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 매카트니 "롤링스톤스 찰리 와츠, 환상적인 드러머였죠"
영국 록밴드 '롤링 스톤스' 드러머 찰리 와츠, 80세로 별세
1963년부터 활동...드러머들의 드러머로도 유명
패션 감각 뛰어나 신사로 통해…사인은 공개 안돼
[서울=AP/뉴시스] 찰리 와츠
록밴드 '비틀스'의 폴 매카트니(79)가 80세를 일기로 별세한 영국 록밴드 '롤링 스톤스' 드러머 찰리 와츠에 대해 이렇게 추모했다. 24일(현지시간) 트위터에 50초가량의 추모 영상을 남기고 "굳고 단단했던 사람"이라고 기억했다.
비틀스와 롤링스톤스는 1960년대 영국 출신 밴드들이 대거 미국 시장에 진출한 흐름을 가리키는 '브리티시 인베이전(British Invasion)'의 쌍두마차였다.
와츠는 보컬 믹 재거(78), 기타 키스 리처즈(78) 등 스타 멤버들이 즐비한 이 밴드에서 화려하지 않았지만 필수적 멤버였다.
뉴욕타임스 등 외신에 따르면 와츠는 화려한 록 스타나 팝 아이돌의 삶에 관심이 없었다. 다른 동료들처럼 과감한 모습을 보이지도 않았다.
재즈 성향을 지닌 스윙을 연주하며, 그 세대의 가장 훌륭한 록 드러머 중 한 명으로 자리매김하는 데 만족했다. 일부 록 드러머들이 커다한 음향과 폭발하는 듯한 연주를 쫓을 때 와츠는 섬세함과 스윙, 그루브에 신경 써 연주했다.
[서울=AP/뉴시스] 롤링스톤스 멤버들
미국 록 음악의 전설 브루스 스프링스틴은 드러머 맥스 와인버그의 1991년판 책 '더 빅 비트(The Big Beat)의 서문에서 "믹의 목소리와 키스의 기타만큼 찰리 와츠의 스네어 사운드가 롤링 스톤스"라고 그를 추어올렸다.
와츠는 1941년 6월2일 런던에서 공군 아버지와 주부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와츠가 처음 연주한 악기는 발현악기인 밴조였다. 하지만 손가락 기술이 쉽지 않았던 그는 드럼으로 주특기를 바꿨다.
열 두 살에 재즈의 매력을 발견했다. 마일스 데이비스, 듀크 엘링턴, 찰스 밍거스의 팬이 됐다. 해로우 미술학교를 졸업한 와츠는 한 때 런던 광고 대행사의 그래픽 아티스트로 일했다.
재즈 색소폰 연주자 찰리 파커에 대한 동화책 '오드 투 어 하이플라잉 버드(Ode to a Highflying Bird)' 삽화를 그렸다. 퇴근 뒤에는 다양한 장르의 그룹과 함께 드럼을 연주했다.
[서울=AP/뉴시스] 찰리 와츠
1963년 데뷔싱글 '컴 온(Come On)'을 내놓은 이후 이 팀은 세계적인 밴드가 됐다. 30장의 정규 앨범을 냈다. 9장이 미국 차트 1위, 10장이 영국 차트 1위에 올랐다. 1989년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헌액됐다.
와츠는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로큰롤 밴드"라는 그룹에 대한 수식보다 멤버들과 함께 연주하는 것 자체를 즐겼다. 해를 거듭할수록 팀에 대한 와츠의 기여도가 커졌다. 밴드의 무대 세트, 상품, 앨범 커버 디자인에 참여했다. 1967년 앨범 '비트윈 더 버턴스(Between the Buttons)'의 뒷표지에 삽화도 담당했다.
롤링스톤스의 주된 이미지는 거친 나쁜 남자다. 하지만 와츠는 섹스와 마약을 삼갔다. 1964년 미술학교 학생이자 조각가와 조용히 결혼했다. 투어 중에도 혼자 호텔 방으로 돌아가, 자신의 방을 스케치했다. 1967년 이후 투어 도중 잠든 모든 침대를 그렸다는 일화도 있다.
패션 감각도 뛰어나 항상 옷을 멋지게 차려 입는 신사로 통했다. 특히 멋스런 조끼를 잘 갖춰 입었다. 2004년 후두암이 발견돼 치료를 받기도 했지만 연주에 대한 열정은 멈추지 않았다.
[서울=AP/뉴시스] 찰리 와츠
와츠는 1996년 롤링 스톤과 인터뷰에서 "나는 항상 드러머가 되고 싶었다. 다만 아레나 경기장보다는 좀 더 친밀한 환경을 상상했다. 항상 찰리 파커를 앞에 두고, (뉴욕의 유명 재즈 클럽들인) 블루 노트나 버드랜드에 있는 듯한 상상을 했다"고 말했다.
말년에 와츠는 영국 남서부의 한 농장으로 이주해 말들을 키우며 살았다. 뉴욕타임스와 빌보드 등 외신은 와츠가 런던의 병원에서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조용히 눈을 감았다고 전했다. 사인은 공개되지 않았다. 건강 문제로 곧 진행되는 롤링스톤스의 미국 투어 명단에 빠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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