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판 백마고지' 광화문광장, 이대로 괜찮나
이명박·오세훈 이어 박원순까지 광장 재편에 심혈
광화문광장 재구조화 사업 놓고 끊이지 않는 논란
보수-진보 이념 충돌의 장이자 격전지로 고착화
서울시 "특정한 계층이나 정파에 국한되지 않아"
시민사회 "공론화 과정 부족했다" 지적 잇따라
전문가 "가치 광장에 심는 것 바람직 하지 않아"
"시민 넘어 국민 합의 거치는 시간과 절차 필요"
【서울=뉴시스】 전진환 기자 = 서울시는 21일 새로운 광화문광장의 미래 청사진인 국제설계공모 최종 당선작을 발표하고 2021년 새로운 광화문을 향한 첫 걸음을 시작한다고 밝혔다. 지상광장은 질서 없는 구조물과 배치를 정리해 경복궁과 그 뒤 북악산의 원경을 광장 어디서든 막힘없이 볼 수 있다. 다양한 대형 이벤트가 열릴 수 있도록 비움의 공간으로 조성된다. 세종대왕상과 이순신장군상을 세종문화회관 옆과 옛 삼군부 터(정부종합청사 앞)로 각각 이전하는 방안이 제안됐다. 시는 수도권 서북부와 동남부를 고속으로 연결하는 GTX노선(파주 운정~서울~화성 동탄)의 광화문 복합역사 신설도 추진한다. 2019.01.21. [email protected] (사진=뉴시스DB)
광화문광장은 원래 1395년 조선초 경복궁 창건 후 육조거리가 있던 자리였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역사의 흔적이 훼손됐지만 이후에도 1919년 3·1운동, 1960년 4·19혁명, 1987년 6월 항쟁 등을 거치며 민족사를 관통하는 중요한 장소로 제몫을 해왔다. 왕복 16차선 도로로 변해 자동차에 장악당했던 이 공간은 오세훈 전 서울시장이 있던 2009년 광장으로 변모했다.
광화문광장 조성은 군부독재시대가 끝나고 21세기 들어 '절차적 민주주의'를 넘어 '실질적 민주주의'로 나아가는 과도기임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이 과정에서 광장은 자연스레 보수와 진보가 의견을 개진하며 대립하는 장이 됐다. 여기에 역대 서울시장들의 정치적 야심이 공간적으로 구현되면서 광화문광장은 한국에서 가장 '정치적인' 공간이 돼버리고 말았다.
이렇다보니 광화문광장 자체를 놓고도 설왕설래가 끊이지 않았다. 오세훈 전 시장이 광장을 만들고 난 뒤부터 줄곧 논란이 계속됐던 것처럼 박 시장이 추진하는 재구조화사업을 놓고도 대립이 격화되고 있다.
설계 당선작 발표 직후 지적됐던 사안에 세월호 기억공간 설치 논란까지 더해지면서 광화문광장은 그야말로 이념논쟁의 최전선이 됐다.
당초 광화문광장 재구조화사업 국제공모 당선작 설계자들은 광장 바닥에 촛불집회 상징문양을 새기겠다고 밝혔다. 광화문광장을 중심으로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을 위한 촛불집회가 벌어졌던 만큼 촛불 문양을 바닥에 새겨 의미를 되새기자는 취지였지만 이는 자유한국당 등 보수진영의 반발을 불렀다.
여기에 박원순 시장이 광화문광장에 있는 세월호 참사 추모 천막과 합동분향소를 철거하고 기억공간을 조성하겠다고 밝혀 또 한번 자유한국당 등 보수진영을 자극했다. 서울시의회 자유한국당 여명 의원은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경기도 안산시에서조차 추모공간 합의가 어려운 상황을 시장은 알고 있냐"며 "기억공간 조성을 왜 세월호 유가족과만 협의하고 서울시민의 여론은 수렴하지 않냐"고 비난했다.
광화문광장에 있는 이순신장군상을 이전할지 여부는 현 자유한국당 등 보수진영과 연결되는 과거 군부독재정권에 대한 평가와 맞물린다.
