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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시인' 이육사 친필편지 7건 복원…문화재 추진한다

등록 2021.12.16 16:18:17수정 2021.12.16 16:2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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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기록원, 이육사 생애기록 7건 복원

이육사문학관, 등록문화재 지정 추진

[세종=뉴시스] 독립운동가 이육사. (사진=이육사 문학관 제공) 2019.10.24.

[세종=뉴시스] 독립운동가 이육사. (사진=이육사 문학관 제공) 2019.10.24.

[세종=뉴시스] 변해정 기자 = 저항시인인 이육사(1904~1944)의 유일한 친필 한문편지가 복원됐다.

이 편지는 독립운동 중 어려웠던 생활 모습을 엿볼 수 있는 희귀자료로, 이육사문학관 측이 등록문화재 지정을 추진하기로 했다. 

행정안전부 국가기록원은 이육사 시인과 관련 기록물을 복원해 원본과 함께 온라인(www.archives.go.kr)에서 공개한다고 16일 밝혔다.

이 기록물은 이육사문학관과 함께 발굴한 이육사의 공·사적 행적에 관한 총 7건 341매이다. 지난 9월부터 2개월에 걸쳐 복원했다.

이 가운데 이육사가 중외일보 기자 시절 친척 이상하에게 보낸 '한문편지'는 변형이 심해 가려져 있던 일부분의 기록이 복원됐다.

편지에는 "형제가 서로 의지하며 밤낮으로 열심히 일하고 있으나 보잘것 없어서 아침에는 끼니거리가 없고 저녁이면 잠잘 곳이 마땅하지 않으니 한탄스럽기 짝이 없을 뿐입니다. 비단 크게 힘을 쓴 것이라고 스스로 자랑스럽게 생각할 뿐만 아니라 참으로 숙부님께서 기대하신 것이 중대했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는 비록 몇 사람의 반대가 있더라도 마땅히 극력 무마하여 탄탄대로에 이르도록 할 것이니 근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라는 내용이 쓰여 있다.

[세종=뉴시스] 친척 이원봉에게 보낸 엽서(1931년 11월10일. 左)와 문우였던 신석초에게 보낸 엽서(1936년. 右). (자료= 국가기록원 제공) 2021.12.16.

[세종=뉴시스] 친척 이원봉에게 보낸 엽서(1931년 11월10일. 左)와 문우였던 신석초에게 보낸 엽서(1936년. 右). (자료= 국가기록원 제공) 2021.12.16.

편지를 쓴 1930년은 당시 이육사가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사건에 연루돼 대구형무소에서 3년간 옥고를 치른 뒤 출소한 이듬해다. '극력 무마'가 독립운동과 관련돼 있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이육사는 '청포도', '절정', '광야' 등의 시로 알려진 시인이다. 일제강점기 중국을 오가며 항일 투쟁을 전개하다가 1943년 가을 체포돼 베이징 감옥에서 순국했다. 본명은 원록(源祿)이며, 당시 이활이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이육사라는 이름은 그가 옥고를 치르던 당시 수인번호(264)이다.

손병희 이육사문학관 관장은 "이육사의 남아있는 유일한 친필 한문편지로서 편지 내용을 통해 이육사 가족의 어려웠던 생활을 엿볼 수 있다"며 "현재 등록문화재 지정을 추진 중에 있다"고 전했다.
 
이육사가 1927년 10월 조선은행 폭파사건에 연루돼 체포됐을 당시 처분 결과를 기록한 '집행원부' 원문도 이번에 최초로 공개됐다. 당시 일제 경찰은 조선은행 폭파사건의 범인으로 이육사 외에 그의 형 이원기와 동생 이원일, 이정기, 조재만 등을 체포했다.

[세종=뉴시스] 대구지방법원 검사국이 경찰에서 접수한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탄투척사건 피의자 1028명의 처분 결과를 정리한 '집행원부'. 당시 범인으로 지목돼 체포된 이육사가 본명 이원록으로 쓰여 있다. (자료= 국가기록원 제공) 2021.12.16.

[세종=뉴시스] 대구지방법원 검사국이 경찰에서 접수한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탄투척사건 피의자 1028명의 처분 결과를 정리한 '집행원부'. 당시 범인으로 지목돼 체포된 이육사가 본명 이원록으로 쓰여 있다. (자료= 국가기록원 제공) 2021.12.16.

집행원부는 대구지방법원 검사국이 경찰에서 접수한 피의자 1028명의 처분 결과를 정리한 것으로, 이육사는 본명 이원록으로 기록돼 있다. 그의 죄목은 폭발물취체규칙, 정치에 관한 범죄처벌의 건, 치안유지법 위반, 협박과 살인 미수라고 적혀 있다. 석방 일자는 1929년 5월4일인 것을 재확인했다.

장신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는 "집행원부는 이육사의 생애를 구성하는데 매우 중요한 기록일 뿐 아니라 지역의 민족운동사의 복원이라는 측면에서도 높은 사료적 가치를 가진다"고 평가했다.

공개 기록물에는 친척 이원봉에게 보낸 엽서(1931년 11월10일)와 문우(文友)였던 신석초에게 보낸 엽서(1936년)도 있다.

이원봉에게 보낸 엽서에는 "늘 폭풍 같은 나의 생활이야 별로 이상스러울 것도 없지만 이번이야말로 십년의 그리운 얼굴을 바람 같이 가서 꿈같이 만나고 또 번개 같이 떠나올 때 보내는 그대의 마음도 섭섭한 줄 알았다만은 떠나는 나의 마음은? 아니 떠나면 안 되는 나의 생활아! 이것을 현대인의 아니, 샐러리맨의 남모르는 비애라고나 하여둘까?"라고 쓰여 있다. 안동을 다녀온 후의 소회와 오랜 시간 함께 할 수 없었던 아쉬움을 담고 있다. 

신석초에게 보낸 엽서에서는 "명사 오십리에 동해의 잔물결이 두 사람의 걸어간 자취조차 씻어버리지 못하고 보드랍게 할터 갑니다. 깨끗한 일광 해면에 접촉되는 지음 유달리 빛납니다. 함께 와서 보았으면 여북 좋아하지 않을 것을, 건강하소서"라며 아름다운 동해의 풍경을 시적으로 표현하고 친구와 함께하고 싶은 마음을 적고 있다.
[세종=뉴시스] 이육사가 친척인 이상하에게 보낸 한문편지(1930년). (자료= 국가기록원 제공) 2021.12.16.

[세종=뉴시스] 이육사가 친척인 이상하에게 보낸 한문편지(1930년). (자료= 국가기록원 제공) 2021.12.16.

 
이 외에도 1946년 작고 이후 발간된 육사시집 초판본(1946)과 이육사가 다닌 보문의숙의 화학·생물 교재(1908)도 복원됐다.

최재희 국가기록원장은 "이번 복원된 이육사의 기록은 민·관이 협력해 중요한 기록을 발굴하고 공동 활용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고 말했다.


◎공감언론 뉴시스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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