사투리)팀', '홍어', '해외팀'(전라도는 한국이 아니라는 비하)이라는 말도 있다.
최씨는 "나 자신을 스스로 굉장히 상식적일뿐 아니라 소수자에게 열려있는 진보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온라인에서도 그런 표현을 한번도 쓴 적이 없는데, 전라도를 비하하는 말들을 하도 보다 보니 일상 대화에서 나도 모르게 그런 표현을 썼다. 너무 충격이었다"고 했다.
직장인 이모(30)씨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 그는 "처음 태극기 집회가 등장했을 때 일부 극우 노인들을 온라인에서 '틀딱충'으로 부르지 않았나. 좋지 않은 표현인데도 여기저기서 쓰이는 걸 반복적으로 봐오고 익숙해져서 그런지 퇴근길 지하철에서 노인을 보면 '틀딱충들이 왜 이렇게 많지'하는 생각이 저절로 든다"고 털어놨다.
'혐오의 일상화'는 소수자·약자의 자기 검열을 강제한다. 다시 말해, 사회의 일반적인 상식에 기준을 두고 행동하지 못하고 '혹시나 누군가 나를 욕하지는 않을까' 끊임없이 눈치를 보며 자기 행동에 스스로 제약을 가하는 것이다.
'맘충' 논란이 대표적이다. 맘충은 엄마를 의미하는 '맘(mom)'에 '벌레 충(蟲)'을 결합한 신조어로 아이를 데리고 다니면서 아이 엄마란 이유로 주변 사람에게 갖가지 폐를 끼치는 사람들을 지칭한다. 문제는 이 단어의 대상이 전방위적으로 퍼지고 있다는 점이다. 가령 카페에 아이를 데리고 들어가기만 해도 맘충이라고 부르고, 아이를 데리고 대중교통을 타는 것 자체를 맘충이라고 지칭하는 식이다. 어린 아이를 데리고 다니는 엄마 전체를 마치 사회에 해악을 주는 존재 쯤으로 여기는 세태를 인터넷 커뮤니티 한 두군 데만 들어가도 쉽게 목격할 수 있다.
28개월 딸을 둔 도모(30)씨는 "아이와 지하철을 타면 앉아있는 사람들 앞에 서지 않고 일부러 문 앞에 선다"며 "혹시나 자리를 양보해달라고 느끼는 사람이 있을까 봐 조심스럽다. 최근에는 애 엄마가 대중교통을 타는 것 자체가 민폐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고 설명했다.
윤김지영 건국대학교 몸문화연구소 교수는 "혐오는 약자나 소수자들은 막 대해도 감히 나에게 대항할 수 없다는 확신이 있을 때 가능하다"며 "결국 혐오는 이 사회의 촘촘한 위계의 서열에서 비롯된다"고 분석했다. 이어 "온라인상에서 혐오를 유머코드로 공유하면서 소속감을 느끼는 분위기가 있다"며 "그러면서 나의 적이 누구인지, 누구를 짓밟고 있는지 느끼며 권력 지표를 나눈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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