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노이회담 충격 못벗는 북한, 대미·대남 비난 심해져
지난달 12일 김정은 시정연설이 바탕
남한 보수세력 비판과 한미 이간 초점
갈수록 수위 높아져 자충수 될 가능성
【서울=뉴시스】북한 김정은 국무위원회 위원장이 12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인민회의 제14기 제1차회의에서 한 시정연설을 했다며 13일 노동신문이 보도했다. 2019.04.13. (출처=노동신문) [email protected]
【서울=뉴시스】강영진 기자 = 하노이 북미회담 결렬로 타격을 입은 북한의 미국과 남한에 대한 화풀이가 갈수록 도를 더하고 있다. 노동신문과 조선중앙통신 등 북한의 공식 매체는 물론 대남 선전매체인 '우리민족끼리'와 '메아리' 등도 거의 매일 비난하는 논평을 쏟아내고 있다.
이들의 대남 비난의 내용은 천편일률적이다. 자유한국당을 필두로 한 보수세력에 대한 공격, 남북간 합의의 이행을 방해하는 미국에 대한 비난, 남한 당국에 대한 비난, 한미 합동군사훈련에 대한 공격 등이 큰 줄기다. 이를 토대로 '미국이 한일간 협력을 강요한다'고 비난하는 식으로 변형된 비난도 등장한다.
이같은 대남 비난의 소재와 논리들은 모두 지난 12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최고인민회의에서 국무위원장에 재추대된 뒤 가진 첫 시정연설에 근거를 두고 있다.
김위원장은 시정 연설에서 "남조선의 보수세력들은 민족의 지향과 국제사회의 한결같은 기대앞에 너무나 부실한 언동으로 화답하고 있으며 북남관계를 판문점선언 발표 이전 시기로 되돌려보려고 모지름(안간힘)을 쓰고 있다"고 강조했다.
이어 "미국은 남조선당국에 '속도조절'을 노골적으로 강박하고 있으며 북남합의 이행을 저들의 대조선 제재압박 정책에 복종시키려고 각방으로 책동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또 "남조선당국은 추세를 보아가며 좌고우면하고 분주다사한 행각을 재촉하며 오지랖넓은 '중재자', '촉진자' 행세를 할 것이 아니라 민족의 일원으로서 제 정신을 가지고 제가 할 소리는 당당히 하면서 민족의 이익을 옹호하는 당사자가 되어야 한다"고 촉구했다. 거친 표현으로 문재인 대통령을 모욕했다는 지적을 받는 대목이다.
이어서 "미국과 함께 허울만 바꿔 쓰고 이미 중단하게 된 합동군사연습까지 다시 강행하면서 은폐된 적대행위에 집요하게 매달리는 남조선 군부호전세력의 무분별한 책동을 그대로 두고…"라는 표현으로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대폭 축소된 한미합동군사훈련을 문제 삼았다.
시정연설로부터 13일 뒤인 지난달 25일 북한의 대남기구인 조국평화통일위원회(이하 조평통)는 진행중인 한미합동 공군훈련을 비난하는 대변인 담화를 발표했다.
'남조선당국의 배신적행위는 북남관계를 더욱 위태로운 국면으로 떠밀게 될것이다'이라는 제목의 담화는 "우리가 그 어떤 대응조치를 취하든 남조선 당국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을 것이며 만일 그에 대해 시비질 할 때는 문제가 더 복잡해지고 사태가 험악한 지경에 이르게 될 것이다"는 위협적 표현으로 김위원장 연설보다 훨씬 높은 수위로 남한을 비난했다.
조평통은 이틀 뒤 "자주통일과 평화번영의 새시대를 펼쳐주신 절세위인의 업적은 천추만대에 길이 빛날 것이다'라는 제목의 비망록을 발표했다. 비망록은 특정 사안에 대해 전후 맥락을 설명하면서 북한의 입장을 강조하려는 목적으로 발표하는 장문의 글이다. 북한이 중요하다고 평가하는 사안을 소재로 다루는데 이번 비망록은 판문점 선언 1년을 맞아 발표했다.