이순신장군상은 1968년 박정희 전 대통령의 지시로 세워졌다. 이를 놓고 박 전 대통령이 이순신장군의 명성을 이용해 군부독재를 미화하려 한다는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 이순신장군상에 대한 비판은 결국 문치주의의 상징인 세종대왕 동상 건립(2009년)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이 때문에 이순신장군상 이전은 보수진영으로서는 받아들이기 쉽지 않을 수 있다.
【서울=뉴시스】서울 광화문광장이 2021년 차량 중심의 거대한 중앙분리대라는 오명을 벗고 역사성을 간직한 국가 상징광장·민주공간으로 재탄생한다. (그래픽=안지혜 기자) [email protected] (사진=뉴시스DB)
정부서울청사를 우회하는 도로를 만드는 방안을 놓고선 지난달 서울시와 행정안전부가 한차례 격돌했다. 김부겸 행안부장관이 격앙된 목소리로 박 시장을 비난하면서 정치공방으로 알려지긴 했지만 실은 그 배경에는 중앙정부부처와 광역지방자치단체간 뿌리 깊은 갈등이 있다.
행안부는 서울시의 인사권 행사에 제약을 가하면서 서울시로부터 곱지 않은 시선을 받아왔다. 이 때문에 서울시는 광역자치단체의 대표격으로 지방분권을 외쳤고 이는 행안부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든 측면이 있다. 지방분권을 둘러싼 서울시와 행안부의 갈등은 다양한 측면에서 증폭돼 왔고 이번에 광화문광장 우회도로 조성을 놓고 표면화된 것이다.
나아가 광화문광장 주변 도로를 한곳으로 모으고 보행공간을 크게 넓히는 현 계획은 보행자 우선이냐, 자동차 우선이냐라는 논란을 야기할 수 있다.
박 시장은 도심 내 도로교통 환경을 악화시키더라도 보행자를 우선시하겠다는 '보행친화도시' 정책을 추진해왔다. 그간 이 정책을 둘러싼 보행자와 승용차 이용자간 갈등은 수면 아래 있었지만 광화문광장 재구조화로 도로망이 재편되고 교통혼잡이 가중될 경우 양측의 갈등은 본격화될 수 있다.
하지만 광장으로 논란을 초래한 사람은 박 시장만이 아니다. 이명박 전 시장은 서울광장을 조성했고 오세훈 전 시장은 광화문광장을 만들었다. 광장 조성은 그때마다 논란을 불렀고 해당 광장을 만든 시장은 여론의 주목을 한몸에 받았다. 대선주자 1순위로 꼽히는 역대 서울시장들에게 광장 조성과 개편은 하나의 수순이 된 셈이다.
그럼에도 박 시장과 서울시는 전임시장들과는 다르다고 항변한다.
시 관계자는 "새로운 광화문광장 조성은 광장의 역사성과 상징성을 회복해 대한민국의 대표 공간으로 만드는 사업"이라며 "어느 특정한 계층이나 정파에 국한되지 않고 모든 시민이 주인이 되는 진정한 의미의 광장으로 가꿔갈 것"이라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또 "현재 새로운 광화문광장 조성을 둘러싸고 다양한 의견들이 제기되고 있는데 앞으로 구체적인 설계와 시공과정에서 시민과 전문가들의 다양한 의견을 폭넓게 수렴해나갈 것"이라고 덧붙였다.
신용철 서울시 광화문광장기획반장도 "광화문광장추진단은 시민이 편하게 쉬고 소통하는 공간을 계획하고 있다"며 "정치적인 관계는 고려하지 않는다. 재구조화 사업은 시민을 위한 사업이지 정치적 공간을 만드는 사업이 아니다"라고 선을 그었다.
박 시장과 서울시의 이 같은 항변에도 의심의 눈초리는 쉽사리 거둬지지 않고 있다. 역대 시장과 보수-진보 양 진영이 광장을 6·25전쟁 당시 격전지였던 백마고지처럼 여기며 치열한 쟁탈전을 멈추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서울=뉴시스】광화문광장이 2021년 차 중심의 거대한 중앙분리대라는 오명을 벗고 역사성을 간직한 국가 상징광장이자 열린 일상의 민주공간으로 탈바꿈, 시민 품으로 돌아온다. 2019.01.21. (사진=서울시 제공) (사진=뉴시스DB)
보수성향 단체인 바른사회시민회의의 박주희 사회실장은 "광화문광장이 서울의 중심이고 사람이 많이 드나드는 곳"이라며 "정권이 바뀜에 따라서 정치적인 투쟁의 장소나 이념적으로 시민에게 자신들의 주장을 알리는 장소로 이용돼왔다"고 설명했다.
