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대종 문화소통]북한은 왜 평양의 천년유적 ‘기자릉’을 파괴했는가
<사진 1> 갑골문의 왕국이자 천자국인 은상(殷商)이 낳은 위대한 현인 기자(箕子)의 가계도
옛적 우리 조상들에게 있어 민족 고유의 정체성과 문화를 지키기 위한 노력은 대단한 것이었다. 결국 언젠가는 불초한 자손으로 인해 훼멸되고 어그러져 깡그리 망각될 날이 올 수도 있겠지만, 할아버지의 할아버지께서 가보처럼 물려준 언어와 문자, 예의범절, 음식 그리고 역법(曆法) 문화 등을 잊지 않고 지키려는 마음가짐은 오랫동안 유지되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이름은 단군이 BC2333년 개창한 ‘조선’이다. 그리고 그로부터 1300여 년이 지난 BC1018년 은나라가 주나라에 의해 패망하자, 은나라 천제(天帝=천자)의 아들 ‘기자(箕子)’는 따르는 이들과 함께 부사년의 말대로 고토인 동북으로 이동, 단군조선을 이은 동방예의지국 기자조선을 건국하였다. 사실이 이와 같기 때문에 1430년 4월 30일 세종대왕께서는 기자조선을 ‘후조선’이라 칭하였으며, 기자대왕을 ‘후조선 시조 기자(後朝鮮始祖箕子)’라 예우하였다.
기자에 대해 중국 바이두 및 위키 백과사전에선 <사진 1>처럼 상나라 제29대 천자인 ‘문정(文丁)’의 아들이자, 제30대 ‘제을(帝乙)’의 아우이며 제31대 ‘제신(帝辛)’의 숙부라고 하였다. ‘기자지(箕子志)’에서는 기자를 상나라 제28대 천자 ‘무을(武乙)’의 손자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 경우에도 기자는 은나라 마지막 천자인 제신의 숙부가 된다.
BC194년 41대 준왕(準王)에 이르러 기자조선이 위만에게 멸망한 후, 그 유민들은 크게 마한과 부여로 양분되었다. 하지만 부여는 은나라를 잊지 않고 ‘위서(魏書)’ 오환선비동이전의 “은나라 정월에 하늘에 제사를 지낸다(以殷正月祭天)”는 기록이 증명하듯 은력을 썼다. 은력은 현재의 양력과 유사한 체계로, 예를 들면 2019년은 1월 6일이 은력의 정월 설날이다.
천하가 주나라의 세상이 되었으면, 그 제후국들은 당연히 주나라의 역법을 써야 한다. 그러나 기자조선과 부여는 은나라가 망한 이후에도 계속해서 은력을 사용했다. 이것은 무슨 의미인가? 기자조선이 주나라의 통제를 받지 않는 독립국이었다는 뜻이다. 주나라의 신하가 되지 않겠다는 기자의 선포와 또 주 무왕에게 하늘의 도인 ‘홍범구주’를 가르쳐줌으로써 스승이 된 사실은 기자조선이 주나라의 종속국이 아니었음을 증명한다.
<사진 2> 기자릉. 1102년 고려 숙종의 명으로 축조되었고, 1959년 김일성의 명령에 따라 폭파되어 지금은 1945년 이전에 촬영된 위 사진만 남아 있음
우리 민족의 이러한 기자대왕에 대한 존숭은 일제 강점기 “기자는 중국 사람이므로 기자조선사는 조선사에서 제외해야 하고, 중국역사의 일부로 취급해야 한다.”는 조선사편수회의 농간에 소멸되어 갔다. ‘중국인’이라는 말의 본래 뜻인 ‘천제국 사람’이라는 좋은 의미는 잊어버리고, ‘다른 민족 외지인’이라는 배타적 감정에만 휩싸여, 북한은 1959년 평양시 기림리의 천 년 유적 <사진 2>의 ‘기자릉’을 파괴했고, 남한 또한 고대사에서 기자조선을 배제하는 엄청난 우를 범했다. 영명하신 세종께서는 은나라 이래의 고전(古篆)을 연구하여 훈민정음으로 승화·발전·연결시켰는데, 우리는 아직까지 미로를 헤매고 있다.
대종언어연구소 소장 [email protected]
Copyright © NEWSIS.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