비망록은 '절세 위인' 김위원장이 '남북관계 대전환'을 이끌었지만 '남한의 반통일세력'과 미국 때문에 "한반도 정세가 전쟁의 위험이 짙어가는 속에 파국으로 치닫던 과거로 되돌아가는가 하는 엄중한 정세가 조성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김위원장의 노력으로 "통일의 새 아침이 반드시 밝아오고야 말 것"이라고 천명했다. 전체적으로 김위원장을 우상화하는데 초점을 맞추면서도 대남, 대미 비난을 빠트리지 않고 있다.
조평통 대변인 담화와 비망록 발표를 전후로 북한의 모든 매체들이 대남, 대미 비난을 하루도 빠트리지 않다시피 하고있다.
3일 노동신문은 "자주통일의 앞길을 밝혀주는 불멸의 기치"라는 제목의 논평에서 김위원장이 시정연설 내용 가운데 남북관계에 대해 밝힌 내용을 되풀이 옮기면서 '미국이 남한 당국에 속도조절을 강박하면서 남북합의 이행에 제동을 걸고 있다'고 비난하고 나섰다.
이 글은 김위원장 시정연설에 담긴 표현을 거의 고치지 않고 사용한 대목들이 매우 많다는 점이 흥미롭다. 시정연설이 북한의 모든 선전선동 활동 및 대남, 대미 비난의 기초가 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날 '우리민족끼리'는 '사드 전개훈련을 통해 드러난 것은'이라는 제목의 글에서 지난달 중순 주한미군이 평택에서 사드 대공미사일 전개훈련을 '군사적 도발'로 규정하고 미국을 "평화의 파괴자"라고 비난했다.
이 훈련은 지난달 15일~20일 사이에 실시된 것을 주한미군이 23일에 공개한 것이다. 이에 대한 비난을 10여일이 지난 3일에도 계속하고 있는 것이다. 북한 매체들은 이처럼 특정 사안을 두고 비난을 반복하는 것이 특징이다. 당일 비난할 소재가 없으면 한참 지난 사안이라도 다시 끄집어내 비판하기 일쑤다.
'우리민족끼리'는 또 "성근한(성실하고 부지런한, 충분한) 사죄와 배상없이 관계개선이란 있을 수 없다"는 제목의 논평기사에서 미국이 남한에 일본과 관계개선을 강박하고 있어 온 겨레의 분노를 자아내고 있다고 주장했다. 한미 관계를 이간하기 위한 소재로 미국이 한일관계 개선을 바란다는 점을 악용하고 있는 것이다. 북한이 한일관계가 개선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메아리'는 이날 "외세 의존에 종지부를 찍어야 한다"는 논평기사에서 '자유한국당과 바른미래당, 보수언론이 미국과 공조해야 한다고 줴쳐대면서(마구 떠들면서) 남북관계를 가로막아 보려고 악을 써대고 있다'고 비난했다. 또 미국이 남한에 '속도조절'을 강박하고 남북합의 이행을 미국의 대북압박정책에 복속하려고 한다고 주장했다.
이처럼 북한 매체들은 남한이 미국을 거부하고 독자적으로 행동할 것을 촉구하면서 한미를 이간시키고 남한 사회의 보수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총력전을 펴고 있다.
북한의 이런 움직임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그러나 최근의 대남, 대미 비난의 횟수가 잦고 강도가 센 점은 하노이회담 결렬의 후유증이 그만큼 심각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북미 핵협상이 타결될 여지가 갈수록 줄어들고 북미간에 신경전이 거듭되면서 북한 매체들의 대미, 대남 비난은 한층 거칠어지고 잦아질 전망이다.
미국과 신경전을 펴면서 한미를 이간하고 남한 당국까지 싸잡아 비난하는 것이 자신들에게 이익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듯하다. 그러나 갈수록 도가 심해지는 대남, 대미 비난은 '남북관계에 대사변을 일으킨 김정은의 통큰 결단'이 남북관계를 개선하기는 커녕 오히려 악화하는 자충수가 될 우려도 있어 보인다.
[email protected]
Copyright © NEWSIS.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