박 실장은 "어떤 특정집단의 목적 하에 있는 행사가 광화문광장에서 진행되면 일부는 동조하지만 눈살을 찌푸리고 공감을 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고 말했다.
진보 성향인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의 남은경 도시개혁센터 팀장은 "시장들이 임기 내에 완성하고 싶어 계속 고치고 뜯는 상황이 반복되고 있다"며 "지금은 도시계획과정에서 의견수렴은 거의 없다시피 하다. 특히 (시장이 광장 조성을) 자신의 업적으로 활용하면 치명적일 수 있다. 복구가 쉽지 않다. 다음 세대에 피해나 부작용이 나타날 수 있다"고 말했다.
남 팀장은 "과정을 거쳐서 천천히 가야 한다"며 "아무리 좋은 계획이라도 일시에 획기적으로 바꾸려는 것은 부작용을 동반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광장을 정치적 상징으로 채우지 말고 오히려 비우려는 시도를 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또 정치인 개인의 생각이 과도하게 반영되는 광장 조성을 제어할 제도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남 팀장은 비움의 미학을 강조했다. 그는 "여의도광장을 공원화할 때 비어있는 공간을 마련해야 한다고 했었는데 결국 공원화했다"며 "광화문광장도 지금 시장이 완성하려 해선 안 된다. 다음 세대들이 채워나갈 수 있게 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상철 나라살림연구소 연구위원은 서울시장의 도시계획 권한을 제어할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는 의견을 내놨다.
김 위원은 "서울시는 광화문광장 시민위원회를 비롯해 지역주민을 위한 500인 공론장을 열었다고 하지만 최근 박 시장 발언을 보면 세월호 유가족 기억공간 관련 얘기가 불쑥 나왔다"며 "이는 서울시가 진행한 공론절차에 이들의 의견이 반영 안됐고 의견수렴 절차가 형식적이었음을 보여준다"고 지적했다.
그는 "더구나 GTX A노선 광화문복합역사를 민자역사로 짓겠다는 것은 그간 한번도 공론장에서 얘기된 적 없다. 박 시장이 광화문광장이라는 시민의 광장을 레고블록 조립하듯이 즉흥적으로 준비하는 것처럼 보인다"며 "이는 본인의 입으로 얘기하는 민주주의, 역사, 시민정치를 스스로 배반하는 것 아니냐"고 반문했다.
그러면서 "서울시의 광장 관련 조례내용은 대부분 광장 운영에 관한 것인데 이번에 조례 내용을 고쳐서 광장의 현재나 미래에 대한 공론화나 광장 구조개선 관련 내용을 넣어야 한다"며 "현 조례를 전면개정해서 관련 논의 절차를 명시를 하고 재구조화 절차를 무겁게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진영논리를 넘어 광화문광장의 역사적 의미를 살려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다. 광화문광장을 개편하되 시민, 나아가 국민의 의견을 충실히 반영해야 재구조화 작업의 정당성을 비로소 확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창무 한양대 도시공학과 교수는 "광화문광장은 서울의 중요한 중심공간이고 역사적 맥락도 있고 공간적 지속성 부분도 있어서 정권이 바뀔 때마다 모두가 동의하지는 않는 가치를 광장에 심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며 "또 광화문광장은 서울시민만의 공간은 아니다. 국민적 합의 과정을 거치는 시간이나 절차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광장을 상시적인 오픈스페이스로 유지할 필요가 있을까 하는 부분도 의문이 있긴 하다"며 "(박 시장이) 밀어붙이면 안 될 것이야 없지만 많은 사람들이 불만을 표출할 수 있다. 공개적인 논의 하에서 합의를 얻어가는 과정이 느긋하게 진행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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